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우리병원의 수장
“으하!”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태경은 한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근본 없는 의사. 선배 좋아해요.’
어제 있던 일 중에 가장 임팩트 있던 말이 머릿속에 짬뽕이 되어 떠다녔다.
막상 어제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는데 싸대기를 맞은 것보다 근본 없는 의사라는 말이 은근 거슬렸다.
도대체 근본 없는 의사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태경은 머리를 긁적이다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고백이라니. 그것도 의진이가 날? 아니야. 아닐 거야.”
그리고 험난한 인생살이로 모태솔로로 지낸 태경은 의진의 고백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예과 최고 인기를 자랑했던 의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영 납득이 되질 않았다.
“됐다. 그만 생각하고 출근이나 하자. 출근!”
아직 출근 시간이 남았지만 태경은 빨리 병원에 가고 싶었다. 집에 있으니까 자꾸만 별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으랬다고 태경이 가장 마음이 편안 곳은 역시 병원. 그것도 정확히 우리병원이었다.
Rrrrrrrrrrrr
씻고 나온 태경은 책상 위에서 울리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어!”
화면에 나타난 이름을 확인한 순간 표정에 환해졌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여. 김 선생.
발신자는 신화대병원 마취과 이동훈이었다.
-잘 지냈어?
“그럼요. 잘 지내시죠? 별일 없으시고요?”
-나야. 늘 똑같지. 그래도 김 선생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김 선생만 괜찮으면 시간 내서 조만간 한 번 봐.
“저야 당연히 좋죠. 다들 잘 지내죠?”
그만둔 뒤로 궁금해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던 신화대병원 동료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럼 다들 잘 지내. 김 선생도 보고 싶어 하고 그렇지 뭐. 그보다 나 할 말이 있는데 잠깐 통화 괜찮아?
“지금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할게. 김 선생 혹시 말이야. 아직 교수 생각 있어?
“교수요?”
죽었다 살아난 뒤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였다.
-그래. 교수.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세요?”
-김 선생한테 교수 제의가 들어왔어.
“저한테요? 누가요?”
-병원장님이 약속하셨어. 우리 병원으로 돌아오면 외과 교수 자리를 주겠대.
“선생님?”
-김 선생, 내가 지금 OP들어가야 해. 자세한 이야기는 조만간 만나서 하자고. 한 번 충분히 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이동훈은 수술에 들어간다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교수라니……!”
어제부터 시작해서 몰아친 일이 마친 정점을 찍은 기분이었다.
“흠!”
태경은 신화대병원에서 사용했던 물건이 담긴 상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서둘러 집을 나갔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태경을 보자마자 당직은 선 이찬희가 반갑게 다가왔다. 누가 태경 바라기 아니랄까 봐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휴가 갔다 돌아온 주인을 본 강아지 같았다.
“선생님,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니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뭐하고 쉬셨어요?”
어쩐 일인지 이찬희는 진료실까지 따라오면 질문에 적극적이었다.
“이찬희?”
“넵, 선생님.”
“뭐하냐?”
“뭐가요?”
“진료실을 왜 쫓아와. 뭐 할 말 있어?”
“당연히 할 말이 있죠. 어떻게 되셨어요?”
태경이 보다 키가 작은 이찬희는 부담스러운 눈웃음을 보이며 실실 쪼갰다.
“부담스러우니까 저 뒤로 가서 말해. 그리고 뭔 소리야?”
“다 아시면서. 선보신 거요. 잘되셨어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
그러고 보니 이찬희한테 선을 본다고 적당히 둘러댄 게 생각났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기대에 잔뜩 부푼 표정을 보며 태경은 이번에도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그럼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선생님께서 선을 보신다니 얼마나 궁금해요.”
“그냥 차 한 잔 마시고 끝났어.”
“왜요? 저런 까이셨구나.”
“그래 까였다. 됐냐?”
“하긴! 선생님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없어서 그래요. 요즘은 잘생긴 사람보다 유머러스한 사람이 인기가 있다니까요.”
“시끄럽고. 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 못 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x됐다.’
너무 까불었나. 순간 진지해진 태경의 눈빛을 보며 이찬희는 후회가 몰아쳤다.
‘또 시작인가?’
안 그래도 당직으로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살짝 멍한 느낌인데 괜히 대답을 못 했다간 후폭풍이 몰아칠 게 뻔했다.
“평소 건강했던 사람이 아무 증상도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부터 삼키기 힘들고 이따금씩 호흡 곤란도 있고 목 아랫부분…….”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응급 콜이 온 거 같습니다.”
“아닌 거 아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
“네, 경청할게요.”
“목 아랫부분에 뭔가 만져지는 느낌이 들어 초음파를 봤는데 덩어리가 확인됐어. 이때 의심되는 병명이 뭐야.”
“thyroid cancer(갑상선 암)입니다.”
“thyroid cancer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과 thyroid cancer의 종류는?”
“90% 이상이 유두암이며 그 밖에 여포암, 수질암, 미분화암, 저분화암이 있습니다. 이번 학회 중에 thyroid cancer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부분이 있었는데 재미있었거든요.”
“그래도 보내 준 보람이 있네. 5분 내로 준비하고 수술방 가 있어.”
“지금요? 응급 환자 오나요?”
“집도의 이찬희 어시 김태경. 유두암 환자 수술한다.”
태경이 출근 시간보다 빠르게 온 건 이 때문이었다. 환자를 보기 위함도 있지만 한동안 바빠서 못 했던 이찬희의 이미지 수술을 하나라도 더 해 보기 위함이었다.
“머리 멍하다고 했지? 가는 길에 머리 찬물로 감고 들어와라. 안 가?”
웬일인지 이찬희의 표정은 신나 있었다.
“뭐야, 왜 웃어?”
“안 웃었는데요. 머리만 감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만 해도 날마다 줄지 않는 숙제가 이찬희는 버거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조금씩 자신감이 붙고 달라지는 자신을 느끼며 태경의 가르침에 감사하게 됐다.
“언제 갈래? 계속 서 있을 거야?”
“아니요. 갑니다. 가요. 선생님?”
* * *
한참 전에 출근한 최모나는 오늘따라 벅찬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선생님, 이연나 환자 결과 나왔습니다.”
“AGE(acute gastroenteritis, 급성 위장염)네.”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에 뭔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간 최모나가 간호사에게 종이를 건넸다.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따라 목이 따끔해서 말하기 힘듭니다. 이대로 처방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모나는 곧장 환자가 있는 베드로 가서 결과에 따른 병명을 설명했다.
“조금 기다리시면 간호사 선생님이 수액 놔 주실 겁니다.”
“어떡해. 우리 연나 주사 맞아야 해요?”
보호자는 눈물 자국이 마른 어린 자식을 끌어안으며 속상해했다.
“이 어린 게 주사 맞을 때가 어디 있다고?”
“수액 다 맞고 처방전 받고 가시면 됩니다.”
“저기 선생님?”
“아, 네.”
“정말 우리 애 급성 위장염이 맞아요?”
“네?”
“그게 아니라. 애가 너무 아파해서요. 집에서도 여기 오는 동안도 막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했거든요. 혹시 다른 안 좋은 병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간혹, 걱정과 염려가 많은 보호자나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안 그래도 심적 피로가 쌓여 가고 있던 최모나에게는 이런 보호자가 반가울 리 없었다.
“네, 전혀 아닙니다.”
“근데 이렇게 아프다고요? 정말 너무 아파해서요.”
“보호자분. 외람되지만 급성 위장염은 생각보다 통증이 심합니다.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한 번도 안 걸려 봐서 잘 몰라서 물어본 거예요.”
“예, 압니다. 제 결과를 믿기 힘드시다면 다른 병원에 가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수액은 맞고 가시는 게 아이가 덜 힘들 겁니다. 그럼.”
“뭐가 저렇게 딱딱해! 별꼴이야 진짜. 이래서 대학병원 가야 한다니까.”
커튼을 치자마자 보호자의 원성이 들려왔지만 최모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환자에게 향했다.
“환자분 다리에 골절이…….”
“잉? 뭐라고 고무가 어쨌다고?”
벌써 같은 말만 열 번째 하고 있는데 할머니 환자가 못 알아듣고 있었다.
“저기 아까 보호자분 있던 거 같은데 어디 가셨습니까?”
“그게 지갑을 두고 오셨다고 급하게 집에 다녀오신다고 나가셨어요.”
“예?”
하필이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그것도 보청기도 안 끼고 온 노인 환자를 상대해야 하다니. 최모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으며 답답함을 삼켰다.
“집이 근처라고 빨리 오신댔는데……. 좀 늦네요. 맞다. 할머니 보청기도 가져오신다고 했어요. 선생님 이따 다시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응급실 단골 환자였던 할머니는 보청기가 없으면 소통이 힘든 분이였다. 게다가 치매기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간호사는 보호자가 올 때 다시 할 걸 권했다.
“아닙니다. 환자분 아까 전에 CT 찍은 거 결과가 나왔습니다.”
“뭐라고? 뭐가 나와?”
“아니, 그게 아니라…… 환자분 제 말 잘 들리십니까?”
답답함이 한계에 다다른 최모나는 급기야 응급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환자의 귀에 한 글자 한 글자씩 똑바로 말했다.
“다리 아프셔서 엑스레이 찍은 거 기억하십니까? 환자분 엑스레이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봐요! 의사 양반?”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누굴 치매 환자로 착각하나, 왜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치매가 있는 할머니의 정신이 또렷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환자분께서 보청기가 없어서 제가 잘 전달하기 위해 그런 겁니다.”
“뭐라고 하나도 안 들려. 좀 크게 말해 봐.”
“…….”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내 다리 어떻게 됐는지 설명 안 해 줄 거야?”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의사들도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힘에 부치고 짜증이 솟구치는 날. 최모나에겐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저기 내가 왜 병원에 있는 거야?”
방금 전까지 정색하던 할머니 환자는 정신이 또다시 오락가락한 듯 병원에 온 연유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후우!”
“어머!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답답함에 돌아 버릴 것만 같은 그때 다행히 보호자가 돌아왔다.
“사거리에서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죄송해요. 저희 어머니 괜찮으세요?”
“CT 결과 다행스럽게 긴뼈가 깨끗하게 골절이 돼서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일단 반 깁스를 하고 이후 붓기가 빠지면 통 깁스로 바꿀 예정입니다.”
그 후 최모나는 나머지 일정과 처방받을 약에 대해 보호자에게 설명한 뒤 빠르게 베드를 벗어났다.
‘뭔가 이상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한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스테이션에 있는 임정숙 간호사에게 향했다.
“선생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최 쌤. 뭔데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 확인이 좀 필요합니다.”
“뭐가 우리 최 쌤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제가 오늘 출근해서 지금까지 응급실과 외래를 본 환자들이 거의 노인, 또는 아동 환자였습니다.”
정말 그랬다. 이상하리만치 평소와 비교하면 정확히 세 사람만 빼고 다 노인과 아동 환자를 집중적으로 봤다.
지금까지 노인과 아동 환자를 적당히 가리며 봤던 최모나로서는 이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우. 그러셨구나. 그런데요?”
“혹시 선생님께서 그렇게 조정하신 겁니까?”
“제가요? 전혀 아닌데요.”
임정숙 간호사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그냥 우연입니까?”
“아니요. 최 쌤. 우연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연은 아니고 정해진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지금 하시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오늘부터 그렇게 하라고 지시가 있었어요.”
“지시라니…… 전 그런 지시를 들은 적도 이렇게 정해졌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최모나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번지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지시를 한 겁니까?”
“우리병원의 수장이신 김태경 선생님의 지시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