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9화 (39/472)

39화. 다리병신 어떻게 된 거야?

똑똑-

“들어와요.”

노크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모나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철컥-

“원장님께서 저 찾으신다고…….”

“최 선생, 어서 와. 쉬고 있었을 텐데 불러서 미안.”

“아닙니다.”

“그런데 지렁이 좋아하나 봐?”

“예?”

태경은 최모나 가운에 걸려 있는 왕 지렁이 젤리를 가리켰다.

“거기 주머니.”

몇 개씩 집어먹다 흘린 젤리가 가운 주머니에 걸린 것이었다.

“지렁이가 알록달록 예쁘네.”

“아, 예. 맞습니다.”

최모나는 대롱대롱 걸린 대왕 지렁이를 주머니에 우겨 넣으며 답했다.

“좀 앉아.”

“괜찮습니다. 이게 편합니다.”

“그래 편하게 있어. 그나저나 최 선생 병원 생활은 어떤가 해서.”

“괜찮습니다.”

“일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고?”

“예, 없습니다.”

“그럼 힘든 점은?”

“그것도 없습니다.”

마치 없는 힘든 점이라도 만들어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일하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예,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아까 수고했다고. 고생은 최 선생이 다 하고 인사는 내가 받은 거 같아서.”

“아……아닙니다.”

“아까 고생했어. 가 봐.”

“예? 하실 말씀이 그거뿐입니까?”

“응. 이것뿐인데.”

최모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지적과 질타 그리고 훈계까지. 3종 트리플로 잔소리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늘 그래 왔으니까.

‘할 말이 다라고?’

그런데 수고했다니. 병원을 돌아다니며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왜?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이만 가 봐.”

“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최모나가 돌아서 문고리를 잡은 그때였다.

“맞다!”

일부러 텀을 두고 기다린 태경이 다시 최모나를 불렀다.

“최 선생?”

“예.”

“내가 뭐 하나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네.”

“말씀하십쇼.”

“제네바 선언 알지?”

“알고 있습니다.”

의사라면 누구나 제네바 선언을 알고 있다. 의대 졸업식이라 부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식 때 제네바 선언을 하기 때문이다.

“혹시 제네바 선언 지금도 외우나?”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긴 그럴 거야. 알았어. 가 봐.”

철컥-

최모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진료실을 나갔다.

“까칠아. 이제 넌 안 외우고는 못 베길 거다.”

* * *

[원장님께서 부탁하신 거북이 두 친구는 제가 모쪼록 잘 끌고 가 보겠습니다.]

아침을 먹은 김철기는 병원 산책로에 앉아 휴대폰으로 태경이 보낸 메일을 읽고 있었다.

[병원에 보안요원이 필요하여 인력 보충을 할 예정입니다.]

“이제 제법 한 병원의 수장 티가 나는 군.”

[김 선생 자네 병원이니 자네가 다 알아서 하게. 이제 더 이상 메일도 보내지 마. 수고하게.]

태경이 병원 소식을 보낼 때마다 김철기는 늘 같은 답장을 남겼다.

더 이상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김철기는 사실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병원이기에 그 소식만 들어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메일을 보내 주는 태경이 참 고마웠다.

“그나저나 보안요원을 구하기 만만치 않을 텐데.”

“여보?”

다시 한번 메일을 읽는 김철기를 와이프가 부르며 다가왔다.

“나 어때요? 꽃분 아주머니가 머리 해 줬어요.”

단정하게 머리를 말아 올린 이옥빈은 민기 인형을 꼭 안고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꼭 영화배우처럼 예쁘네. 잘 어울려.”

“고마워요. 민기야, 아빠가 엄마 예쁘대. 우리 민기도 엄마 예쁘지?”

“당연하지. 민기가 엄마 예쁘다고 웃네.”

같은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김꽃분이 민머리에 모자를 쓰며 두 사람 앞에 앉았다.

“항상 감사합니다. 와이프 잘 챙겨 주셔서.”

“그걸 왜 선생님이 감사해요.”

아무래도 몸이 힘든 사람이 많은 요양병원이다 보니 치매가 걸린 이옥빈과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이옥빈의 유일한 친구가 김꽃분이었다. 연배가 비슷한 김꽃분은 치매인 이옥빈을 동생처럼 챙겼다.

“저야말로 선생님이 의료 정보도 잘 알려 주셔서 감사하죠. 그리고 내가 민기 엄마랑 놀아 주는 게 아니라 민기 엄마가 나랑 놀아 주는 거예요.”

“그런가요? 하하하. 그런데 오늘 어디 가십니까?”

김철기는 입원복인 아닌 외출복에 캐리어까지 챙긴 김꽃분의 모습이 의아했다.

“제가 일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죠? 우리 아들이요.”

“그 막내 아드님 말씀이군요.”

“예. 그놈하고 오늘 결판을 지으려고요.”

“결판이요?”

“네. 어디 가서 말하기도 창피한데 사람들 등골 빼먹고 살고 있더라고요.”

“등골이요?”

“지 누나들이 그러는데 사채 일을 한다네요. 전 그걸 최근에 알았지 뭐예요. 하!”

김꽃분은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저런…….”

“제가 아들놈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경기가 날 것 같다니까요.”

“염려가 크시겠군요.”

“제가 시장 바닥에서 생선 장사하면서 사채 놈들한테 크게 데인 적이 있어요. 그것들 깡패지 사람 아닙니다. 근데 내 자식이 그 짓을 하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아요.”

어디 하소연 할 곳이 없던 김꽃분은 속으로 삭혔던 이야기를 전부 꺼내 보였다.

한 번 시작하면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평생 환자들의 말을 들어온 김철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을 하다 안 풀렸어요. 대학 졸업 후 방황하다가 보안요원으로 취직해서 꽤 다녔거든요.”

보안요원이란 말에 김철기가 귀를 쫑긋했다.

“아드님이 보안요원을 했었나요?”

“예. 나름 잘 다니고 있었어요.”

욱하는 성격이 있긴 했지만 김꽃분의 아들은 보안요원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김꽃분의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며 집 가세가 기울어졌다. 때마침 선배 하나가 많은 보수를 빌미로 아들을 사채업으로 끌어들였다.

“제가 아파 보니까 이게 언제 재발할지도 모르고 죽기 전에 깡패 짓은 그만두게 하고 싶어서요.”

“실은 제가 아는 곳에서 보안요원을 뽑는데 면접을 한 번 보면 어떨까요?”

“……예!? 진심이세요?”

“그럼요.”

김철기는 단순히 김꽃분의 사정이 딱해서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

보안요원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태경의 수고를 조금 덜어 주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김꽃분의 아들이 거친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이 끌렸다.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의료진은 때론 협박을 받기도 하고 때때로 목숨을 위협받기도 한다. 특히 우리병원은 인근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가끔 치료를 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가장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혹시 이따 제가 아드님을 잠깐 봐도 좋을까요?”

“물론이죠.”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소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당연하죠. 저도 경우가 있는 걸요. 선생님께서 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말해 주세요.”

아들 문제 때문에 그늘이 잔뜩 덮인 김꽃분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 * *

신축 건물 공사장.

[나락건설은 밀린 밥값 2700만 원을 지급하라.

연락을 받아라. 약속을 지켜라.

피 같은 돈을 지급하라!!]

외벽 공사가 한창인 건물 앞에 마른 체구의 남자가 한쪽 다리를 절며 제 몸만 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하루빨리 밀린 대금을 지급하라.”

남자는 작업 차량이 오고가는 정문 쪽에서 공사장 안팎의 사람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었다.

“약속을 지켜라! 땡전 한 푼도 받지 못한 피 같은 내 돈을 지급하라.”

빵빵-

온갖 먼지와 매연을 마시며 목소리를 내는 남자 옆으로 커다란 작업 차량이 경적을 울렸다.

빵빵-

공사장 입구로 진입하다 말고 비상등을 켠 운전수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막았나 보네요.”

“저기?”

경적 소리에 본인이 길을 막았다 생각한 남자가 사과부터 하자 운전수가 앞으로 나갔다.

“최 씨?”

“이 기사?”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최 씨가 왜 이러고 있어?”

차에서 내린 운전수는 같은 공사장에서 작업했던 사이였다.

“돈 받은 거 아니었어?”

“못 받았어.”

“못 받다니……그게 무슨 소리야?”

운전수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넉 달 전에 다 지급됐다고 했었거든.”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어.”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은 건설 회사가 인부들의 공사비를 미지급한 일이 있었다. 결국 인부들의 집단 농성으로 밀린 대금이 전부 입금됐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함바집을 운영하던 최 씨만 돈을 못 받은 것이다.

혼자 대기업에도 찾아갔지만 이미 하청업체에 돈을 지급했다는 말만 돌아왔다.

“자세히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사정이 안 좋아. 돈이 꼭 필요하거든.”

“당연히 돈 받아야지. 이 미친놈들 떼어먹을 게 따로 있지 함바집 밥값을 떼어먹어?”

“이쪽에선 줬다고 하고 저쪽에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게 벌써 석 달째야.”

“나락건설 1년 전에도 대금 밀려서 그때도 말이 많았거든.”

“나도 얼마 전에야 그 얘길 들었어.”

“이사가 질이 별로여서 이번에도 인부들이 참여할 때 고민했었어. 어떻게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인부들 단톡방에 올려 줄까?”

“아니야. 괜찮아. 다들 먹고살기 힘들 텐데 괜찮아.”

당장 제 발에 불이 떨어졌지만 최 씨는 도움을 거절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인부들이 하루를 쉬는 게 얼마나 큰 타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기…… 최선해 선생님 되십니까?”

두 사람이 한참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최 씨에게 다가왔다.

“예, 제가 최선해입니다.”

“저희 이사님이 밀린 대금 문제로 뵙길 원하시는데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그거 정말입니까?”

“그럼요.”

“최 씨 오늘 돈 받나 보다. 잘됐네.”

“저랑 같이 가시죠.”

최 씨는 밀린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남자를 따라나섰다.

* * *

“이사님. 최선해 선생님 오셨습니다.”

최 씨는 비서를 따라 1층 안쪽으로 향했다. 아직 건물 내부에는 공사자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고, 최선해 선생님 안녕하십니다. 나락건설 이사 오벌구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해외 출장 다녀온 사이에 뭔가 착오가 있던 모양입니다.”

오벌구는 최 씨를 향해 미안해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거두절미하고 밀린 대금 내일까지 전부 입금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물론이죠. 그러니까 밖에 서서 그만 고생하시고 집에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임에도 불구하고 최 씨는 기쁜 소식에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죄송하죠. 여기다가 계좌번호 적으세요.”

최 씨는 이사가 건네 메모지와 볼펜을 건네받아 계좌를 적었다.

“여기 있습니다.”

“걱정 말고 집에 돌아가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 * *

-잘 해결됐어. 이제 걱정하지 마.

“이런 내 정신 좀 봐라.”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내던 최 씨는 손에 들린 볼펜을 보며 다시 이사 일행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동안 시위한 보람이 있네.’

한쪽 다리로 절뚝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걷던 최 씨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격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야! 저 다리병신 어떻게 된 거야?”

불과 5분 전까지 상냥한 말투로 약속하던 이사는 비서에게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돈 다 지급됐다며?”

“그때 이사님께서 새 차 유흥비가 부족하시다고 대금에서 빼신 게 함바집 대금이었습니다.”

“하! 젠장. 일이 뭐 이렇게 개같이 꼬여. 낼 당장 아버지 시찰 오실 텐데…….”

“어떡할까요? 이사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장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아버지 모르게 해야지.”

“그럼 최선해 씨는 어떡합니까?”

“일단 내일 전화해서 조금 연기됐다고…….”

“이사님, 안 됩니다.”

결국 밖에서 듣고 있던 최 씨가 다리를 절며 이사에게 달려들었다.

“내일 꼭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이사님 저 그 돈 꼭 필요합니다.”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잘 못 들으셨나 봅니다.”

“이, 이사님. 저 이 돈 없으면 죽습니다. 제발…….”

“아이 쌍!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최 씨가 상처투성이에 거친 손으로 양복을 잡자 이사가 그의 어깨를 세차게 밀려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욱!”

키가 작은 최 씨는 그 힘에 밀려 자재 더미 위로 고꾸라졌다.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알고. 비싼 옷에 먼지 묻었네. 시x! 당신…….”

양복 재킷에 먼지를 털며 고개를 들던 이사가 최 씨를 마주한 순간,

“……!”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왔다.

“어! 야! 이 비서, 이 사람 왜 이렇게 된 거야?”

“최선해 씨? 괜찮습니까?”

하필이면 최 씨가 넘어진 곳이 자재 더미였고, 철근 자재 하나가 최 씨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한 것이다.

“119!”

“여기 빨리 119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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