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법적인 책임
“정의진!?”
캉캉!
그런데 의진의 대답 대신 차창에 부딪히는 둔탁한 쇳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캉캉캉!
“야, 이 미친놈아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의진에게서 소화기를 뺏어 든 경호원이 차장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저 새끼가 회장님 옷을 벗기고 만지고 있습니다.”
“뭐야!”
소화액이 걷히자 태경이 김건형에게 취하려는 행동이 훤히 보였다.
“야! 돌아이 너 그 손 치우지 못해?”
“팀장님 이것들 납치범 아닐까요?”
“뭐라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팀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5년 전, 본사 지하주차장에서 회장이 납치될 뻔했던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얼른 야구장 보안팀에 연락하고 본사에도 연락해! 빨리.”
“네, 팀장님.”
“야! 이 미친 새끼 너 회장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너 진짜 죽여 버린다.”
“지금 뭔가 다들 오해하고 계신데, 저 회장님 몸에 손을 대야 살릴 수 있다고요.”
“저 여자! 저 여자도 한패야.”
“지금 당신네 회장님 살리는 거라고요!”
의진이 몇 번이고 아무리 말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이 의사라는 말보다는 또라이 납치범일 거란 추측이 훨씬 설득력 있는 상황이었다.
“얼른 저 여자부터 잡아.”
“네, 팀장님.”
“갑자기 왜 날 잡아요? 가, 가까이 오지 마요.”
덩치 큰 경호원이 다가오자 의진은 주먹을 쥐며 큰 소리를 쳤다.
“어차피 힘으로 안 되니까 좋은 말할 때 들어요.”
“나야말로 경고하는데 가까이 오면 다쳐요.”
“다치긴 누가 다친다고. 입씨름 그만하고……으악!”
칙-
“내가 오지 말라고 했죠?”
믿는 구석이 있던 의진은 주머니에 있던 호신용 후추 스프레이를 경호원 눈에 뿌리기 시작했다. 여자 혼자 살기에 부모님이 챙겨 준 호신용품이 제 몫을 해낸 것이다.
“이 또라이 여자. 호신용 스프레이 갖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아! 내 눈.”
이미 후추의 매운 맛을 본 경호원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의진은 발 빠르게 경호원들 얼굴을 향해 스프레이를 발사했고, 낭심에 킥을 맞은 경호원은 뒷걸음질 치며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대치했다.
“의진아? 정의진?”
의진의 도움으로 차창을 깨려던 경호원들이 정신없이 눈을 비비는 사이 태경이 외쳤다.
“선배 저 여기 있어요.”
“응급 키트가 필요한데 안 보여.”
“보통 경호석 아래 공간에 둘 거예요. 지금 좌석 말고 옆 좌석 맞은편 밑을 보세요.”
“찾았다. 그래. 재벌이라면 이런 게 있어야지.”
의진이 말한 곳을 보니 정확히 응급 키트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선배, 이 차 의전용이라 방탄 되어 있으니까 문 깨는 소리 들려도 놀라지 말고 처치하세요.”
“그래. 고맙다.”
“어! 어, 이거 놔요.”
차창 밖으로 연락을 받은 보안팀이 도착했고 의진이 그들에게 붙들렸다. 하지만 태경은 환자의 처치를 멈출 수 없었다.
“미안하다. 의진아.”
태경이 급하게 응급 키트를 열었다. 그 안을 보니 포비돈과 메스 그리고 봉합실 등이 있었다.
“이 정도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긴급하게 단단한 술기는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휴! 냄새.”
억 소리 나는 차와 어울리지 않는 차 안에 화생방처럼 피어나는 포르말린 냄새가 다급함을 토로했다.
한시가 급한 태경은 재빨리 환자를 살리기 위해 행동에 돌입했다.
콸콸콸-
포비돈 통의 뚜껑을 딴 태경이 김건형 복부에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그리고 멸균 장갑을 착용하고 메스를 든다.
내려가는 시선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실밥을 따고서 복부의 수술 자국을 손을 이용해 양옆으로 밀었다.
“역시 금방 벌어지네.”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아서 약간의 힘만 주어도 피부층이 쉽게 벌어졌다.
피부층이 모두 갈라지고 연이어 그 밑에 지방층이 갈라진다. 이내 복부 구조물 중 가장 중요한 파샤(fascia, 근막)가 보였다.
이미 복강내 압력으로 소장이 배벽에 붙어 있을 것이다. 태경이 메스의 날이 아닌 등 부분으로 조금씩 압력을 주자 이내 복강이 열렸다. 그리고 내부 압력으로 인해 소장이 배 위로 흘러나왔다.
‘거즈! 거즈.’
멸균된 거즈를 급히 집어든 태경은 소장 위로 거즈를 덮어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후우!”
그리고 그 순간 김건형의 입술 색이 돌아오며 호흡수가 점차 느려졌다.
“다행이다.”
안도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그때였다.
쨍그랑-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던 차창이 와장창 깨진 것이다. 다행이 뒷좌석 차창이 아닌 가림막이 있는 운전석 유리가 깨졌다.
보안팀이 합류한 경호원들이 작정하고 유리창을 깨뜨린 것이었다.
“얼른 뒷문 열고 저 새끼 끌어내!”
“네, 팀장님.”
“저 새끼 아니고 우리 의사거든요.”
“아 거 좀 입 좀 다물어요.”
“이봐요! 덩치 아저씨. 내가 경고하나 할게요. 지금 저 사람 끌어내면 당신 회장 죽을지 몰라.”
“뭐! 죽어? 당신들 지금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팀장님,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미친 여자 말을 믿어? 이 또라이 새끼가 기어이 회장님 몸에 손을 댔네.”
병원장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회장의 배를 일면식도 없는 웬 남자가 수술 부위를 만지고 있는 광경에 팀장은 눈앞이 아찔했다.
“얼른 끌어내서 경찰에 넘겨.”
“알겠습니다.”
“마무리만!”
차 뒷좌석으로 경호원이 들어오려 하자 태경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잡혀갈 때 가더라고 처치는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지랄하네. 당신은 콩밥 먹을 준비나 해.”
정색한 외침에도 경호팀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야, 이놈들아 저놈 빨리 끌어내. 그래야 회장님 이동시키지.”
“팀장님?”
경호팀장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들이 양옆으로 태경을 끌어내려던 그때였다.
“잠시만요.”
침착한 목소리의 블루문 점퍼를 입은 남자가 뛰어오며 경호팀장을 제지했다.
“고 팀장님 되시죠? 저 팀 닥터입니다.”
“아, 예. 본사 연락 받고 오셨나 봅니다. 근데 지금 정신 나간 놈이 회장님 배를 갈랐습니다.”
“뭐라고요!?”
배를 갈랐다는 소리에 차분했던 팀 닥터가 아연실색하며 차량으로 올라탔다.
“……!”
그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빠르게 훑으며 태경을 쳐다봤다.
‘차 바닥에서 이렇게까지 했다고?’
GS는 아니었지만 팀 닥터는 태경이 의사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팀장님 괜찮습니다. 이 사람 의사 맞아요.”
“예!?”
“거봐요. 우리 의사 맞다니까. 이제 이거 놔요.”
놀라는 경호팀장과 의진의 말을 뒤로하고 팀 닥터가 차량 반대 좌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전 블루문 팀 닥터 이정형입니다. 외과의십니까?”
“네, 맞습니다.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팀 닥터의 요청에 태경은 자신이 어떠한 근거로 판단을 했고 그에 따라 개복을 했음을 빠르고 자세히 설명했다.
“잘 알겠습니다. 우선 그럼 소장이 흐르지 않도록 잡아 주시고 저는 옆에서 혈관을 잡아 회장님께 수액을 공급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아윽!”
딤 닥터가 말하는 중간 김건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아파! 윽…….”
혈액환류가 정상으로 돌아옴에 따라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복에 따른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기 마약성 진통제가 있습니다.”
“네, 저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 바로 드리겠습니다.”
김건형은 아프다는 몇 마디를 남기고 이내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잠이 든 게 아닌 의식 상태가 드로우지(drowsy, 기면, 부르면 눈을 뜨고 바라보지만 가만히 두면 잠이 든 것 같은 정신 상태)였다.
“손 바꾸겠습니다.”
팀 닥터가 수액을 연결하고 멸균 장갑을 낀 채 소장을 건네받았다.
처치를 끝낸 태경이 뒷좌석에서 내리면서 굽어 있던 허리를 그제야 폈다. 그런 태경을 경호팀장이 못 마땅하게 노려봤다.
“당신이 의사라고 하더라도 오늘 일은 쉽게 못 넘어갈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보다 우선 환자분을 병원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입니다. 서둘러 주세요.”
“회장님 전용 헬기가 곧 도착할 겁니다. 그걸로 새희망병원으로 이송할 예정입니다.”
“잘됐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것과 함께 블루문 스텝들이 의전차량으로 다가와 김건형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태경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네.”
“저 또한 의사이기에 선생님이 하신 일이 환자를 위해 꼭 필요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회장님이 깨어나셨을 때 법적인 책임을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상관없습니다.”
지극히 태경스러운 대답이었다. 포르말린 냄새가 빠진 김건형의 얼굴을 보며 태경은 만족했다.
사실 환자가 살았다면 그 책임은 어떠해도 괜찮았다.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팀 닥터는 태경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 후 경호팀장, 김건형과 함께 야구장 옆 건물 옥상의 헬기 이착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 선생님?”
태경과 의진이 야구장 입구를 향해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급한 얼굴로 팀 닥터에게 뛰어왔다.
“이 선생님, 지금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인데요?”
“강속구 선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공에 맞았습니까?”
“아니요. 아직 교체 전인데 그게 아니라, 화장실을 갔다가 미끄러졌는데 어깨 쪽이 바닥에 심하게 부딪혔어요.”
“이런!”
팀 닥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강속구는 블루문의 특급 에이스 투수다. 더군다나 1년 전 어깨 수술을 받고 불과 세 달 전에야 재활을 끝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진짜 재활하는 동안 눈앞이 깜깜했는데 선생님 때문에 다시 던질 수 있게 됐어요. 오늘 꼭 승리로 보답할게요.’
오늘 아침에 강속구가 했던 말이 팀 닥터의 뇌리를 스쳤다.
오늘 하루만 기다려온 선수인데 어깨를 부딪쳤다니. 당장 가서 상태를 체크해야 했다. 그런데 김건형의 이송이 마음에 걸렸다.
김건형은 블루문의 구단주다. 게다가 오늘 일부러 개막전에 얼굴을 비추기 위해 왔다 쓰러지기 까지 하지 않았나. 팀 닥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가 가죠!”
팀 닥터와 의료팀원의 이야기를 듣던 태경이 말했다.
“김 선생님께서요?”
“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태경도 마음 한구석이 살짝 찜찜한 기분이 있었다.
본인이 응급 처치한 환자가 잘 이송되는지 봐야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차피 의료용 헬기가 오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럼 그 안에 의사도 함께 있을 거고 헬기까지 이송만 동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팀 닥터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건 태경의 말이 맞았다.
헬기장 이송까지 동행하려는 이유는 혹시라도 그 안에 응급 상황이 생길까 해서다.
그 점을 놓고 봤을 땐 정형외과 전문의인 자신보다 외과 전문인 태경이 적임자였다.
“선생님은 블루문의 팀 닥터잖아요.”
“…….”
김건형이 중요한 건 알겠지만 솔직히 강속구가 좀 더 중요했다. 김건형이 주는 돈을 받으며 일을 하긴 했지만 어찌됐던 팀의 닥터이기에 선수 쪽으로 마음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막말로 김건형에게는 최고의 의료팀이 기다리고 있지만 선수들이 기댈 곳은 팀 닥터뿐이었다. 나중에 욕을 먹더라고 선수가 우선이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걱정 말고 얼른 가 보세요.”
팀 닥터는 태경에게 김건형을 맡기고 야구장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