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야구장 데이트?
똑똑-
“선생님, 저 들어갈게요.”
다급한 노크 소리만큼이나 다급한 목소리의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동안 퇴근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태경을 병원에서 쫓아내서라도 퇴근을 강요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오늘은 후배들을 학회 보내기 위해 쉴 틈도 없이 환자들을 혼자서 돌봤다.
“선생님 또 퇴근 안 하시겠다고 하시면…….”
그런데 잔소리 폭격기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임정숙 간호사의 말끝이 흐려졌다.
“안 그래도 슬슬 임 선생님이 잔소리할 시간인데 왜 안 오시나 했네요.”
태경이 가운을 벗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 진짜 퇴근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정말이죠. 저 퇴근하지 말까요?”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퇴근해야죠. 근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또 고집을 부리면 어떡하나 싶던 임정숙 간호사는 막상 퇴근하는 태경의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어머니 생신이세요.”
솔직히 태경은 퇴근할 생각이 크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쁜 병원 일로 어머니의 생신을 챙겨 드린 적이 없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 더더욱 퇴근하셔야죠. 그럼 양평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서울로 오신다네요.”
“잘됐네요. 맛있는 것도 좀 많이 사 드리고 이참에 아들 노릇도 톡톡히 하세요.”
“그래야죠. 전산에 다 남기긴 했는데 혹시 병동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럴게요.”
“그리고 혹시 응급 환자 연락 오면 시간 개의치 마시고 바로 콜…….”
“선생님? 걱정 좀 그만하세요.”
처음으로 제대로 쉬는 태경은 저도 모르게 병원 걱정만 늘어놓고 있었다.
“제가 너무 걱정만 했나요?”
“네. 완전요. 오프니까 여기 일은 우리 이 쌤 최 쌤에게 맡기세요. 저도 있고 정 급하면 연락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볼게요.”
“네, 주말 잘 보내고 오세요.”
임정숙 간호사와 직원들의 인사를 받은 태경은 우리병원에 근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진짜 퇴근을 했다.
* * *
“태경아? 어서 나와 밥 먹자.”
“나갑니다.”
계속된 이 여사의 부름에 대충 물기를 닦은 태경이 현관을 열고 옥탑으로 나갔다.
“얼른 와. 배고프지?”
“아고. 내가 나가서 비싼 거 사 드린 다니까 힘들게 상을 차려.”
태경은 이참에 좋은 곳에 가서 어머니께 맛있는 밥을 대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집밥이 최고라는 이 여사의 만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집밥만 한 게 없어. 태경이 너도 병원 생활하고 태훈이도 택배 때문에 집밥 잘 먹지도 못하는데 이럴 때 가족끼리 집밥 먹고 얼마나 좋아.”
“우리 이 여사 힘들까 봐 그렇지.”
“별소리를 다 한다. 이 세상에 새끼 밥 차려 주는 거 귀찮은 엄마가 어디 있어. 태훈아 너도 얼른 와.”
서울까지 이 여사를 태우고 온 태훈도 옥탑 평상에 함께 자리했다.
양평 집에서 싸운 뒤로 동생을 처음 보는 태훈은 어색함에 태경과 눈을 못 마주쳤다.
“그래도 오늘 생신인데 죄송해서 그렇지.”
“생일이 뭐 대수라고. 그래도 오늘 아침에 네 형이 미역국에 생일 밥도 차려 줬어.”
“형이?”
“그래. 그것도 아주 맛있게 잘 끓였다니까.”
“형 대단한데?”
“야, 내가 원래 어릴 때부터 라면 물이나 계란후라이는 너보다 잘했어.”
“그건 맞아. 형이 라면은 진짜 끝내주게 끓였지.”
어색했던 형제 사이는 라면 이야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어졌다.
“고기 식겠다. 얼른 먹자.”
“네, 잘 먹겠습니다.”
평상 주변으로 맛있는 음식 냄새와 소고기 익어 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태경은 사소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이 여사와 태훈과 함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마쳤다.
“생신 축하 합니다~ 생신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이 여사 생신 축하합니다.”
“아휴, 다 늙어서 무슨 케이크야.”
“얼른 소원 빌고 초 끄세요.”
괜한 걸 준비했다는 말과 달리 이 여사는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우리 두 아들 건강하고 하는 일 다 잘되고. 엄마는 그것밖에 없어.”
“자! 우리 이 여사 선물.”
태경은 퇴근길에 은행에서 뽑아 온 현금이 담긴 하얀 봉투를 건넸다.
“형이랑 준비했어요.”
물론 혼자서 준비한 것이지만 태경은 형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함께 준비했다고 말했다.
“태훈아 태경아 고마워. 잘 쓸게. 근데 태경아. 엄마가 서울 오면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가면 되지. 어딘데?”
“신화대병원, 너 일하는 데 엄마는 제대로 구경한 적 없잖아.”
행여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했던 이 여사는 지금껏 태경이 근무했던 병원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이 의산데 가운 입고 일하는 모습이 보고 싶더라.”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 신화대 나왔어요.”
“뭐!”
“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태경의 발언에 이 여사와 태훈은 적잖이 놀라며 과일을 먹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사실상 교수 임명이 힘들어졌고, 때마침 좋은 곳에서 제의가 와서 병원을 옮기게 됐어요.”
안 그래도 이 여사에게 말을 하려던 태경은 이참에 사실대로 털어 놓기로 했다.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해요.”
“죄송하긴. 네가 교수 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너 혹시 쫓겨난 거 아니야?”
“태훈인 넌 말을 해도 참. 아들 괜찮아?”
“우리 이 여사 좋은 날 또 걱정한다. 괜찮아요. 엄마 아들 능력 좋아. 여기 보이지?”
태경은 근무 첫날 찍었던 우리병원 사진을 이 여사에게 보여줬다.
“이 병원에 대표로 갔고 지금은 여기서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대표로? 잘됐네. 그동안 말도 못하고 마음고생 했겠다.”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나중에 병원 구경시켜 드릴게요.”
“이제 옮겼다면서. 괜찮아. 전 보다 신경 쓸 것도 많을 텐데 나중에 보여 줘. 직원들하고도 잘 지내고 환자들한테 잘해 줘. 알았지?”
“네. 명심할게요.”
그렇게 이 여사의 생일 파티가 마무리되고 세 식구는 맥주와 함께 늦게까지 대화를 이어 나갔다.
* * *
다음 날 이 여사는 태훈과 함께 양평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더 있다 가시지.”
“더 있긴. 이따 오후에 약속 있고 태훈이도 일 때문에 가 봐야 돼. 태경이 너도 약속 있다며.”
“아직 시간 괜찮아요.”
“맞다! 내 정신 좀 봐! 태경아 너 선볼래?”
“예!? 선이요?”
선이란 말에 태경의 목소리가 급격히 높아졌다.
귀찮게 구는 이찬희에게 둘러대기 위해 한 말이 실제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시내에서 국밥집 하는 예나 엄마 조카인데 걔도 의사래. 예나 엄마가 꼭 한 번 자리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
“태경아. 엄마가 너 선보게 하려고 요즘 장난 아니시다.”
“선은 무슨 선이예요. 형 있잖아요. 형 먼저 하세요.”
“야, 미친놈아 나 여자 친구 있어?”
“어? 형 여자 친구 있었어? 언제?”
“만난 지 얼만 안 됐어. 그러니까 선은 너나 봐.”
“그래, 병원에서 일하느라고 여자 만날 시간도 없잖아. 엄마가 약속 잡을까?”
“아니요. 저도……저도 만나는 여자 있어요.”
선이 보기 싫었던 태경은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여자가 있다고? 네가? 너 뻥 아니야?”
“무슨 내가 형인 줄 알아?”
“누군데?”
“있어. 같이 일하는 동료야.”
오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일까 태경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진에 대해 말했다.
“그 좋은 얘길 왜 이제야 해.”
“그냥 알아 가는 단계예요.”
“그래, 알았어. 아무튼 잘해 봐. 태훈아 시동 걸어. 이제 가자.”
이 여사가 화장실을 간 사이 먼저 내려온 태경은 태훈에게도 봉투를 건넸다.
“됐어. 이런 거 필요 없어.”
“형. 진짜 조금 넣었어. 그리고 그냥 주는 거 아니야. 형한테 엄마 잘 봐 달라고 동생으로서 뇌물 주는 거야.”
“야! 내 엄마이기도 하거든. 아무튼 주는 사람 성의를 봐서 받긴 할게.”
“그래. 고마워. 그리고 형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도박 얘기하려는 거지? 안 해. 이제 진짜 접었어.”
“진짜지? 믿는다.”
“나도 사람이야. 이번에는 믿어 봐.”
태경은 태훈에게 일부러 도박 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좀 더 형을 지켜본 뒤 나중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들 엄마 간다. 밥 잘 챙겨 먹어.”
“예. 걱정 마세요. 형, 운전 조심해.”
“그래, 간다.”
* * *
이 여사와 형이 간 뒤 간만에 잠을 보충한 태경은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선배!”
그동안 몇 번이나 술과 밥을 사 주기로 한 의진과의 약속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나도 금방 왔어.”
힘차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 의진의 모습은 평소랑 달랐다. 매일 보던 가운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 아니었다. 풍성한 웨이브를 휘날리며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과하지 않은 스타일에 산뜻하게 화장한 모습이 의예과를 휩쓸던 의진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늘 정 선생 좀 다른데?”
“선배 만난다고 머리에 힘 좀 줬어요.”
“잘 어울려. 근데 말한 곳이 여기야?”
“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야구장이었다. 밥과 술을 먹기 전에 의진이 함께 가자고 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야구장이었다.
“야구 좋아하나 봐.”
“당, 당연하죠. 오늘처럼 시간 맞으면 야구장도 꼭 와요. 선배는요?”
“난 어릴 때 아버지랑 온 뒤로 처음 와 봐.”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의진이 굳이 야구장을 온 이유가 있었다.
병원에서 최 팀장의 야구 이야기에 태경이 한 반응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 시간-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무슨 날이요?’
‘주말에 프로야구 개막전이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개막전이 블루문 경기라니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팀장님 야구 광팬이시네요.’
‘그럼요. 선생님은 야구 안 좋아하세요?’
‘열렬하게 좋아하진 않지만 야구장은 한 번 다시 가 보고 싶긴 하네요.’
‘왜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블루문 창단할 때 야구장을 데려가셨는데 그때 참 좋았거든요.’
‘그럼 한 번 가세요. 이게 현장감이라는 게 무시 못 합니다. 이왕이면 블루문 경기를 보시면 더 좋은 추억이 되시겠네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러지 말고 요번 주 오픈 때 한 번 가 보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요.’
의진은 바로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자연스레 듣게 됐다. 그리고 뼛속까지 야구인인 친구를 통해 어렵게 매진된 티켓을 구하게 된 것이다.
“제가 블루문 팬이거든요. 홈경기 개막전이기도 하고 해서 꼭 오고 싶었어요. 선배 괜찮죠?”
“나도 사실 한 번은 오고 싶었어. 아버지가 블루문 엄청 팬이셨거든.”
“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잘됐다.”
“그러게. 의진이 너 때문에 오늘 좋은 구경하게 생겼다.”
“그럼 이따 맛있는 거 사 주시든가요.”
“당연히 밥이랑 술은 내가 사야지.”
“얼른 들어가요.”
태경과 의진은 들뜬 마음으로 야구장으로 들어갔다.
“A열 8구역…… 8구역. 어! 저기다. 선배, 우리는 저쪽으로 가면 돼요.”
“나 화장실 좀 갔다 갈게. 먼저 가 있어.”
“8구역이니까 왼쪽에 보이는 통로 오세요. 길 잃으면 안 돼요.”
“정의진. 나 애 아니다.”
“알았어요. 저 먼저 가 있을게요.”
의진이 자리로 향하고 태경은 화장실로 향했다.
“이게 진짜 현장감이라는 게 무시 못 하는구나.”
지금까지 이런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던 태경은 은근히 설레는 기분이었다.
“근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엄청 모였네.”
수많은 인파에 섞여 이동하던 태경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코를 벌렁거렸다. 능력이 생긴 뒤부터 사람이 조금만 모이면 생긴 일종의 습관이었다.
‘나도 참 여기서까지 냄새를 찾고 있다니…….’
벌렁거리던 콧구멍을 진정하며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그때였다.
“……!”
별안간 희미하게 2단계 냄새가 스치듯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로 정확히 누구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판가름이 쉽지 않았다.
‘그래, 저기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급기야 태경은 계단 아래층과 위층 연결점인 작은 공간에 올라갔다. 높은 곳에 가면 냄새의 대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냄새가……왼쪽! 그래. 왼쪽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그렇다면…….’
다섯 번째 바이탈의 흐름을 쫓던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