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신용카드
고층 아파트의 어느 가정집.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손과 발은 붕대와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 두께가 어찌나 두꺼운지 마치 신발을 포장하는 박스 정도 돼 보였다.
똑똑-
“아들?”
“……!”
입으로 한쪽 손에 감긴 붕대 매듭을 풀던 남자는 별안간 들려온 엄마의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
“괜찮아?”
남자의 엄마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방문 밖에서 걱정하듯 물었다.
“별일 없지?”
“어! 어. 괜찮아.”
“약 먹었어?”
“그럼. 먹었지.”
“그래, 알았어. 과일 좀 갖다 줄까?”
“아니. 됐어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엄마 불러.”
“네.”
남자는 방문에서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난 뒤에 다시 손에 감긴 붕대와 천을 풀기 시작했다. 한참을 풀던 붕대와 천이 방바닥에 방대하게 쌓여 갈 즈음 남자의 맨 손과 발이 드러났다.
“으으!”
맨살이 드러난 남자는 별안간 통증을 느낀 듯 눈가를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는 책장 가장 아래 칸에 있던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들었다.
깎을 엄두가 나지 않은 손톱은 어느새 길어져 있었다. 그 길어진 손톱 끝으로 남자는 앨범을 넘겼다.
“웃고 있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구나.”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진 속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본 남자의 표정은 쓸쓸함과 그리움이 공존했다.
이따금씩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면 남자는 손이 아닌 팔로 앨범을 간신히 들어 코끝을 사진에 밀착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부모님 나 때문에 많이 늙으셨네.”
그렇게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남자는 앨범을 덮고 핸드폰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아빠, 엄마. 나야. 손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네. 그래서 영상으로 남겨요.”
방 안에 울리는 남자의 독백은 너무나 절실하고 절박했으며 간절했다.
“정말 사랑합니다.”
툭- 투둑-
창문으로 하나둘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대변하듯 점점 더 늘어 가고 있었다.
* * *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최 선생 더 안 먹어?”
“예, 많이 먹었습니다.”
“이상하네.”
의진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최모나를 보며 갸웃했다.
“뭐가요?”
“최 선생이 먹는 거 좋아하는 거 아시죠?”
“알죠. 심지어 군것질도 좋아하잖아요.”
“최 선생이 먹을 때 그 특유의 표정이 있거든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난 몰랐네.”
“최 선생 은근히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거든요. 저번에 아는 맛집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 다음 날 리스트를 쫙 뽑아다 줬다니까요.”
“최 쌤이 그런 면도 있구나.”
“아무튼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음식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소울이 없다고나 할까요?”
“와! 우리 정 쌤 진짜 예리하네?”
임정숙 간호사가 의진의 관찰력에 엄지를 추켜세웠다.
“왜요, 최 쌤 뭔 일 있구나?”
“아까 김 선생님 방에서 나온 뒤로 약간 좀 다르네요.”
“혼났나? 아닌데. 선배는 누구 혼내고 그럴 사람은 아니지. 물론 이유가 있을 땐 그러기도 하지만 어지간하면 안 그러는 사람이거든요.”
“그건 저도 알죠. 두 분이 나눈 대화는 저도 몰라요. 근데 아마 조만간 최 쌤에게 큰 변화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뭐 때문에요?”
“글쎄요. 제 촉이라고 할까요?”
“선생님도 참.”
“정 쌤 나 촉 좋아요. 어머, 정이 씨, 왜 그렇게 젖었어?”
대화를 하던 임정숙 간호사는 군데군데 젖은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밖에 비가 진짜 미친 듯이 와요. 하늘이 우는 소리 내는 게 천둥도 곳 칠 것 같고 잠깐 은행 볼일 있어 나갔는데 나오자마자 막 쏟아지는 거 있죠?”
“우산 없어서 비 맞고 온 거야?”
“아니요. 편의점에서 사서 쓰고 왔는데도 이 정도예요.”
“비 많이 온다니까 갑자기 걱정되네요.”
“그러게요. 이러 날은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맞아요. 이런 날은 사고 환자든 응급 환자든 더 안 좋으니까요. 비가 빨리 그쳤으면 좋겠네요.”
웃고 떠들던 두 사람의 표정이 별안간 쏟아지는 비로 인해 걱정으로 바뀌었다.
* * *
우르르- 쾅!
“엄마야!”
하늘이 번쩍하며 큰 소리로 천둥이 치자 아파트 단지를 걷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는 천둥 진짜 무서워하더라.”
“그럼 가짜로 무서워해? 나는 비 오고 천둥치는 거 진짜 싫어.”
“그런 사람이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천둥까지 치는데 떡볶이를 사러 가? 그것도 저녁 시간에?”
“퇴근하고 오는 길에 떡볶이 먹방을 봤더니 너무 먹고 싶어서 안 되겠더라고.”
“저녁도 먹었잖아?”
“조금밖에 안 먹었어. 떡볶이는 원래 야식으로 먹을 때 제일 맛있단 말이야.”
젊은 부부는 대각선으로 내리치는 빗줄기에도 떡볶이 봉다리를 사수하며 걸어갔다.
“자기야, 떡볶이에 비 들어가겠다. 자기가 안고 가라.”
“아니, 떡볶이를 안고 가라니?”
“싫어?”
“아니. 와이프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데 싫을 리가.”
“역시 우리 남편이 최고야.”
“자기야. 그래서 말인데 나 들어가서 게임 좀 하면 안 될까?”
“또 게임하게? 그놈의 총만 쏘는 게임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거야.”
“스트레스 풀리고 재미있어. 오늘 동호회 사람들이랑 스쿼드 하기로 했단 말이야. 응?”
“알았어. 해.”
“정말? 역시 우리 와이프가 최고야.”
쿵!
발걸음을 서두르며 걷던 두 사람은 또다시 들리는 천둥소리에 멈칫했다.
“천둥 살벌하게 친다.”
“여보,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천둥소리?”
“아니, 천둥소리 말고. 뭔가 묵직한 소리.”
“잘 모르겠는데. 그냥 천둥소리겠지.”
“그런가? 가서 떡볶이나 먹자.”
여자는 자신이 잘못 들은 듯 남편과 함께 아파트로 들어갔다.
* * *
“선생님, 우리 애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하는데 가도 될까요?”
“그럼요. 대신 보호자분이 같이 가 주세요.”
“네.”
“3번 베드 환자 N&V(nausea and Vomiting, 오심과 구토) 지금은 어때요?”
“이제 괜찮습니다.”
“계속 체크해 줘요.”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 우리병원 응급실 베드는 오늘따라 풀 상태였다. 보통은 이 시간대는 한두 자리가 비어 있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단체 환자가 들이닥친 것이다.
“아고, 선생님. 배가 찢어질 거 같아요.”
“저 자꾸 설사가 쏟아지는데 이러다 죽는 건 아니겠죠?”
“내가 그래서 날 것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게 다 회장님 때문이에요.”
“아니, 이게 왜 내 탓이야? 자기들도 다 좋다고 했잖아.”
“자! 자! 환자분들 여기 병원이에요. 다른 환자분들도 계시니까 목소리 좀 낮춰 주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분명히 10분 전에도 똑같은 소리를 했던 임정숙 간호사는 다시 한번 주의를 주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온라인 카페 회원들이 정모로 회식을 했는데 단체로 식중독 증세를 보여 응급실을 찾은 것이다.
“오늘 해 뜰 때까지 시끄럽겠네요.”
“그래도 중중 환자들이 없으니 감사하죠. 환자들 정리 다 됐으니까 우리 거북이들 슬슬 퇴근시킬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태경의 말에 임정숙 간호사는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그러다 중증 환자 와서 OP(수술)하게 되면 혼자서 어떡하시려고요.”
“저 김태경입니다. 힘은 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첫날 혼자서 수술한 거 잊으셨어요?”
남들이 저런 말을 했다면 허세도 병이라고 한 소리 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태경이었다.
‘김태경’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이미 믿음과 신뢰가 금광석처럼 단단했다. 태경과 함께 있다면 솔직히 열 의사가 부럽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우리 거북 쌤들 얼른 퇴근시키세요.”
“금방 올게요. 이 선생, 최 선생. 잠깐 나 좀 보지?”
태경은 이찬희와 최모나를 응급실 밖으로 잠시 불러냈다.
* * *
“부르셨어요. 선생님.”
“두 사람 다 이거 받아.”
이찬희와 최모나가 받아 든 파일은 학회에 관한 자료였다.
“첫 번째 파일은 학회 자료고 두 번째 파일은 같이 보면 좋은 것들로 내가 추린 거야.”
“이게 뭐예요?”
“왜 이걸 우리한테 주시는 겁니까?”
“왜긴. 내일 거기 참석하라는 소리지. 그러니까 둘 다 지금 퇴근해.”
“예?”
“……!”
“왜? 밤새 일하고 참석할래?”
퇴근에 학회 참석까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번 건 들어두면 정말 좋아. 외과뿐만 아니라 전 방위적으로 도움 되는 것들이거든. 두 사람이 꼭 들었으면 해서 내가 따로 신청했어.”
의사로서 학회나 세미나는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 하지만 밤낮이 바뀐 근무 환경에 참석하기란 어렵다.
아마 각자 알아서 참석하라고 말을 했어도 두 사람은 절대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태경이 몰래 준비한 것이었다.
“9시 시작이니까 지금 빨리 집에 가서 자고, 끝나면 3시니까 집에 가서 쉬다가 바로 출근해. 점심은 도시락 먹지 말고 맞은편에 보면 소고기 집이 하나 있을 거야. 거기서 이걸로 둘이 먹고 싶은 만큼 먹어.”
태경은 얼이 빠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이찬희 손가락에 자신의 신용카드를 꽂아 줬다.
빚을 갚고 신용불량자 신분에서 벗어나 처음 발급받은 카드였다. 그 카드를 후배들 소고기 사 주는 데 처음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은 먹어 보지도 못했던 소고기를.
“왜 저희에게 이렇게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 평생 공부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해하지 말고 받아들여. 싫어?”
“아니요.”
“최 선생은 가기 싫어?”
“아, 아닙니다. 다만 너무 과한 처사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보내 주는 거 아니야.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두 사람 다 노트북 있지?”
“예, 있습니다.”
“저도요.”
“시작부터 끝까지 노트북으로 강의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적어서 내일 나한테 제출해. 이상. 지금부터 정확히 3분 준다. 의국실로 튀어 가서 가방 들고 빨리 퇴근해. 안 가?”
두 사람 모두 미안함에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던 그때였다.
“어차피 지금 취소 되는데 그럼 취소할…….”
“감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경이 취소 소리를 꺼내자마자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국실로 전력 질주를 했다.
“선생님?”
가운 위에 백팩을 메고 나온 이찬희가 정문이 아닌 태경에게 다가왔다.
“왜?”
“아무래도 내일 강의도 적어야 하니까 오늘은 숙제 없는 거죠?”
“없겠냐?”
“아니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에 따가운 눈총만 받은 이찬희는 그대로 정문으로 향했다.
“하여간 독종이셔. 독종!”
* * *
전날 요란한 천둥과 함께 새벽까지 내리던 요란한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좋은 아침.”
왈- 왈-
머리카락이 희끗한 노인은 작은 반려견과 함께 아파트 경비원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아직 아침이라기엔 이른데요. 지금 새벽 다섯 시입니다.”
“나한테는 이 시간이 아침이야. 이거 보이지? 약수 물 뜨러 가는 시간이 곧 아침의 시작이지.”
“빗물 고여 있는 곳 있으니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걱정 마. 그래도 퍼붓는 비 때문에 미세먼지는 깨끗하니 아주 상쾌하구만.”
“그러게요. 오늘은 하늘도 아주 잘 보이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그려. 해피 가자.”
3미터 즈음 걸어가던 노인은 갑자기 아파트 화단 안쪽으로 뛰어들며 짓는 반려견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왈-
“이 녀석아 넘어질 뻔했잖아.”
왈왈- 왈-
“쉬했으면 가자. 얼른 나와.”
왈왈왈왈-
“해피야? 쬐깐한 녀석이 기운은 왜 이리 좋은지.”
반려견이 좀처럼 나오지 않고 버티자 노인이 그쪽으로 다가간 그때였다.
“거기 쥐라도 있는 거……!”
화단 안쪽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무언가를 발견한 노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아연실색이었다.
“저기에 왜……사, 사. 사람이……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