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61화 (61/472)

61화. 근본도 모르는 의사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뭐하긴요. 헬기에 탑승한 거죠.”

“김태경 선생님, 제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그러니까 왜 헬기에 탑승을 했냐고요.”

“회장님 이송하려고 탔습니다.”

“예? 뭐, 뭐라고요?”

“회장님 이송 안 하고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아니. 해야죠. 해야 하는데. 지금 두 분께서 병원이송까지 동행하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지금 새희망병원에서 의사가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팀장님이 혼자 가실 건 아니잖아요.”

“난 의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나랑 정 선생이 같이 가는 게 제일 베스트입니다. 지금 다른 방도가 없잖아요.”

“하! 나도 모르겠다. 그래요. 갑시다. 가요.”

짧은 한숨을 푹 내쉰 팀장이 헬기에 올라탔다.

“기장님 좀 서둘러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업어 치나 메치나 어차피 욕을 먹는 거 똑같을 것이다. 팀장은 신입 간호사랑 가는 것보다는 경험이 많은 의사랑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많이 놀랐죠?”

“아, 네. 근데 두 분은 의사세요?”

의진은 신입 간호사와 대화하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네, 둘 다 의사예요.”

“그럼 새희망병원 선생님들이신가 봐요.”

“그건 아니고. 우연히 지나다가 위급 상황을 보고 도와주게 됐어요.”

“우와! 진짜 대단하시네요. 저는 언제쯤 그런 의료인이 될는지 모르겠어요.”

“금방이에요. 내가 보기엔 수진 씨도 대단한 거 같은데요?”

“제가요?”

“네. 이런 급한 상황 속에서도 키트 상자를 잘 챙겨 온 거 보면 얼마나 침착해요.”

“아! 이거요?”

의진의 말에 이수진은 응급 키트를 가리켰다.

“근데 왜 두 개예요?”

“하나는 일반적인 거고요 하나는 회장님 전용이요.”

“회장님 전용?”

“네. 의무실 팀장님이 얼마 전에 회장님 수술 받으셨다면서 교육해 주셨거든요. 혹시라도 본사 오셨다가 응급 상황 생길 거에 대비해서요. 그때 들었던 거 생각나서 그냥 싹 다 넣어 갖고 왔어요.”

“그 키트 저 좀 볼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태경이 이수진이 말한 키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럼요. 여기요. 정말 닥치는 대로 회장님 관련된 건 다 챙겨 왔는데 잘 갖고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니, 아주 잘 챙겨 왔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응급 키트를 열어 본 태경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현장 경험이 별로 없는 신입 간호사가 챙긴 키트는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물품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이야. 돼.”

필요한 물품은 눈앞에 있는데 굳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결심한 태경이 경호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안 됩니다. 제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아까도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나서 일냈잖습니까.”

“어차피 이왕 일낸 거 마무리까지 했으면 하는데요.”

“마무리요?”

“네. 회장님 나머지 처치를 하려고요.”

“예? 아니,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여기 있는 물품이면 회장님 상태를 더 안전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혹시 배를 다시 봉합하려는 거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봉합은 어차피 부기가 빠져야 할 수 있어요.”

“아이고 두야! 난 모르는 일이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경호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락했다. 아니 정확히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태경을 보며 웬 미친놈인가 싶었다.

근데 저 확신 가득한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면 이상하게 설득을 당해 버린다.

솔직히 김건형의 파래진 입술이 태경의 처치로 돌아오는 걸 봤기 때문에 팀장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태경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의진아 스티커 좀.”

“네, 선배 여기요.”

태경은 건네받은 노란빛이 도는 투명한 멸균 스티커로 개복한 복부 위를 덮었다. 그리고 albumin 100cc에 푸로세미드(furosemide, 이뇨제) 앰플을 섞어 김건형에게 IV(정맥주사)를 넣었다.

“한 4시간 정도 맞으면 되겠네. 이제 폴리(foley, 도뇨관)만 하면 끝이다.”

“여기서 폴리를 하시겠다고요?”

태경의 처치를 꼼꼼히 보고 있던 이수진이 깜짝 놀라며 연신 물었다.

“헬기에서요?”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도뇨관을 삽입하는 거면 모를까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없어요.”

멸균 장갑을 착용한 태경은 이수진의 질문이 민망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삽입을 끝냈다.

“다 했습니다.”

“우와!”

사실 도뇨관 삽입이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신입 간호사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해 보였다.

“진짜 멋있으세요.”

“이게 끝입니까? 그럼 회장님 배는 이대로 두는 건가요?”

감탄한 이수진과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처치를 보고 있던 경호팀장이 물었다.

“네. 배는 부기가 빠진 다음에 닫아야 합니다. 부기를 빼기 위해서 주사를 넣은 거고요.”

“난 들어도 잘 모르겠네. 거의 다 왔네요.”

창밖으로 새희망병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깜빡할 뻔했네. 김 선생님이랑 후추…….”

“후추 아니고 제 이름은 정의진이에요. 정의진!”

“그래요. 김 선생님과 후추 선생님 두 분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두 분 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겁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제 곧 마녀를 만날 시간이니까요.”

“마녀요?”

의진이 질문을 던진 사이 헬기는 어느새 새희망병원 근처에 도달하고 있었다.

* * *

“죽겠네. 진짜.”

의료진들이 김서현의 뒤를 따라 병원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사이 뒷줄에서 따라가던 이기술이 슬쩍 자리를 이탈했다.

“받아라. 제발 받아.”

복도 한쪽에 서서 태경에게 전화를 했지만 애타는 마음과 달리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응급 처치를 한 거야. 만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니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기술은 미칠 것 같았다.

“아니지. 태경이 성격에 분명 처치는 했을 거야. 그럼 설마 진짜로 휴대폰 버린 건가?”

“교수님? 다 끝났어요?”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이기술에게 VIP 병동 수간호사가 다가왔다.

“끝나긴요. 아마 2차전 또 할 겁니다.”

“안 보이던데…….”

“회장님 맞이하러 헬기장 갔어요. 당분간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오늘이 역대 급이야.”

“아우, 정말 왜 저러나 몰라. 껍데기가 재벌이면 뭐해요. 속이 그지 같은데. 근데 교수님은 안 올라가세요?”

“가야죠. 괜히 늦게 갔다 핸드폰 날아올지 모르니까 가야죠.”

“힘내세요.”

수간호사와 인사 후 옥상으로 향하던 이기술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톡- 카톡-

-형, 나야. 정신없어서 전화 못 받았어. 처치했고 지금 회장님과 같이 가고 있어.

그토록 기다리던 태경의 연락이었다. 처치를 했다는 문장에 안도하던 이기술은 마지막 문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회장님이랑 같이 오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본사 헬기에 같이 타 있다는 소린가?”

* * *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김건형을 맞이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온 김서현이 또 한 번 사자후를 날리며 칼춤을 추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냥 이송 중이라니 이것들이 진짜 미쳤네.”

김건형이 의료용 헬기가 아닌 업무용 헬기로 이송 중이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의료용 헬기가 심장이식 환자의 심장을 급하게 가져오느라 그쪽으로 가게 됐습니다.”

“심장이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김서현이 옆에 있던 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올해부터 병원 차원에서 취약 계층 아이들 중 중증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온 심장이식 환자 아이가 이식할 심장이 없어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뇌사자가 나와서 급히 그쪽으로 출동했습니다.”

“돌았구나. 우리 아버지가 그깟 애새끼보다 못하다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병원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저희도 헬기가 이미 뜬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아이 환자에게 간 헬기를 돌렸다간 회장님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도 있어서…….”

“됐고! 이러려고 몇백억짜리 헬기를 사 준 줄 알아? 어쩜 이리 경우가 없어. 경우가!”

“사장님, 잠시만요.”

“왜? 무슨 일인데.”

옆에 있던 비서가 전화를 한 통 받더니 김서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오 마이 갓! 이건 또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지금 아버지가 의사도 없이 이송 중이라네. 원장님, 맞아요?”

“그게 의사가 없는 게 아니라. 응급 처치를 했던 의사들이 함께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 아주 지랄 팝콘을 튀기고 앉아 있네.”

두두두두-

김서현의 생떼로 의료진에 고막에서 피가 나기 직전 다행히 헬기가 도착했다.

“아버지 오셨네. 아무튼 두고 보자고!”

철컥-

헬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서 있던 의료진들이 일제히 문 앞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비켜! 아빠! 아빠!”

마치 몇십 년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나는 사람처럼 김서현은 의료진들을 밀쳐 대며 앞장섰다.

“어……!”

그리고 배가 열린 채 투명 스티커로 덮여 있는 김건형의 모습을 보자 휘청하며 뒷목을 잡았다.

“사장님!”

“사장님 괜찮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

곁에 있던 비서들이 부축하려 다가오자 손사래를 치며 경호팀장에게 눈을 흘겼다.

“아빠 왜 저래? 어떻게 된 거야?”

“블루문 개막전을 보러 가셨다가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지시면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니까 거길 왜 가게 하냐고. 이 팀장, 회장님 경호 한두 번 해? 당신 끝이야.”

“면목 없습니다……윽!”

고개를 90도로 숙여 죄송한 마음을 전하는 경호팀장의 입에서 고통을 삼킨 소리가 들렸다.

김서현이 신고 있는 하이힐 굽으로 정강이를 찍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의료진과 경호팀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의진과 신입 간호사는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의료진 뒤쪽에 서 있던 이기술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태경을 쳐다봤지만 별수 없었다.

“뭐해! 아빠 안 옮길 거야?”

“빨리 회장님 옮겨!”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료진이 김건형의 베드를 끌고 옥상을 빠져나갔다.

“바퀴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옮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 김서현은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던 태경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팔짱을 낀 채 기분 나쁜 눈빛으로 위아래 전신을 훑었다.

“쯧쯧. 옷 입은 꼬라지 하고는…….”

그리고 누가 봐도 깔끔하게 입은 태경의 옷을 보고 단지 명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쪽인가 보네. 회장님 이송에 동행했다는 의사가?”

“그렇습니다.”

김서현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태경의 앞으로 정확히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 아빠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제가 처치를 한 사람입니다.”

“하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서현 짧은 실소를 터트린 그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쫙-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귀싸대기를 맞은 태경의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의사놈이 우리 아빠를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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