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3화 (43/472)

43화. 배, 배…….

-최선해 선생님 몸은 좀 어떠신지요? 이사님께서 직접 찾아뵙고 죄송한 마음을 드리려 했으니 미리 정해진 급한 일정이 있어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병원비 관련해서는 회사 측에서 적극 부담하겠습니다.

“하!”

최선해는 사고 현장에 있던 비서에게서 온 문자를 읽으며 답답해했다.

-비서님, 제가 아까도 문자 드리지 않았습니까? 병원비는 필요 없습니다. 밀린 제 대금이나 해결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자꾸 딴말하지 말고 오벌구 이사님 연락처를 알려 주세요.

몇 시간 만에 온 답장은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말에 연속이었다.

-여보, 미리랑 밥 먹고 드레스 보러 가요. 사진 남길게. 힘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와 딸에게 언제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지 최선해는 막막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쇠꼬챙이가 배를 관통했을 때도 돈을 못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픈 줄도 몰랐다. 최선해는 몸이 성치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뿐인 딸 걱정뿐이었다.

“여보세요?”

그렇게 문자와 전화 오가며 30분 째 전화를 걸던 중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최 선생님. 오벌구 이사님 비서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서님 제가 사과 받자고 전화 드린 거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수술은 하셨는지…….

“지금 제 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비서님,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저 그 돈 딸자식 결혼 자금입니다. 제발 이사님과 통화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제가 이사님께 말씀드리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선해는 이사와 통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개념을 상실한 이사는 끝까지 뻔뻔했다.

-최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사님이 회의에 참석하셔서 통화가 어렵습니다. 일단 몸부터 생각하세요.

몇 시간 후, 비서의 문자를 받은 최선해가 절망에 빠진 사이,

깨톡- 깨톡-

-아빠, 딸래미 어때?

결혼을 앞둔 딸에게 받은 톡을 본 그는 숨을 죽이며 오열했다.

-잘 어울려요?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흑!”

늘 운동화에 머리를 질끈 묶었던 딸은 새하얀 드레스에 햇살보다 더 눈부신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딸 천사 같네.’

아빠로서 자식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최선해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리야 아빠가 미안하다.’

최선해는 모든 걸 체념한 표정으로 딸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선반에 놓인 술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못난 아빠라 미안해.’

그리고 그의 베드에는 ‘금식’이라는 작은 팻말이 걸려 있었다.

* *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후 9시, 태경은 회진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EMA창을 열고서 한 명 한 명 입원해 있는 환자들의 정보들을 업데이트했다.

‘최기창 환자는 내일 오전에 퇴원하고 최선해 환자도 괜찮네.’

보통 사람들은 이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것이 야근이며 힘들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GS로 지내 온 태경에게는 이미 일과 퇴근의 경계가 사라진지 오래다. 심지어 태경은 그런 것에 무감각해져서 본인이 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병동에 있는 것도 병원 간이침대에서 자는 것도 응급수술로 밤을 지세는 것도 모두 당연했다.

“집보다 병원에 있는 게 편하니 나도 정상은 아니야.”

그 뒤 태경은 병동에서 내려와 응급실로 향했다.

두 시간 넘게 환자들을 보고 진료실로 나가려는데 우연히 눈이 마주친 최모나가 대뜸 힘주어 말했다.

“모릅니다.”

“최 선생,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예. 선생님께 드린 말입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한테 제네바 선언 기억하냐고 또 물어보시려고 했던 것 아니십니까?”

태경은 순간 웃음이 나는 걸 참았다. 사실 지금은 딱히 물어볼 생각이 없었는데 이틀 동안 숱하게 물어서인지 최모나 스스로 제 발이 저린 것이다.

“아닌데? 물어볼 생각 없어.”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나 진료실에 있을 테니까 응급 환자 오면 콜하고.”

“예, 알겠습니다.”

민망해하는 최모나를 뒤로하고 응급실을 나오는데 최 팀장이 접수처에서 고군분투하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예요?”

자세히 보니 308호에 게실염으로 나란히 입원한 노부부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입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또 티격태격하시나 봐요.”

기운이 없는 할머니는 집에서도 모자라 할아버지가 병원에서까지 졸졸 쫓아다니니 답답해했다.

“혼자서 바람 좀 쐬겠다는데 왜 자꾸 들러붙어요.”

“그거야 할멈이랑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지.”

“개새끼도 아니고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요. 잠깐이라도 날 좀 내버려 두라고요.”

“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내일은 트롯왕 재방송하네요.”

입원한 환자들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최 팀장이 대기실 티비로 할아버지의 관심을 끌었다.

“벌서 재방송할 시간이 됐구만. 할멈 같…….”

“아니요. 할아버지 여기서 저랑 같이 보시고 할머니 혼자 쉬게 해 드리세요. 네?”

“알겠어. 할멈? 나 이것만 보고 올라갈게.”

“올라오든지 말든지.”

최 팀장의 중재로 노부부의 부부 싸움이 종결되고 태경은 관절이 약한 할머니와 함께 중앙 계단을 올랐다.

“할머니 다리 안 아프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선생님 안 바쁘세요? 저 혼자 올라가도 되는데.”

“그래도 제 팔 붙잡고 올라가시면 더 수월하시잖아요.”

“감사해서 그러죠. 그나저나 제가 영감한테 왜 그러나 싶죠?”

사실 태경도 궁금했기에 아니라고 답하진 않았다.

“우리 영감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보, 복수요?”

“네. 저 양반이랑 일찍 결혼했는데 워낙 가부장적이라 내가 30년 가까이 물을 떠다 받쳤어요.”

소심한 성격이었던 할머니는 워낙 강한 할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힘드셨겠어요.”

“힘들었죠. 그래서 내가 3년 전에 이혼하자고 으름장을 넣었더니 그때부터 잘못했다고 하면서 내 꽁무니만 쫓아다니네요.”

“이혼하시게요?”

“아니요. 우리 영감이 지금은 바람 빠진 풍선 같지만 젊어서 한 인물 했어요. 지금 놀려먹는 중이예요. 귀엽잖아요.”

태경은 긴 세월을 할아버지에게 헌신한 할머니의 소심한 복수가 귀여웠다.

“그나저나 우리 잘생긴 선생님은 결혼 안 하세요?”

“제가 잘생겼나요?”

“그럼요. 선생님이 이목구비가 얼마나 멋진데요.”

“좋게 봐주ㅅ…….”

그렇게 2층 계단을 지나 3층 계단을 막 오르려던 그때였다.

“……!”

태경이 말을 하다 말고 걸음을 멈칫했다.

‘뭐지?’

등줄기를 타고 오는 쎄한 기분과 함께 다섯 번째 바이탈이 감지된 것이다.

“선생님?”

할머니가 불렀지만 냄새에 초집중한 태경에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냄새가 섞여 있다.’

극심한 분뇨 냄새와 함께 마지막에는 포르말린 향이 느껴졌다. 마치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가는 듯한 패턴이었다.

‘2층에 있는 환자들이…… 설마!’

찰나의 순간 2층 병동에 입원한 환자를 하나씩 떠올리던 태경의 눈썹이 심히 들썩거렸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여기 할머니 좀 병실로 모셔다 드리세요.”

“네, 선생님.”

태경이 2층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를 향해 소리치고 병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도 아니야. 여기도…….’

짐작 가는 곳은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빠르게 병실마다 고개를 들이밀었다.

밝은 복도와 달리 이미 소등을 시작한 병실들은 전부 다 불이 꺼진 상태였다.

그렇게 병실을 확인하며 유력한 병실로 걸음을 옮기던 찰나,

철푸덕-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여기다.’

209호에 들어서자 고여 있던 연기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뿜어져 나오듯 확 느껴졌다.

촥-

태경은 커튼을 열며 환자들을 확인하다 최선해의 베드가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베드에 있었는지 베드에서도 냄새가 진동했다.

“……!”

그러다 문득 들어올 때는 확 번지던 냄새를 기억하며 병실 문 옆에 있는 화장실 앞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최선해 씨?”

손잡이를 내리자 안에서 잠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환자분!?”

쾅- 쾅-

“최선해 환자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들었던 환자들이 깨고 태경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안에 계세요?”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쓰러진 거야?”

“모르겠어요. 어두워서 잘 안 보여.”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선생님 오셨는데 우린 가만히 있는 게 도와드리는 거예요.”

앞 베드에서 잠들었던 환자와 보호자가 놀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최선해 씨……젠장!”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여기 화장실 열쇠 좀 갖다 줘요. 빨리!”

“알겠습니다.”

태경은 소리를 듣고 온 간호사에게 열쇠를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을 열기 위해 어깨에 힘을 주고 화장실 문 바로 앞에 한쪽 발을 옮겼다. 그런데,

찰팍-

순간 신발 바닥에 익숙하지만 낯선 액체가 닿는 느낌이 선명하게 났다.

“이건…….”

밀착된 바닥면과 깔끔하게 떨어지는 물이 아닌 그보다 농도가 진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피다.”

어둡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아는 액체 바로 피였다.

찰팍- 찰팍-

점점 더 오싹해지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없던 태경이 황급하게 병실 불을 켰다.

탁-

역시나 예상대로 붉은 피가 화장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열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임정숙 간호사 병실로 뛰어 들어오다 바닥에 흐르는 피를 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열쇠 가져왔어요.”

하지만 응급 상황에 이골이 난 프로답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열쇠를 건넸다. 바닥에 난 피를 보고 놀라서 허둥지둥할 순 있지만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 주세요.”

“근데 열쇠를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쓸었던데 안 열리면 어떡하죠.”

“그땐 문을 부숴야죠.”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들은 의료진으로서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덜컥-

다행이 열쇠로 문은 열었지만 안에서 무언가 걸려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태경이 체중에 힘을 실어 문을 밀자 막혔던 화장실 문이 드디어 활짝 열렸다.

철컥-

“최선해 씨?”

문을 열자 퍼지는 냄새와 함께 쇠꼬챙이로 복부의 관통상을 당한 최선해가 엎어져 쓰려져 있었다.

“환자분?”

최선해를 살펴보려 그에게 바짝 다가간 태경이 묘한 알코올 냄새를 느낀 그때였다.

“꺄악!”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임정숙 간호사 뒤에 있던 병동 간호사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피를 봐도 놀라지 않던 간호사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 수 쌤? 저, 저기 구석에요. 저거…….”

병동 간호사는 떨리는 손끝으로 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 배……아으. 전 못 보겠어요.”

놀랍게도 떨리는 손끝이 가리킨 변기 뒤쪽에는 깨진 술병 조각 사이로 죽은 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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