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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31화 (31/472)

31화. 가능성 1%

-빨간 통은 진미채 볶음이고 백김치는 식탁 위에 있으니까 하루 지나면 꼭 냉장고에 넣어 놔.

“크! 안 그래도 백김치 먹고 싶었는데 역시 울 엄마. 언니, 갖다 줘서 땡큐.”

의진은 진료실에서 친언니와 통화중이었다.

-그나저나 당직했다면서 또 근무야? 너네 병원은 쉬지도 않니?

“언니 여기가 무슨 대학병원인 줄 알아? 형편에 맞게 일하는 거지. 그리고 알아서 잘 쉬고 있으니까 걱정 마.”

-참, 의진아 너 사람 소개 받을래? 네 형부가…….

“응, 안 받아.”

-얘는 들어 보지도 않고. 진짜 괜찮은 사람이래.

“언니 나 콜 들어온다.”

-정의진 너 또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 아니거든. 전화할게.”

일부러 전화를 끊은 의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진료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네.”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가 왔는데요.”

“마취해야 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환자분이 임산부예요.”

“그래요? 그럼 피 검사와 소변 검사 하고 진료실로 안내 좀 해 줄래요.”

“알겠습니다.”

* * *

기본 검사를 마친 임산부는 남편과 함께 의진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어제 밤부터 명치가 답답하고 배가 살짝 아팠어요.”

남편은 아내와 함께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에 배뭉침이라 생각하다가 저녁 먹은 게 얹혔나 보다 했고요.”

오른쪽 아랫배의 통증이 상당한 듯 아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오른쪽 아랫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파 오기 시작했어요.”

“선생님 결과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간호사에게 검사 결과를 받은 의진은 꼼꼼하게 살펴봤다.

“선생님 혹시 우리 아기 잘못된 거…….”

“아니요. 아기는 문제없어요.”

아기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은 들은 아내는 아픈 와중에도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와이프가 왜 이렇게 아픈 거죠?”

“초음파로 봤을 때 아기는 이상 없이 잘 있고 소변 검사도 괜찮은데 피 검사에서 염증 수치가 높게 나왔어요.”

“염증이요?”

“네.”

피 검사 결과 임산부의 염증 수치가 평균을 훌쩍 넘은 18,000이 나온 것이다.

“왜 염증이 높게 나온 거예요?”

“복부 초음파로 확인을 해야겠지만 충수염이 의심되고 있어요.”

“충수염이요? 그게 뭔가요?”

“흔히들 맹장염이라고 하죠. 일단 복부 초음파 진행할게요.”

맹장염이란 소릴 들은 아내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배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병동에서 회진을 마치고 내려온 태경이 최 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항상 일찍 출근하시는 거 보면 팀장님은 참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그저 직원들에게 솔선수범이 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아주 멋진 마음이시네요.”

“그나저나 당직 때문에 잠도 못 주무셨겠습니다.”

“전혀요.”

첫 당직이었지만 생각처럼 바쁘진 않았다.

다행히 위급한 환자가 없던 탓에 몇 시간이지만 꿀잠을 잘 수 있었다.

“다행이네요. 맞다. 요즘 직원들 사이에서 선생님을 부르는 별명이 생긴 거 아십니까?”

“별명이요?”

“네.”

“제가 그렇게 특징적인 사람이 아닌데.”

“선생님은 ‘인더열닥’라고 한다더군요.”

“인더열닥? 그게 뭔데요?”

“인터보다 더한 열혈닥터. 라는 말을 줄여서 인더열닥라고 합니다. 지금도 보세요.”

최 팀장은 태경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수첩과 볼펜을 가리켰다.

“환자가 없을 때도 틈만 나면 회진을 하고 손에는 늘 수첩과 볼펜을 들고 다니시잖아요.”

“아, 이거요?”

태경은 손에 쥔 수첩을 흔들어 보였다.

“인턴 때 많이 들고 다니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보통은 인턴 때 수첩을 항상 들고 다니며 오더 내린 선생님의 말을 적곤 한다.

하지만 태경이 수첩을 사용하는 용도는 달랐다.

환자들의 다섯 번째 바이탈을 기록 중이였다. 병명과 치료에 따라 냄새도 변하였기에 꼼꼼한 기록은 필수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 그 수첩에 뭘 적고 계신 건가요?”

“특별한 건 아니고 환자들 기록용입니다.”

“뭔가 대단한 게 적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태경은 순간 수첩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사무실로 향하는 최 팀장을 보며 태경은 자신의 별명을 곱씹었다.

“인더열닥이라. 기분 좋은데.”

“선생님?”

흐뭇해하는 그의 등 뒤로 간호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진료실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나요?”

“임산부 환자가 왔는데 선생님이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임산부 환자라면 OBGY(산부인과) 선생님도 같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진료실로 가신댔어요.”

“알겠어요.”

임산부 환자라는 말에 태경은 빠르게 진료실로 향했다.

* * *

철컥-

“선배?”

진료실 문을 열자 의진이 태경을 반겼다.

“응급실에도 안 계시던데 어디 있었어요?”

“병동 좀 돌았는데 나한테 볼일 있어?”

“네.”

“정 선생 미안한데 급한 거 아니면 이따 해도 될까?”

“저도 급한 건인데 혹시 OP(수술) 들어가세요?”

“아니, OBGY 온다고 했거든. 근데 우리 병원에 OBGY가 있었나?”

“있긴 있죠. 여기 선배 눈앞에 있잖아요.”

의진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뭐!? 그게 무슨……아니다. 일단 환자가 우선이니까 브리핑해 봐.”

“ER에 몇 번 왔던 25주 된 임산부고 전날 저녁부터 느껴지던 앱도미널 패인(Abdominal Pain, 복통)이 심해져서 복부 초음파를 했는데 압빼(Appendicitis, 충수염)예요.”

“아, 임산부가 압빼란 말이지. 빠르게 수술하는 게 좋겠다.”

“근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

“네. 개복으로 가실 거죠?”

현재 환자는 임산부로 내부 장기가 밀려 있는 상태다.

문제는 이로 인해 충수염이 위로 올라가 있고 찾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강경으로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개복을 해야 한다.

“25주면 태아가 큰 상태가 복강경은 힘들어. 어차피 개복해야 해.”

“개복이면 전신 마취네요.”

절개 이후 밀려올라 간 충수를 찾다 보면 당연히 척추 마취로는 불가능하다.

임산부를 상대로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선생 마취 때문에 그런 거지?”

“네, 마취약이 태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요.”

의진은 임산부 수술이 워낙 오랜만이라 다른 수술보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기형아라든지 유산이라든지 혹시 모를 부작용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논문상으로 그 가능성은 1% 채 안 되잖아.”

“선배 논문도 찾아 보셨어요?”

“신화대에서 임산부 압빼 환자들 몇 번 있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관련 논문을 찾아봤었고.”

보통 이런 경우에는 담당과 의사에게 협진을 하지 직접 논문까지 찾아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럴 때 보면 태경은 천상 의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 느낀다.

“모든 수술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정 선생도 잘 알고 있잖아.”

“알죠. 근데 임산부 환자가 오랜만이기도 하고 응급수술에 환자 과거력까지 있다 보니 제가 좀 깊게 들어간 거 같아요.”

“과거력? 뭐가 있는데?”

“아스마(asthma, 천식)요. 기관삽관 중 수축도 가능하고 기관지가 민감한 편이에요.”

태경의 미간이 구겨진다. 이러면 생각보다 부담이 되는 수술이다.

“아스마 치료는 뭐로 하고 있는지 알아?”

“그게 반복된 어보션(Abortion,유산)으로 10년 만에 생긴 아이라 임신 이후로 일체 약물이 싫다면서 거부하고 있대요.”

“아…….”

10년 만에 생긴 아이라니. 임산부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고통보다 아이에 대한 생각뿐일 것이다.

“그래도 충수염 그대로 두면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응급수술 해야 돼.”

태경이 고민 끝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산모와 보호자에게 어보션 가능성이 있다고 확실하게 워닝(warning, 경고)해야 할 것 같아.”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네요.”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태경의 말이 정답이었다.

“산모 EMR 지금 볼 수 있지?”

“네. 열어 드릴게요.”

의진이 PC로 EMR(전자의료기록)을 열자 태경이 모니터로 다가갔다.

“WBC 18,000대에 CRP가 7.53에 염증에 압통도 있네. 지금 산모 어디 있어? 보호자 대기실?”

“아니요. 제 진료실로 안내해 드리라고 했어요. 혹시 선배가 얘기하시려고요?”

“직접 말해야지. 내가 집도의인데.”

이제 태경은 산모에게 수술에 관한 모든 설명과 최악의 상황까지 전해야 한다.

산모 입장에서 말도 안 되게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를 하려니 부담이 느껴졌다.

“선배 괜찮겠어요?”

반복된 유산과 10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 그리고 약 거부까지. 분명 산모를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의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득하는 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해야지. 환자 일이니까.”

* * *

“흐흑!”

“선이야 그만 울어.”

“축복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남편은 대기실에서 우는 아내를 위로하고 있었다.

“오빠?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당신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내가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해서.”

“절대로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 배는 좀 어때? 많이 아프지?”

“나는 우리 축복이한테 안 좋을까 봐 그 생각뿐이야.”

아내는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아기 생각뿐이었다.

고아로 자란 두 사람에게 아이의 존재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편의 머릿속 온통 아내 걱정뿐이었다.

“오빠 우리 축복이 괜찮겠지?”

“당연히 괜찮지.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갖고 있어.”

아내의 눈물을 머금은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철컥-

“안녕하세요.”

태경이 의진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왔다. 대번에 진료실에 가득한 3단계 분뇨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저희 병원 외과 담당 선생님이세요.”

뒤따라온 의진이 태경을 소개하자 부부의 시선이 태경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산모와 그녀를 지키는 남편까지. 참 사랑스러운 부부의 모습이었다.

‘염증 때문인가 상당히 진하네.’

산모의 높은 염증 수치 때문인지 냄새의 농도가 상당히 강한 편이였다.

“혹시 환자분 상태에 대해서 들으신 것 있나요?”

“네, 옆에 계신 정의진 선생님께서 충수염이라고 하셨어요.”

“네, 충수염이고 지금 현재 염증 수치도 정상보다 높은 상태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산모분께서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네!? 수술이요?”

태경의 말을 듣자마자 산모의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수술’이란 두 글자에 산모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지, 지금 수술이라고 하신 건가요?”

그녀는 남편이 잡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을 빼내 저도 모르게 부른 배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이 마치 뱃속에 아이를 지키려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 저 꼭 수술해야 하나요?”

“네, 현재 환자분은 수술이 필요합니다.”

“저기 선생님 저…….”

산모는 아랫입술을 미세하게 떨며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수술 말고 항생제로 치료해 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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