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9화 (49/472)

49화. 교수 임명

신화대학병원.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마취과 이동훈은 긴 수술을 끝내고 간호사와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선생님이 왜 하신 게 없어요. 수술실의 기초이자 가장 중요한 게 마취잖아요.”

“하여간 우리 나 선생님은 참 말을 멋지게 잘해.”

“근데 오늘 수술 말이에요. 김태경 선생님이 집도하셨다면 좀 더 빨리 끝났겠죠?”

태경의 공석으로 온 문제의 교수가 수술을 하며 버벅대는 탓에 수술 시간이 지연됐었다.

“그렇긴 하죠.”

“중간에 얼타는 거 선생님도 보셨죠? 제 생각에는 아마 한 시간은 일찍 끝났을 거예요.”

한 시간이 뭔가. 태경이라면 장담컨대 두 시간이나 일찍 끝냈을 거다.

“에효. 김 선생님 얘기하니까 보고 싶네요. 잘 지내시겠죠?”

“그럼요. 잘 지내고 있다고 하네요.”

“그래요? 하긴 실력도 좋으시고 워낙 환자들한테 잘하시니까 잘 지내고 계시겠거니 했어요.”

얼마 전 연락을 주고받은 이동훈은 그때 태경의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김 선생, 잘 지내? 괜찮은 거지?’

그동안은 병원에서 쫓겨날 때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문자조차 보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에 통화를 하자마자 물었던 말이 무색할 정도의 답변이 돌아왔다.

‘즐겁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단순한 포장 멘트가 아니었다. 항상 환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힘들어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정말 기분 좋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짧은 통화였지만 새로 몸담은 병원에서 태경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맞다! 선생님 요즘 병원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세요?”

“무슨 소문 도는데요?”

“김태경 선생님에 관한 소문이요.”

“김 선생이요? 그게 뭔데요?”

“세상에 병원장님이 김 선생님 다시 데려오려고 한대요.”

“에이, 설마요?”

“어어! 선생님 우리 병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잊으셨어요? 그 사람은 병원을 백화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니까요.”

간호사의 참신한 표현에 이동훈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마치 명품백 쇼핑하듯이 환자도 의사도 그저 돈이 될 만한 인물들만 골라서 진열하는 것처럼 외부에 보여 주기 바쁘잖아요.”

“그래도 김 선생 다시 데려오는 건 말이 안 되는데요?”

“소문 들은 사람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쫓아내 놓고 어떻게 다시 데려오겠다는 건지 참 뻔뻔한 사람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태경을 다시 데려오려고 하다니 그건 아니었다.

“그냥 소문이겠지.”

“이동훈 선생님?”

간호사와 대화 후 혼잣말을 하며 사무실로 향하던 이동훈을 뜻밖의 인물이 불렀다.

“이제야 오시네요.”

실력자인 태경을 노예 생활하게 만들었던 이 교수가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술이 꽤 걸렸나 봅니다.”

“과장님이 제 사무실에는 웬일로…….”

“우리 이동훈 선생님께 조용히 드릴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한테요?”

평소 수술실에서 가끔 보는 것 말고는 크게 접점이 없던 사이라 이동훈은 의아했다.

“네, 중요한 얘기라 그런데 저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이동훈은 사무실로 들어와 이 교수와 마주 앉았다.

“저한테 하실 말이 뭔가요?”

“수술하고 와서 피곤하실 텐데 요점만 말하죠. 듣기로는 이 선생님께서 김태경 선생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더군요.”

“아,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선생님께서 저를, 아니 우리 병원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전 지금 과장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김태경 선생을 다시 데려오려 하고 있습니다.”

“…….”

조금 전 간호사가 말한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이동훈은 병원장이 진짜 양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왜 저한테 하시면서 도와 달라고 하는 건가요?”

“우리 이동훈 선생님께서 설득을 좀 해 주셨으면 해서요.”

“설득? 설마 저보고 김 선생을 만나서 설득하라는 그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니, 과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됩니까?”

얼토당토않은 말에 허허실실 사람 좋은 이동훈은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김 선생이 여기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리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태경을 우습게 생각했으면 내쫓을 땐 언제고 다시 데려오겠다는 건지. 이동훈은 절로 화가 났다.

“원장님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잘못됐다는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도 김 선생이 필요한 걸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나가…….”

“내년에 삼척 분원 원장 자리가 공석이 됩니다.”

이 과장은 사무실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난 이동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김 선생 설득만 도와준다면 그 자리를 이동훈 선생님께 약속드리죠.”

개인 연구비를 받은 이 과장은 원장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뜻대로 태경을 데려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태경이 신화대병원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이동훈을 이용해 손은 안 대고 코를 풀기로 한 것이다.

“삼척 분원을요?”

“네. 참, 아이들이 미국 유학중이라지요. 둘 다 예술 쪽이고요. 저도 아이들 유학 보내 봐서 아는데 학비가 아주 엄청나지 않습니까?”

“…….”

“분원이 제법 돈이 쏠쏠합니다.”

알고 있다. 신화대 분원 중 제일 탄탄한 곳이 삼척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내년에 새로 부임하는 원장은 꿀보직을 얻을 거라며 벌써부터 부러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김 선생이 돌아오면 바로 교수로 임명시킬 생각입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김 선생이 얼마나 교수가 되고 싶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하고 알려 드려도 될까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 과장은 조금 전과 다른 이동훈의 반응에 만족했다.

“그럼요. 김 선생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쪼르르 달려가면 우리도 모양새가 그렇죠.”

“…….”

“김 선생은 수술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밖에 나가서 GS가 어디 수술이나 마음 놓고 할 여건이 되겠습니까? 동네 구멍가게처럼 작은 병원에서 누가 수술을 하나요. 다들 큰 병원 찾기 바쁘지. 이거야 말로 심각한 인력 낭비입니다.”

저 말도 사실이다. 아무리 실력 좋은 써전이라 해도 수술을 할 수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동훈은 생각이 많아졌다. 분원 원장과 교수 자리는 생각보다 꽤 좋은 제안이며 태경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솔직히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아도 김 선생도 속으로는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이 과장은 이동훈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 * *

최선해 환자 일이 있은 후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자! 실밥 다 풀었다. 아프지 않지?”

“선생님. 싸나이는 이런 걸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태경은 리포우머(Lipoma, 지방종)를 제거한 남학생을 진료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저번에 마취할 때는 겁먹어서 입술까지 떨리던데.”

“에이, 선생님이 잘못 보셨겠죠. 전 주사 따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성격 좋은 남학생은 올 때마다 유쾌함을 잊지 않았다.

“잘됐네. 안 그래도 오늘 주사 한 대 더 맞아야 하는데 괜찮지?”

“네? 아니. 그건 좀…….”

“농담이야. 농담.”

“의사가 환자한테 농담하는 건 반칙이죠. 환자 쫄잖아요.”

“그래, 내가 미안하다.”

“야!”

옆에 있던 남학생의 엄마가 별안간 아들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아오. 엄마 아파!”

“너,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나저나 지방종은 왜 생기는 거예요?”

“이게 사실 명확한 원인은 없습니다. 유전성 경향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동우는 유전적인 원인은 아니에요.”

“어쩜 이렇게 친절하세요. 우리 어머님도 그렇고 다들 선생님 참 좋다고 칭찬 많이 해요.”

“좋게 봐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우리 동우도 선생님처럼 멋진 의사가 되면 좋을 텐데. 안 그래, 아들?”

“엄마 나 반에서 꼴등…….”

“선생님 저희 이만 가 볼게요. 아들 얼른 일어나자.”

갑작스런 성적 발표에 창피해진 엄마는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고 급하게 인사를 하며 진료실을 나갔다.

“모자 사이가 참 보기 좋네요. 그건 그렇고 더 이상은 안 되는 거 아시죠?”

“뭘요?”

임정숙 간호사의 질문에 모르겠다는 듯이 답했지만 태경은 알고 있었다.

“주말은 저도 양보 못 해요. 평일에는 말려도 퇴근을 안 하시니까 주말이라도 좀 쉬세요.”

태경의 업무량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쉬는 연습을 좀 하셔야 해요. 의사가 무슨 강철인 줄 아시나 봐. 아셨죠?”

“참! 최선해 환자 밥은 잘 먹죠?”

임정숙 간호사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적당히 화제를 돌린 태경이었다.

“네, 입맛에 딱 맞는다고 식사 시간이 제일 기다려진다고 하더라고요.”

며칠이 지난 지금 출혈을 잡았던 최선해는 나머지 수술도 모두 마치고 회복 중에 있었다.

“최선해 환자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어요.”

“개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니까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잘된 일이죠.”

“그러니까요. 따님 결혼 비용 얘기 들었을 땐 어떡하나 싶었는데 보상도 받고 다행이다 싶어요.”

“물론 돈이 다는 아니지만 최선해 환자 상황에서는 그 보상이 좋은 방법이지 않나 싶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쉬시는 거죠?”

“으흠. 저, 응급실 갑니다.”

“아니, 선생님. 답은 하고 가셔야죠.”

* * *

“이경애 환자분?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최모나의 말에 30대 여자 환자는 힘겹게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 피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검사 심전도에 CT까지 전부 다 정상입니다.”

“검사 결과가 다 괜찮다고요?”

“예.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이상 소견 없고 급성 위염이 맞습니다. 지금 맞고 계신 수액 다 끝나면 처방전 받아서 가시면 됩니다.”

“저기 선생님?”

딱 본인 할 말만 전단하고 돌아서는 최모나를 환자가 다시 불러 세웠다.

“잠시 만요? 저 정말 이상 없나요? 그냥 급성 위염 맞아요? 위가 너무 아픈데요.”

“위염이 아니면 무슨 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아니 전 위염이 원래 이렇게 아픈 건가 해서요. 다른 안 좋은 병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돼서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는 환자에게 건조한 말투를 동반한 예상 밖의 말이 돌아왔다.

“환자분이 아니라 제가 의사입니다.”

“……예?”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분이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중간에 들렀을 때 처음보다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하셨습니다. 맞죠?”

“그렇긴 한데 아직도 아파서요.”

“맞고 계신 수액, 아직 남았습니다. 그리고 급성 위염은 환자분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송곳으로 긁는 것처럼 아프다고 하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계속된 딱딱한 말투에 무안해진 환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아까 처음 문진할 때 환자분이 커피 밀가루 달고 산다고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그렇게 먹으면 위염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분도 아시겠지만 밀가루, 카페인, 탄산, 튀김, 자극적인 음식 줄이고 건강식으로 식단 관리하십시오. 젊은 사람이 왜 본인 몸을 괴롭힙니까?”

“…….”

“혹시 더 할 말 있으십니까?”

“아니요.”

마치 더 할 말이 없길 바라는 멘트에 환자는 아니라고 답했다.

“환자분 그럼 수액마저 맞으시고요. 중간에 불편하신 곳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매정한 커튼 소리와 함께 최모나가 밖으로 나가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환자에게 덧붙였다.

“저기요?”

“네, 환자분. 어디 불편하세요?”

“저 이것 좀 빼 주세요?”

“네?”

“수액 바늘 빼 달라고요.”

“아직 더 맞으셔야 하는데요.”

“아는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 더 있고 싶지가 않아서요. 어차피 위염이고 수액 반 이상 맞았잖아요. 수납하고 빨리 가고 싶어요.”

그저, 괜찮다는 한 마디를 바랐던 환자는 갑자기 서러움이 확 밀려왔다. 냉정한 태도는 둘째 치고 환자를 무안하게 만드는 의사 때문에 1초라도 이곳에 더 있기 싫었다.

“그래도 다 맞고 가시는 게 도움 되실 거예요.”

“말씀은 감사한데 그냥 빼 주세요.”

“환자분 죄송해요.”

“당사자도 가만있는데 왜 간호사 선생님이 사과를 하세요. 위염을 처음 겪어 봐서 물어본 건데 의사분 때문에 너무 민망하네요. 내 돈 내고 진료 보면서 왜 이렇게 마음 졸이며 진료를 봐야 하는지…….”

“그럼 다른 의사 선생님으로 변경 해드리는 건 어떠세요?”

“아니요. 됐어요. 얼른 빼 주세요.”

환자의 거듭된 요청에 간호사는 결국 수액 바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에휴, 최 선생님도 참……깜짝아!”

촤륵-

환자가 나가고 남은 수액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갑자기 열리는 커튼 소리에 놀랐다.

격한 커튼 소리와 함께 인기척을 낸 사람은 태경이었다.

“환자 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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