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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42화 (42/472)

42화. 의사는 체력!

“피팅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힘드셨죠?”

“조금요. 이게 보통일이 아니에요.”

“가끔 드레스 투어 하시고 몸살 나는 신부님들도 계세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는 가장 중요한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 테니까 어머니랑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다음 예약 팀도 있을 텐데 괜찮아요.”

“다음 분이 예약일자 변경해서 최미리 님이 마지막 분이세요. 앨범 보시면서 편하게 말씀 나누다 가세요.”

“감사합니다.”

철컥-

“엄마? 힘들지 않아? 이것도 체력 소모 엄청나네.”

“힘들긴. 그나저나 우리 딸 너무 예쁘다.”

“당연하지, 누구 딸인데.”

애교 많은 딸은 엄마 옆에 앉아 드레스 앨범을 펼쳤다.

“근데 유 서방이랑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랑은 본식 셀렉할 때 올 거야. 엄마는 어디가 마음에 들어?”

“엄마는 여기가 더 예쁜 거 같아.”

“나도. 카페 후기 보니까 여기 직원들도 다 친절하고 드레스도 제일 예쁘다고 했거든.”

“엄마는 방금 제일 마지막에 입었던 거. 반짝이 붙어 있고 허리 밑으로 확 퍼지는 게 진짜 공주 같더라.”

“나도 그 벨라인이 제일 예쁘더라.”

“그럼 그걸로 하면 되겠네.”

“아니야. 엄마. 나 다른 걸로 할래.”

“왜, 금액이 비싸?”

머뭇거리는 딸에게 엄마는 이유를 물었다.

“그게 수입 브랜드고 아래 크리스탈이 수작업이라 좀 비싸나 봐. 그래서 나 두 번째 거 하려고.”

“미리야? 그냥 그거로 해.”

“아니야, 엄마. 드레스 다 예뻐서 난 상관없어. 그리고 그 돈 아껴서 혼수 하나 더 하는 게 훨씬 이득이야.”

딸의 말에 엄마는 마음이 울컥했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 단 한 번도 갖고 싶다는 말도 사고 싶다는 말도 한 적이 없는 딸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꽃같이 예쁜 20대에 악착같이 돈을 아껴 결혼 자금까지 모은 딸이었다.

‘착한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런 딸이 건실하고 반듯한 청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이번만큼은 딸이 원하는 결혼식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엄마 울어?”

“아니. 미리야 실은 아빠 오시면 말하려고 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그동안 함바집 해서 돈을 좀 마련했어.”

“뭐! 됐어. 오빠랑 예산 맞춰서 하면 충분해.”

타지에서 생활하는 딸은 부모님이 함바집 일을 접은 줄 알았다.

“괜히 나 때문에 아빠 엄마 고생 했네…….”

다리가 불편한 아빠와 몸이 약한 엄마가 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속된 만류에 다른 편한 일을 구했다는 말에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 힘든 일을 왜 다시 했어.”

“예전에 함께 일한 삼촌들이 많아서 힘들지 않았어.”

“엄마 나 그 돈 못 받아.”

“너 그런 말하면 아빠 엄마 정말 서운해. 큰돈 아니야.”

엄마는 처음으로 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도 한 번은 너한테 떳떳하게 해 줘.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딸은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부족하다 느끼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이 창피하지도 않았다.

돈은 부족했지만 정직하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법을 알려 주셨고 항상 화목했기에 도리어 감사했다.

“엄마…….”

“울지 마. 너 여기서 울면 엄마도 눈물 날 거 같아.”

“알았어. 아까 아빠한테 카톡 왔었는데 사진 보내 드릴까?”

“그래. 아빠 보시면 좋아하시겠다.”

“근데 아빠 오늘 어디 가신 거야?”

“어! 같이 일했던 분이 좀 도와 달라고 하셔서…… 며칠 있다 오실 거야.”

아내는 그동안 밀린 대금을 위해 남편이 1인 시위를 했다는 걸 차마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여보, 돈 문제 해결됐어. 그리고 나 며칠만 수철 형님 일 도와줄게. 미리한테는 말하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있어.

그리고 남편도 차마 아내와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돈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자신이 사고로 배가 뚫렸다는 사실을.

* * *

“오전에 입원한 업도맨 페네트레이팅 인져리(abdomen penetrating injury, 복부관통상) 환자 내일 수술하실 거죠?”

“상황 좀 지켜보고 괜찮으면 해야지.”

의진과 태경은 환자가 여유로운 시간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그 외상에 환자가 위급한 상태는 아니라니까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한데 환자가 좀 그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업도맨 페네트레이팅 인져리가 보통 일은 아니잖아.”

“그렇죠. 말 그래도 복부 관통상이잖아요.”

“내 말이. 그런데 뭐랄까…… 환자가 좀 드라이하게 반응하더라고.”

“오히려 너무 놀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환자가 생각보다 침착해서 신경 쓰였던 태경은 의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자신에게 닥친 사고로 얼이 빠진 듯 드라이한 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이 더러 있었다.

하긴 쇠꼬챙이가 복부를 관통했는데 어떻게 정신이 온전하겠는가 싶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선배가 환자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다 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정 선생 나에 대해 잘 아네?”

“선배 예전에도 환자 오지랖 많았잖아요. 신화대에서도 알아줬다면서요.”

“아니라고 말 못 하겠네.”

태경은 가족이 없다는 최선해 환자에게 좀 더 오지랖이 발동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저기 선배?”

“어. 왜?”

“저 술은 언제…….”

의진이 술 약속을 잡으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잠깐만!”

태경이 미간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진!”

“네?”

“너 어디 아파?”

“갑자기요?”

의진은 대화가 별안간 삼천포로 빠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안 아파요. 건강합니다.”

“그래? 근데 이게 뭐야?”

자신의 건강을 주장하는 의진의 말에 태경은 그녀의 식판을 가리켰다.

“그럼 다이어트 해?”

“아닌데요.”

“에이. 그럼 이건 아니지.”

정확히 밥을 딱 두 숟가락만 퍼 온 의진의 식판 상태를 보며 태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인마. 너 의사는 체력으로 일하는 거 몰라? 밥심이라고. 밥심!”

의사는 체력 소모가 많은 직업이다. 특히 한 번 수술실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꽤 된다.

게다가 응급 환자가 오면 밥 때를 놓치고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태경은 일하면서 먹는 밥에 대해 꽤나 민감한 편이었다.

“이거 먹고 어떻게 일하려고? 나 아직 밥 한 숟가락도 안 먹었다. 깨끗해.”

“선배, 저 괜찮아요.”

“괜찮긴. 우리병원에서 소중한 마취 선생님인데 너 아프면 안 되지.”

의진은 태경의 호들갑을 떨며 밥을 자신에게 덜어 주는 걸 보며 살짝 웃음이 났다.

‘참, 사람이 한결같다니까.’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호스피스 봉사 활동을 갔을 때 환자의 임종을 연달아 마주한 팀원들은 쉽사리 밥을 먹지 못했다.

다들 그 먹먹함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분위기는 숙연했다.

그때 태경이 우리가 밥을 열심히 먹어야 환자분들을 케어할 수 있지 않느냐며 분위기를 바꾼 일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신 말인데.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라도 먹으라고 하셨어.”

의진은 태경이 자신에게 별 뜻 없이 한 행동인 걸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선배는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우리 어머니 닮아서 그래.”

“오지랖도 넓고요.”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 닮았고. 근데 다이어트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면 밥은 왜 그만큼만 받은 거야?”

“그냥…… 밥 생각이 없었어요.”

의진은 적당히 둘러댔다.

출근 전에 별나라 깐따삐아에서 떡튀순에 김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왔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밥을 먹자고 진료실로 찾아온 태경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선배, 저 할 말 있어요.”

그 뒤 밥을 먹으며 환자 이야기를 하던 의진이 아까부터 참아 왔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뭔데?”

“술 언제 사 주실 거예요?”

“맞다. 술 사 주기로 했지. 정 선생 편한 날 가지 뭐.”

“저 편한 날이 아니라 선배가 시간이 안 되잖아요. 집에는 들어가세요?”

“가긴 가지.”

어쩌다 보니 퇴근하고 집에 가는 날보다 병원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언제 응급 환자가 올지도 모르고 한 병원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니 병원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가끔 옷 갈아입으러 가는 거 말고요.”

“와! 정의진 천잰데. 어떻게 알았지?”

“됐고요. 가서 자고 쉬고 퇴근하러 가시라고요.”

“옳소!”

때마침 식판을 들고 임정숙이 동의하며 자리에 앉았다. 연달아 이찬희와 최모나도 같은 테이블에 자리했다.

“환자 돌보는 것도 좋지만 선생님도 쉬면서 하세요.”

“맞습니다. 선생님께서 일을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직원들이 편히 쉴 수가 없다고요.”

소불고기를 맛있게 한 입 떠먹은 이찬희가 두 사람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아니, 상사가 너무 열심히 일하면 직원들이 부담스러워서 쉬겠냐고요.”

“열심히 일하시는 김 선생님 때문에 우리 찬희 쌤 부담스러우셨나 보다.”

“솔직히 집에 갈 때마다 눈치가 좀 보이긴 하죠.”

“이찬희 선생?”

이때다 싶어 속사포로 떠들어 대는 이찬희를 태경이 나지막이 불렀다.

“……네?”

“그렇게 잘 떠드는 거 보니까 아직 여유로운 거 같은데, 어떻게 집에 가서 잠잘 시간도 없이 해 줄까?”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 이찬희는 태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젠장! 이게 아닌데…….’

여기서 더 떠들다간 숙제를 폭탄으로 안긴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니면 조용히 입 닫고 밥 먹을래?”

“당연히 후자죠. 다만 밥 먹을 때는 입을 닫을 수 없으니 조용히 열겠습니다.”

“뭐라고!”

“하여간 내가 우리 이 쌤 때문에 웃어요.”

“저도요.”

넉살 좋은 이찬희 한 마디에 최모나를 빼고 다들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전, 먼저 일어납니다.”

“저도요. 다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식사를 마친 태경이 의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멈칫했다.

“최 선생?”

“저요?”

말없이 밥에 열중하던 최모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밥 먹다 말고 미안한데 물어 볼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쇼.”

“제네바 선언 아직도 기억 안 나?”

“그 질문 아까도…….”

“아! 그랬나? 내가 깜빡했네.”

절대 깜빡한 게 아니었다. 태경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기억 안 난다고 했던가?”

“예, 어제도 오늘도 기억 안 난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그래, 알았어. 밥 맛있게 먹어.”

“야, 최 쌤? 아까도 물어보시더니 너한테 왜 자꾸 제네바 선언 물어보시는 거야.”

태경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밥에 열중한 최모나에게 이찬희가 물었다.

“나도 몰라.”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최모나 대신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임정숙 간호사가 미소를 지었다.

* * *

“아까 출근할 때도 최 선생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요?”

한 손에 원두커피를 들고 태경과 나란히 식당을 나온 의진이 물었다.

“어제도 묻고 출근 때도 묻고 지금도 물어봤지. 또 물어볼 예정이고.”

“방금 보니까 최 선생 표정이 좀 황당해 보이던데.”

“황당하겠지.”

“그 정도면 일부러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맞아. 일부러 물어본 거야.”

“네? 그러는 선배는 기억해요?”

“나! 당연히 기억하지.”

“에이, 말도 안 돼.”

의진이 손사래를 치던 그때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제네바 선언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아오.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

의진은 잠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망각했다.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는 태경이라면 충분히 외우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래, 선배라면 뭐 외우지.’

아마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 외우고 다닐 것이다.

“근데 갑자기 웬 제네바 선언 타령이에요?”

“한 번 고쳐 볼까 해서.”

“뭐를요?”

“거북이 2호를.”

“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선배 거북이 길러요?”

“나중에 알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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