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 물건 이름이 뭐야?
“최 쌤 일은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아……그렇구나.”
“그랬다니까요?”
“그렇게 된 거군요.”
“별나라 깐다삐아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맞아요. 삐약이가 그렇죠.”
말도 안 되는 개떡 같은 말에 의진이 태연하게 반응하자 임정숙 간호사가 들고 있던 텀블러를 내려놓았다.
“정 쌤?”
“……네?”
“정 쌤 나 좀 봐요. 도대체 오늘 왜 그래요?”
“뭐가요?”
“아니, 동태 눈깔처럼 눈은 멍하고 정신은 딴 데 팔려 있고. 그리고 갑자기 김 선생님은 왜 피하는데요?”
“제가 언제 선배……아니 김 선생님을 피했다고 그러세요.”
다른 얘기에 미동도 없던 의진이 태경의 말이 나오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저 안 피했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의진은 오늘 출근하면서부터 은근히 태경을 피하고 있었다.
‘선배, 좋아해요.’
전 날 호기롭게 고백했지만 막상 태경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마음이 어찌나 절실한지 부디 오늘 태경과의 응급 수술이 안 잡히길 속으로 간절히 빌 정도였다.
“그래요?”
“그럼요. 수 쌤이 잘못 보신 거예요.”
“그런가 보네요. 아니 난 또 고백하고 피해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 길래 혹시나 했죠.”
“푸악!”
순간 의진의 입에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호사 휴게실 바닥에 뿌려졌다.
눈치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임정숙 간호사가 떠본 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다.
“정 쌤, 괜찮아요?”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놀랄 게 뭐가 있다고……설마 진짜 고백했어요?”
“수 쌤 나 어떡해요. 어제 많은 일이 좀 있었어요.”
의진은 임정숙 간호사에게 어제 있던 일을 전부 털어놨다.
“세상에 두 분이서 어제 영화 한 편 찍고 오셨네. 근데 나는 우리 정 쌤이 고백한 거 잘한 거 같아요.”
“잘한 걸까요? 아니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데요. 잘한 거지. 나도 우리 남편한테 먼저 고백했었어요.”
“정말요? 수 쌤 멋지다.”
“정 쌤도 멋져요. 그리고 사람 좋아하는 데는 나이 필요 없어요. 왜 어린 친구들도 헤어지면 어른들이 이별하는 것과 똑같은 정신적인 리스크를 받고 80대 어르신들도 좋아하는 마음이 젊은이들과 똑같다고 심리학자들이 그러잖아요.”
“하긴 사람 좋아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죠. 근데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같아요.”
“전혀 예상을 못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근데 아마 지금부터는 그러기 힘들걸요.”
“힘들다니요?”
“사람의 마음이 참 신기해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도 날 좋아한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의식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우리 정 쌤이 그냥 평소처럼 김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의진이 태경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는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 그래도 진짜 답답했는데 수 쌤한테 말하길 잘한 거 같아요. 감사해요.”
“천만해요. 그나저나 그 회장 건은 어쩐대요.”
“사실 회장보다도 딸이라는 김서현인가 하는 그 사람이 더 걱정이에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거 대놓고 열 받네요. 아니, 우리 귀한 선생님들한테 함부로 하다니. 인성이 덜 된 불쌍한 사람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돈보다 사람이 돼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자기 아버지를 살린 사람한테 설마 진짜 청구하지는 않겠죠.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겠죠?”
“그럼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의진을 전날 표독스럽게 쳐다보던 김서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뿜은 커피를 닦았다.
* * *
새희망병원 VVIP병실.
“장님……회장님?”
태경의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진 김건형은 전날 배를 닫는 수술 후 병실에 입원 중이었다.
“회장님,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으세요?”
“수술 부위가 당기진 않으시고요?”
오늘도 회진을 핑계 삼아 눈도장을 찍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 교수들과 병원장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김건형을 불렀다.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김건형이 검지를 놀리며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귀를 김건형의 입에 밀착했다.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정신 사나우니까 다들 입 닫고 당장 나가시라고 합니다. 좀 쉬고 싶다고 하시네요.”
“아, 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저희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병원장과 교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자 김건형이 빨리 나가라고 손짓했다.
철컥-
“하여간 저 물건들은…….”
교수들이 나가자 김건형은 질색하는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교수라는 작자들이 환자를 볼 것이지 잘 보이려고 저리 모여 있으니 원. 그나저나 내가 어떻게 된 거야?”
전날 수술에서 깨어난 뒤 급한 회사 일부터 처리한 김건형은 이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궁금해했다.
“그게 불루문 개막전을 갔다 쓰러지셨습니다.”
“그래. 순간 쓰러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고 팀장 자네 내 앞으로 좀 와 봐.”
비서실장과 대화를 주고받던 김건형이 저만치 서 있던 경호팀장을 불렀다.
“자네가 좀 이야기해 봐. 도대체 서현이는 왜 길길이 날뛰고 내 애마가 망가졌다는 소리는 뭐고 나를 치료했다는 위인이 누군지 말이야.”
“그게……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호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로 영상을 클릭하더니 김건형에게 내밀었다. 영상은 야구장과 차 안, 그리고 헬기에 있는 태경과 의진의 CCTV 녹화본이었다.
“이걸 내가 꼭 봐야 하나?”
“직접 보시는 게 설명보다 더 확실하실 겁니다.”
심드렁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눈빛이 금세 화면에 집중했다.
김건형은 성격이 급하기로 소문나 회의를 할 때도 뭐든 간결하고 빠르게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태경이 나오는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빠르게 넘기지 않고 시청했다.
“허, 거참! 아주 거침이 없군.”
영상을 다 본 김건형이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 물건이 날 살렸다는 그 친구인가?”
“맞습니다. 회장님.”
“아주 재미있네. 이 실장?”
“네, 회장님.”
“이 물건 이름이 뭐야?”
“김태경입니다.”
“김태경이라……. 이 친구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좀 알아봐.”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내린 김건형은 다시 한 번 태경의 영상을 리플레이했다.
* * *
“들어가세요. 선생님 다음 환자 들어가십니다.”
태경은 진료실에서 외래 환자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전 몸이 불편해서 온 건 아니고 김태경 선생님께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용무요?”
“누가그룹 법무팀에서 나왔습니다.”
“…….”
블랙 슈트와 진한 향수를 날리는 남자는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저희 사장님의 마음이 담긴 작은 서류입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타부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법무팀 직원은 서류를 남긴 채 진료실을 나갔다.
“청구서!”
남자 건넨 서류 안에는 청구서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청구서-
김태경은 누가그룹의 물건을 허락 없이 사용한 바 그에 따른 합당한 금액을 청구합니다.
훼손된 차량과 더불어 누가그룹의 재산인 사내 헬기를 사용한 대금 총 237,500,000원을 오늘 날짜인 2021년 9월 x일부터 일주일 이내 납부해야 함을 알려 드립니다.
-누가호텔사업부 사장 김서현-
“진짜로 청구했네.”
억 소리 나는 엄청난 금액이 찍힌 청구서를 본 태경은 황당했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금액이 청구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을 돈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김건형을 살린 그의 목숨값이 그야말로 ‘억’소리가 났다.
철컥-
“선배?”
임정숙 간호사에게 소식을 들은 의진이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누가그룹에서 왔다면서요. 괜찮……이, 이억? 이 사람들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청구서에 찍힌 금액을 본 의진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래도 청구인이 나 하나야.”
이 와중에도 태경은 청구서가 본인한테만 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는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러게 웃음이 나오네. 정 선생한테 미안할 일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라 그런가.”
“아니, 선배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김서현 그 여자가 선배한테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엄청난 금액을…….”
“정 선생, 괜찮아.”
가운이 휘날리도록 달려와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 의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진정시켰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 지금 되게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 생각밖에 없거든.”
“중요한 일이요? 뭔데요?”
“저기 보이지?”
태경이 진료실 밖으로 의진과 고개를 내밀자 대기하고 있던 환자가 인사를 보냈다.
“봤지? 오늘 외래 환자가 많아서 빨리 환자 봐야 해.”
“물론 환자가 중요하긴 한데 자그마치 2억이 넘는 돈이…….”
“걱정하지 마.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자! 우리 정 선생도 얼른 진료 보러 가시고. 이금례 환자분 들어오세요.”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이 누군데 의진은 태경의 태연한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수 쌤 저게 맞아요?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요?”
“전 이해되는데요.”
“네?”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오늘 진료 캔슬하고 당장 뛰어가 사과를 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했겠죠.”
그게 정상이니까 당연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이잖아요. 내 사전에 환자보다 중요한 건 없다. 이게 김 선생님의 모토잖아요.”
의진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서만은 태경이 본인을 좀 더 생각했으면 싶었다.
* * *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악! 시x!!”
우리병원 근처 건물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고성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악! 개새끼.”
한 시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거친 욕설이 나오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깜짝 놀랐다.
“뭐야. 방금 저 남자 욕하는 소리 들었어?”
“됐어. 뒤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 요새 이상한 사람 많으니까 괜히 건들지 않는 게 좋아.”
“하긴. 어제 뉴스 보니까 그 뭐냐. 조현병 걸린 사람이 길가다 막 흉기 휘두르고 그랬대.”
“그러니까. 조용하고 빨리 가자.”
건물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행인들의 소리를 듣고 손에 쥐고 있던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그는 침으로 흥건하게 젖은 수건을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꽉 물었다.
-현준아. 병원에 전화해 보니까 지금은 환자가 많지 않대. 괜찮을 거야. 그냥 두면 안 좋아. 알았지?
누군가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읽은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쓴 채 병원으로 향했다.
“으악! 썅.”
남자의 입에서 터지는 욕설은 거침이 없었으며 그와 반대로 그의 발걸음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제발. 제발…….’
남자는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속으로 무언가를 빌며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에 수건을 물었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더욱 꽉 물었다.
“으읍!”
이윽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접수처 직원이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진료 보러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