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선생님 엿 드세요
“선생님, 제가 처음에 가족이 없다고 했지만 실은 저도 가족이 있습니다. 자식은 딸이 하나 있고요.”
눈물을 보였던 최선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소아마비입니다.”
최선해는 링거 바늘이 꽂힌 손으로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가리켰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딸과 아내입니다. 그런 제 딸아이가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손을 모으며 태경에게 부탁을 전했다.
“선생님. 너무 염치없는 줄 알지만 제가 지금 병원비를 납부할 돈이 없습니다. 신용카드가 있으면 좋겠지만 전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신의 상황이 스스로 너무 어이가 없고 민망한 듯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병원비를 쪼개서 납부하면 안 될까요?”
묻지도 않는 자신의 사정을 말한 건 전부 병원비 때문이었다.
물론 이사가 병원비를 전액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지만 최선해는 그때마다 강하게 거절했다. 병원비를 받고 나면 이사는 연락을 끊고 밀린 대금을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가 반드시 기한이 걸리더라고 꼭 갚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저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돈이 없는 자의 괴로움과 빚이란 무게가 주는 그 막막함을 태경은 모를 리 만무했다.
그제야 최선해가 처음 응급실을 왔을 때 공허했던 그 표정과 무기력함이 이해됐다.
“믿기 힘드시면 제가 차용증이라도…….”
“아니요. 차용증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
수술실에서부터 계속하던 고민이 무색하리만치 들려온 답변에 최선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입원해 있는 동안은 환자분 몸만 신경 쓰세요. 스트레스 받으면 회복도 늦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선생님.”
최선해는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아 인사를 하며 나갔다. 절뚝이는 왼쪽 발이 마치 지금 그의 삶의 무게인 것만 같아 태경은 마음이 안 좋았다.
* * *
“저, 실례지만 여기 환자분 어디 가셨나요?”
“글쎄요…… 아! 저기 들어오시네요.”
“감사합니다.”
최선해가 다친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동료 이 기사가 방문했다.
“아니,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바쁜 사람이 뭐하려고 또 왔어?”
태경은 만나고 들어온 최선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여기 올 시간은 돼. 몸은 좀 어때?”
“어제 피를 좀 흘려서 새벽에 수술실 들어갔었어.”
“애썼네. 수술은 잘됐고?”
“응. 잘됐어.”
“근데, 이사 새끼 설마 아적 안 왔어?”
“그렇지 뭐. 나도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럼 진료비는? 설마 진료비도 안 준대?”
“내가 안 받겠다고 했어. 그거 받으면 대금 못 받을 것 같더라고.”
“하여간 가만 보면 있는 놈들이 더한다니까.”
대화하던 내내 이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던 이 기사는 최선해를 위로하며 병원을 나섰다.
* * *
“뭐꼬? 와 그리 표정이 안 좋나? 자식 놈이 속 썩이드나?”
식당에 원두커피를 리필하러 온 임정숙 간호사를 보며 주방장 오계순이 물었다.
“우리 오 여사님 돗자리 까셔야겠네. 어떻게 아셨어요?”
“마 자식 농사 원투데이 짓나. 애 엄마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열에 아홉은 자식일 아니겠나?”
“맞는 말이네요.”
“와 아들한테 뭔 일 있나?”
“둘째 녀석이 하도 게임을 하길래 물어보니까 글쎄 장래 희망으로 프로게이먼지 뭔지를 하겠다잖아요.”
“아! 난 또 뭐라꼬. 그거 E-스포츠라고 게임 억수로 잘해가 돈 받고 게임만 하는 그거 아이가?”
“아니 여사님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프로게이머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 손주가 미국에서 그거 코치하고 있다.”
“정말요?”
“그래. 그거 생각만큼 이상한 거 아이다. 실력만 있으면 돈벌이도 꽤 된다 안 카나?”
“전 몰랐어요.”
임정숙 간호사는 게임이라는 단어에 선입견을 갖고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라고 아직 얼라 아이가.”
“초등학생이니까 아직 애는 애죠.”
“얼라들 장래 희망이야 해가 바뀌면 또 바뀐다 안 카나. 그러니 벌써부터 아한테 스트레스 주지 말고 게임하는 거나 잘 조절해 주는 게 좋지 않겠나.”
“그래야겠네요. 참 애들은 키우면 키울수록 어려운 거 같아요.”
“당연하지. 이 시상에서 엄마라는 직업이 젤로 어려분 기다. 엄마는 다들 처음 아이가? 어렵고 힘든 게 정상이다.”
“임 선생!”
따뜻한 대화가 오고가는 사이 최 팀장이 애타는 목소리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임 선생? 내가 한참을 찾았어요.”
“최 팀장 니 요즘 주식은 안 하재?”
“여사님 말도 마세요. 마누라한테 몇 가닥 안 남은 머리털 뽑힌 뒤로는 주식에 주 자도 안 봅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난 점심 준비하러 간데이.”
오계순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최 팀장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임 선생, 빅뉴스야.”
“무슨 일인데요?”
“듣고 놀라지 말아요.”
남들보다 리액션이 큰 사람이기에 임정숙 간호사는 이번에도 별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말해 보세요.”
“김 선생님이 원무과에 최선해 환자 진료비를 대신 납부하신다고 했대요.”
“뭐라고요!”
놀란 임정숙 간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최 팀장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러면서 최선해 환자한테는 병원에서 하는 일처럼 말해 달라고 하셨다지 뭡니까. 그래도 이건……임 선생?”
열변을 토하는 최 팀장을 뒤로하고 임정숙 간호사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 버렸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임 선생!?”
* * *
“커피 향 좋은데요?”
애먼 커피 향을 운운하고 있었지만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가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왜 왔는지 알고 계시죠?”
“모른다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죠?”
“당연하죠. 선생님 이건 아닌 거 같아요.”
“환자분이 사정이 좀 있더라고요.”
태경은 최선해의 딱한 사정을 전했다.
“그래서 제가 좀 도와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어요.”
생각보다 단호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환자 일이라면 누구보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기에 좀 의외였다.
“사실 김철기 원장님께 선생님 관련해서 부탁받은 게 있었어요.”
“저에 관해서요?”
“네.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환자의 진료비를 내준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으라고 당부하셨어요.”
김철기는 태경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조차 환자들의 진료비를 내줬기에 분명 우리병원에서도 똑같이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남을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 막 빚의 그늘에서 벗어난 그가 돈을 좀 모으길 바랐다. 김철기는 그만큼 태경을 아꼈기에 미리 손을 써 둔 것이었다.
“그리고 저도 무턱대고 선생님께서 환자의 진료비를 부담하는 건 반대예요.”
“안 될까요?”
“예, 안 됩니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요.”
“다른 방법?”
“네, 제가 지역 복지단체에 문의 넣어 볼게요.”
“복지단체.”
태경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보통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이런 일을 대비해 사회복지가가 상주한다.
이미 신화대에서 수시로 그들을 찾아가며 환자를 도왔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었고 조건도 있었기에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아직 최선해 환자 입원 중이고 우리 병원 지역단체나 환자 거주 지역단체도 있으니까 제가 알아볼게요. 아셨죠?”
“그래요. 일단 알겠어요.”
“절대 그때까지 선생님이 납부하지 마세요.”
임정숙 간호사는 으름장을 놓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럼 응급 환자 오면 콜할 테니까 일단 제발 눈 좀 붙이세요.”
“그럴게요. 그리고 최 선생 퇴근했나요?”
“네, 아까 퇴근했어요.”
“알겠어요.”
* * *
실외 골프 연습장.
“이사님. 오늘 저녁에 사장님 오시는 날입니다.”
“다음 주 아니었어?”
“부산 현장이 일찍 마무리됐다고 하시네요.”
급한 일정으로 최선해의 문병조차 오지 않던 나락건설 이사는 골프 연습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하여간 노인데 성격이 급해서 탈이야. 맞다! 아버지한테 사고건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 알았지?”
“예, 이사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최선해 씨 문병을 가시는데…….”
“됐어! 진료비나 대충 입금해 줘. 찾아가긴 뭘 찾아가.”
최선해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비서가 문병 이야기를 꺼내자 이사가 단칼에 잘랐다.
“잠깐만! 오늘 출장세차 날이야?”
“아니요. 어제 세차했는데요.”
“그럼 저 사람 뭔데 왜 내 차 앞에서 얼쩡거리지? 이봐!”
주차장으로 들어선 이사는 자신의 차를 살피고 있는 남자를 불렀다.
“이봐! 당신 뭐야?”
“…….”
이사의 부름에도 남자는 계속 차 안을 보고 있었다.
“당신 뭐냐고?”
“나요?”
숙였던 허리를 편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꽤 좋은 중년 남자였다.
“그래, 여기 당신 말고 없잖아.”
이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던 남자가 거리를 좁혀 왔다.
“혹시 나락건설 오벌구 이사님 되십니까?”
“내가 오벌군데.”
오벌구를 확인한 남자는 활짝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저희랑 좀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저희? 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가!”
반항기 가득한 이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뒤편에 서 있던 봉고차 문이 활짝 열렸다.
철컥-
“이래도 안 가시겠습니까?”
봉고차 안의 광경을 본 이사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 *
“이 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것 좀 드세요.”
“어머 이게 뭐예요?”
출근한 이찬희는 접수처 직원들에게 간식을 건넸다.
“집에서 보내 주신 수제 엿인데 너무 많아서요. 이따 일하시다가 당 떨어지면 드세요.”
“어머,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
“나도요. 잘 먹을게요. 수 쌤 이것 좀 드세요.”
직원이 병동에서 내려오는 임정숙 간호사에게 엿을 들어 보였다.
“이번에도 할머님이 만드신 거예요?”
“네, 주기적으로 만드시는데 항상 보내 주세요.”
“이거 진짜 맛있던데. 이 쌤 땡큐요. 김 선생님?”
임정숙 간호사가 때마침 진료실에서 나온 태경을 불러 세웠다.
“아까 말씀하신 TA(교통사고, Ttraffic accident) 환자 뤼스트 씨리즈(손목 엑스레이, wrist series) 올라왔어요.”
“그래요. 지금 확인해 볼게요. 그러고 이 선생?”
“네, 선생님.”
출근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시작된 태경의 부름에 이찬희가 움찔하며 답했다.
“처음으로 잘했더라.”
“예? 지금 잘했다고 하신 거예요?”
긴장하고 있던 이찬희에게 태경의 칭찬이 들려왔다. 주어가 빠졌지만 숙제에 관한 칭찬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이세요?”
지금까지 칭찬은 고사하고 늘 다시 하기 바빴던 숙제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것이다.
“그럼 가짜겠냐? 그렇게만 해.”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 엿 드세요.”
“뭐! 엿 먹으라고?”
이찬희가 가방에서 긴 막대 엿을 꺼냈다.
“특별히 제일 큰 빅 엿 드릴게요.”
분명 눈앞에 엿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경은 기분이 묘했다.
“너 지금 나 멕이는 거지?”
“아니요. 오해십니다.”
“지금 이 선생이 나 놀리는 거죠?”
“묘하게 그러는 거 같은데요?”
“아, 진짜 아니에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엿 드시라고…….”
“됐어. 너나 빗 엿 많이 먹어.”
안 먹겠다던 태경은 다시 돌아와 이찬희 손에 쥔 빗 엿을 뺏어 들고 응급실로 향했다.
“이찬희 저거 아무리 봐도 나 멕이는 거 같은데.”
* * *
끼익-
활기찬 출근 풍경이 한창인 그때 12인승 봉고차 한 대가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병원 앞에 급정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