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삶이 주는 가치
“됐어. 장난하는 거면 관둬.”
최모나가 장난이라고 생각한 그때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 들려왔다.
“마장동 포대 자루.”
“마장동 포대 자루?”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수련의 시절부터 집에 20kg짜리 포대 자루를 100개 씩 사 뒀었대. 그리고 하나는 꼭 병원 사물함에 두고 다니고.”
마장동은 뭐고 포대 자루는 또 왜 들고 다닌 건지. 이찬희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걸 왜?”
“병원 생활 하다가 시간이 나면 그걸 들고 마장동 축산시장으로 달려갔대.”
“축산시장? 거길 왜?”
“왜겠어. 거기 가서 포대 자루에 돼지 간, 껍데기, 족발 등 모든 부위를 돌아가면 20kg씩 사 왔다는 거야.”
“잠깐! 설마 그걸로 수처 연습을 했다는 거야?”
이찬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말이 돼? 의사가 그렇게 한가한 직종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까지 해.”
시니컬하고 무감각한 최모나조차 격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하긴 반응은 당연했다.
“그렇지. 그럴 수 있어.”
이찬희도 신화대에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땐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태경을 집까지 태워 줬던 마취과 선생님이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소문이 사실이 됐었다.
“정말……이야?”
“너도 봤잖아. 김 선생님 수술.”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까 그 수술 실력이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최모나는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타고난 센스와 좋은 머리도 한몫하겠지만 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생기는 일이 이런 건가 싶다.”
“할 말이 없네.”
“난 처음에 미친놈인가 했다니까. 그렇게 몇 년 동안 내리 했다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야. 이게 바로 내가 우리 김태경 선생님을 존경하고 동경하게 된 이유지.”
이제야 최모나는 태경이 온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이찬희가 주인 찾은 강아지처럼 좋아했는지 이해가 됐다.
“최 쌤 너도 옆에서 잘 보고 배워. 솔직히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잖아.”
이찬희의 말에 최모나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
“내 말 맞지?”
“뭐…….”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모나는 병원을 자주 옮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병원도 아니고 고용주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겠나? 옮기는 수밖에.
‘무슨 소리야. 맨날 뚱한 표정에 말투는 또 얼마나 딱딱한지. 불만 사항도 제일 많이 접수되잖아.’
일전에 화장실에서 들었던 말도 그렇고 늘어 가는 불만 카드를 보며 조만간 이 병원에서도 퇴사를 해야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우리도 열심히 해서 멋진 의사가 되자고.”
“너나 열심히 해라.”
이때까지만 해도 최모나는 스스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Rrrrrrrr
그렇게 최모나의 감정이 요동치는 사이 의국실 전화가 울려왔다.
“네, 이찬…… 지금요? 아니요.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찬희는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급 환자야?”
“그건 아니고. 최 쌤 응급 환자 오면 콜해 줘.”
“어디 가는데?”
“나도 업도맨 페네트레이팅 인져리(abdomen penetrating injury, 복부관통상) 환자 수술하러 간다.”
“뭐! 최선해 환자 다시 수술해? 응급이야?”
“아니. 굳이 말하자면 인비저블맨이라고 할까.”
“뭔 소리하는 거야.”
궁금한 표정을 뒤로 한 채 이찬희는 훈련을 받으러 의국실을 나갔다.
* * *
“환자분 이제 고개 드셔도 돼요.”
병동 간호사가 척추 마취 후 몇 시간 동안 누워 있던 최선해에게 다가왔다.
“많이 힘드셨죠?”
“아닙니다.”
새벽 시간에 수술이 끝났기에 병실로 돌아온 최선해는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잠이 들었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예, 없습니다.”
“불편하신 곳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간호사 선생님. 저 움직여도 되나요?”
“그럼요. 고개 천천히 들고 일어나세요.”
“예.”
몇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최선해는 화장실을 다녀 온 뒤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 * *
철컥-
“선배! 저 좀 들어갈게요.”
의진이 퇴근 복장으로 태경의 진료실 문을 격하게 열고 들어왔다.
“우리 정 선생 퇴근하나 봐.”
“하!”
태연한 답변에 의진이 헛웃음을 날렸다. 여전히 수술복 차림의 가운을 입고 있는 태경의 모습을 보니 오늘도 퇴근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진짜 왜 저래! 무슨 병원 지박령이야 뭐야.’
환자를 위하는 마음도 좋고 병원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다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저러니까 신화대에서 노예 소리를 들었지.’
의사도 사람이다. 환자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건강도 챙기면서 일을 하는 게 맞는 것이다. 미련 곰탱이처럼 일만하는 태경이 의진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선배 병원에서 살림 차리실 생각이세요?”
답답한 마음에 콧바람을 내뿜은 의진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진짜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정 선생 뭐 좀 마실래? 더욱 더 진해진 리얼 초코 퐁당 줄까?”
“……!”
“장난이고 과즙 팡팡 수박 주스 먹을래?”
“…….”
“이것도 아닌가. 그럼 눈에 좋은 결명자 마셔. 구수하고 좋아.”
도무지 웃음 포인트를 찾을 수 없는 말장난을 듣고 있던 의진이 돌직구를 날렸다.
“선배, 혹시 사채 써요?”
“컥! 커헉!”
“선배?”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태경은 먹고 있던 결명자에 사례가 들렸다.
“컥!”
“괜찮아요? 저도 장난 한 번 쳐 봤어요.”
덩달아 깜짝 놀란 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태경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야.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았고 장난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 사채 빚에 허덕이던 태경은 괜스레 뜨끔했다. 순간 이래서 여자의 촉은 무서운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사채 소리는 왜 한 거야?”
“아니, 선배가 매일 죽어라 일만 하니까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예요.”
“그나저나 정 선생 퇴근하다 말고 내 방에 왜 온 거야?”
“아, 그게 저 선배한테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
“네. 꼭 들어주세요.”
커다란 눈 속에 담긴 갈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태경을 향했다.
“들어주실 거죠? 아니, 꼭 들어주신다고 하세요.”
“그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어줘야지. 뭔데?”
“밥 사 주세요. 밥!”
“밥? 그게 뭔 부탁이야. 어차피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주기로 했잖아.”
“아니요. 지금 당장. 라잇 나우.”
“지금?”
“네. 어차피 퇴근 시간도 지났잖아요.”
병원 식구들한테는 퇴근 시간이었지만 남들은 출근할 시간이었다. 아직 식당도 문을 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문 연 식당이 있나?”
“당연하죠. 요즘 24시간 하는 식당도 많아요. 그리고 제가 가려는 식당은 오전에 문을 닫아서 꼭 지금 가야 해요.”
거짓말이었다. 의진은 그저 태경이 퇴근을 해서 집에 가서 좀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적당히 둘러댄 것이다.
“그 집이 얼마나 맛집인데요.”
그런 의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모쏠 태경은 사실 오늘도 퇴근할 마음이 없었다.
“맛집이라…….”
“선배, 근데 설마 오늘도 퇴근 안하시려고 했던 건 아니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됐고요. 가서 한두 시간이라도 좀 편하게 눈 좀 붙이고 출근하시라고요.”
“여기서 자는 것도 편한데…….”
“얼른 일어나세요. 부탁 들어주신다면서요.”
“그래, 알았다. 가자. 가.”
결국 등쌀에 못 이긴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긴 힘들다.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의진은 누가 봐도 매력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붙임성도 좋고 성격까지 털털하니 좋았다. 저런 후배가 부탁을 해 오니 쉽사리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럼 저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준비하고 나오세요.”
“오케이.”
* * *
똑똑-
의진이 나간 지 2분도 채 안 되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똑똑-
기다리라는 말에도 계속되는 노크 소리에 태경이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 인물이 서 있었다.
“화장실 간…….”
최선해가 수액걸이를 끌고 진료실을 노크하고 있던 것이다.
“선생님.”
“최선해 환자분? 어디 아프세요?”
몇 시간 전 수술한 환자가 직접 찾아온 탓에 태경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본능적으로 묻고 난 뒤에야 마주한 최선해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저한테요?”
“네.”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최선해를 향해 당연한 듯 진료실 문을 열어 주는 태경의 뒤로 화장실을 다녀온 의진이 보였다.
“환자분 잠깐 들어가 계세요.”
“예, 선생님.”
태경은 최선해를 진료실로 들여보낸 뒤 의진에게 다가갔다.
“정 선생, 이거 어떡하지?”
“괜찮아요. 그보다 최선해 환자 안 좋은 건 아니죠?”
“그건 아니야. 미안하다. 의진아.”
“환자 일인데 어쩌겠어요. 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조심히 들어가고 이따 보자.”
“네, 선배도 눈 좀 붙이세요.”
의진은 이 상황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자신도 의사이기에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뭐 어쩌겠어. 저런 모습 또한 매력이지 뭐.”
“누가 그렇게 매력이 있어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쿨하게 복도를 걸어가는 의진 앞에 임정숙 간호사가 불쑥 나타났다.
“아! 깜짝아!”
“우리 정 쌤 진짜 놀랐나 보네.”
“그냥 혼잣말로 떠든 거예요. 임 쌤 오늘 당직이세요?”
“네, 김 선생님 오늘도 퇴근 안 하신대요?”
“오늘은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집에 좀 가시지. 아무래도 언제 한 번 날 잡고 제대로 말씀 드려야겠어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임 쌤이 강하게 말 좀 해 주세요.”
“저렇게 일만 하면 여자들이 안 좋아하는데…….”
“내 말이요. 누가 데리고 살지.”
“우리 정 쌤이 데리고 살면 되겠네요.”
“예?!”
뜬금없는 연결고리에 의진의 동공이 급격하게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서,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전 김! 태! 경! 선생님한테 전혀,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요.”
“두 분이 친하시니까 웃자고 한 소리예요.”
“그리고 저렇게 일만 하는 남자 전 매력 없어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강하게 부정하며 병원을 나서는 의진을 보며 임정숙 간호사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 * *
“저한테 하실 말이 뭔지…….”
“선생님께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요.”
최선해는 꽤 미안한 표정으로 태경을 쳐다봤다.
“사과요?”
“네, 선생님. 사람을 살리는 병원에 입원해서 목숨을 버릴 생각을 했다는 게 죄송해서요. 죄송합니다.”
순간적인 생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던 자신의 행동이 의료진들 앞에 참 부끄러웠다.
“환자분. 저는 괜찮으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다만 사과는 환자분 자신에게 하셨으면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다. 특히 의사로 살아가는 태경은 누구보다 저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더군다나 죽었다 살아나 봤기 때문에 목숨과 삶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지금 현재 이 시간도 누군가는 그토록 살고 싶어 했고 간절히 염원했던 소중한 삶일 것이다. 그렇기에 최선해가 자신의 목숨이 귀한 거라는 걸 알았으면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
최선해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리며 들썩거렸다. 그는 연신 태경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