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66화 (66/472)

66화. 환자한테 뭐 하는 짓이야!

“으읍!”

이윽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접수처 직원이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진료 보러 오셨어요?”

“으읍! 읍!”

별안간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직원이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당황한 듯 재빨리 수첩을 꺼냈다.

-오늘 진료 보러 왔습니다. 지금 진료 볼 수 있나요?

“으읍! 읍!”

남자는 계속해서 나오는 고성을 삼키며 미리 적어 놓은 수첩 속 글자를 보여 줬다.

“아, 네. 진료 보실 수 있어요. 혹시…….”

뭔가 어딘가 이상한 남자의 행동에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말씀하시기 불편하신가요?”

“으읍!”

-말하기 힘든 상황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응급실 진료 보실 거예요, 외래 보실 거예요? 지금 외래도 가능하시거든요.”

예상 못한 질문에 남자가 수첩에 답변을 적어 보여 줬다.

-외래로 보겠습니다.

“네, 오늘 어디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환자분 혹시 입안을 다치신 거면 응급실 진료로 빨리 보실 수 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입 다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진료 볼 때 선생님께 말씀드릴게요.

“아, 네. 그럼 여기 성함이랑 생년월일 적어 주시고 잠시만 앉아 계세요.”

-저기. 죄송하지만 오래 걸릴까요?

“지금 선생님께서 응급실 진료 중이신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만약 응급 환자가 오면 응급 환자 먼저 진료 볼 수도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 * *

“기사님, 감사합니다.”

병원에 있어야 할 의진이 시내 한복판에 멈춘 택시에서 내렸다.

한 시간 전-

‘수 쌤, 죄송한데 저, 딱 한 시간만 나갔다 올게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개인적으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정 쌤이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오죽 급한 일이며 그러겠어요. 얼른 다녀오세요.’

‘응급 수술 환자 생기면 바로 올 테니까 콜 주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라고 했지만 사실 의진이 이 시간에 병원을 나온 건 태경의 일 때문이었다.

누가그룹에서 보낸 2억 원이 넘는 청구서를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의진아, 괜찮아.’

당사자인 태경은 괜찮다고 했지만 의진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따지고 보면 태경이 겪은 일에 본인의 책임도 한몫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괜히 주말에 만나자고 해서.”

주말에 태경을 불러낸 것과 약속 장소를 굳이 야구장으로 잡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일에 같이 휘말렸는데 청구인에 자신만 빠진 게 미안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진료를 보는 내내 고민하고 고민하던 의진은 초등학교 때 이후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던 곳에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태경을 돕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오랜만이네. 하긴 건물 새로 짓고는 처음 온 거니까…….”

고층 건물이 저마다 위엄을 뽐내는 가운데 정&장 법률사무소라고 쓰인 가장 큰 건물의 정문을 향해 의진이 걸어갔다.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안에는 불이 켜진 곳이 수두룩했다.

“거기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의진이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로 진입하자 보안요원들이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정해진 변호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정해진 변호사님이요? 혹시 변호사님과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괜찮아요. 내 손님이에요.”

때마침 의진이 만나기로 한 인물이 보안요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보안요원을 뒤로하고 의진은 정해진과 함께 건물 밖 구석진 벤치로 나왔다.

“너 갑자기 어쩐 일이야?”

“언니!”

의진이 친밀하게 부른 정해진은 친언니였다. 정해진은 대표 파트너 변호사이자 핵심 인물이었다.

“내가 너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 나도 정신이 없어서.”

“가운 입고 뛰어올 정도로 급한 일이야?”

“좀 급하긴 해. 언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동생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정해진은 도와 달라는 의진의 말에 조금 놀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가족에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해 본 적도, 손을 벌린 적도 없었다. 그만큼 책임감 강한 동생이었다.

대대로 법조인 집안인 의진은 변호사가 되길 원하는 부모님의 뜻과 달리 의대 입학 후 혼자 살고 있었다. 아직도 로스쿨을 가라는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하! 알았다. 너 혹시 속도위…….”

“야! 정해진! 그런 거 아니거든.”

“동생아 너무 아쉽다. 이 언니는 대환영인데.”

“그게 동생한테 할 소리니?”

“네가 청소년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고 직업 뚜렷한 성인이잖아. 너 30대 후반이다. 곧 앞자리 바뀐다고. 엄마가 너 선보게 하려고 아주 혈안이 되셨어.”

“아, 됐고. 언니 김서현에 대해 좀 알아?”

“설마 내가 아는 그 누가그룹 김서현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설마가 맞아.”

“뭐? 너 그 마녀랑 엮인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정확히는 내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곤란해서. 언니 도움이 필요해.”

“알아듣게 얘기해 봐.”

의진은 언니에게 있었던 일 그래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너랑 그 동료 의사는 결국 선한 사마리아인 법을 따른 것이네.”

“그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응, 맞아.”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자신이 특별한 위험에 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지 않고 외면한 자를 처벌하는 법이다.

현재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이 법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 법을 따르진 않잖아.”

“맞아. 대신 우리나라에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이 있지.”

제5조 2항은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하는 내용이었다.

“선의의 응급의료인에 대한 면책 이야기하는 거잖아.”

“역시 법조인 집안인가 잘 아네.”

“나도 의료인인데 그 정도는 알지. 근데 문제는 과연 김서현한테 그 법이 통할까 싶은 거지. 그쪽 법무팀이 그걸 모르고 청구서를 보내진 않았을 거 아냐.”

“당연히 알겠지. 아마 알고도 전혀 신경 안 쓸 거야.”

“내 말이 그거야. 뭔가 방법이 있을까?”

“맞다! 마녀가 네 동료 귀싸대기 날렸다고 했지?”

“응. 아주 제대로 날렸어.”

“일단 건수 하나 잡았고. 의료인 폭행 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이거든.”

“뺨 때린 걸로 그게 될까? 듣기로는 누가그룹 법무팀이 철옹성이라며.”

“훗! 동생아 네가 집안일을 전혀 몰라서 이러나 본데. 우리 집안 정&장이야.”

의진의 이야기를 들은 정해진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걔네 법무팀보다 대단한 곳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 회사란다. 너 우리나라 재벌 그룹들 굵직한 국내외 소송은 다 우리가 맡고 있는 거 몰랐지?”

“아, 정말? 난 몰랐어.”

“걔네들 치부 하나쯤은 언니가 다 알고 있다는 소리지. 특히 그 김서현은 내가 언젠가 한 번 손봐 주고 싶었는데 잘됐다.”

“왜 언니도 무슨 일 있었어?”

“2년 전인가? 우리 회사 명예 변호사님이 그때 고문관으로 참여해서 어려운 사건을 잘 풀어 주신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근데 그때 걔가 지 아버지뻘 되시는 분한테 반말 찍찍하며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더라고. 그나저나 너 그 동료라는 의사, 남자니?”

“응. 내가 좋아하는 선배야.”

의진이 일부러 언니에게 좋아하는 사실을 고백했다. 정해진의 성격상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머어머! 지지배. 진작 얘기하지. 그러니까 미래 제부가 곤경에 처했다는 거잖아.”

하지만 의진의 예상과 달리 정해진은 적극을 넘어 태경을 가족으로 묶고 있었다.

“오버 좀 하지 마.”

“그건 좀 힘들고. 이 언니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그치?”

“무슨 제부야. 그런 거 아니야.”

“됐고. 재판까지 갈 것도 없어. 언니가 알아서 할게. 넌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부모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그래. 걱정 마. 누구든지 우리 가족을 건드리면 아주 주옥되는 거야.”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의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머릿속의 태경은 미래 제부로 낙인찍혔다.

“참. 근데 우리 제부 사진 좀 볼 수 있니?”

“사진 없어.”

“두 사람 손은 잡았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못 잡았구나. 저런 쯧쯧! 적극적으로 나가.”

* * *

“읍!!”

“저 남자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게 좀 그렇긴 하네.”

접수처 직원들은 수건을 물고 일정하게 소리를 내는 남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최 팀장님 부를까요?”

“아니야. 아직 소란 피운 것도 아니고 앉아 있는데 일단 더 지켜보자고.”

“우욱!”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예상보다 길어진 대기시간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우윽으읍!”

수건을 입에 물고 거친 욕설을 삼키던 그는 더 이상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건을 힘껏 물고 있느라 턱에 힘은 점점 빠지고 수건은 타액으로 흠뻑 젖어 침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읍!”

남자는 입고 있던 상의로 의자 다리에 떨어진 자신의 침을 황급히 닦고 걸음을 옮겼다.

‘안 되겠다. 잠깐 나가 있자.’

애타는 마음을 속으로 속삭인 남자가 이제 막 정문 계단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의사 하나 만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아!”

고개를 돌려 뒷사람과 이야기를 하며 올라오던 여자가 남자를 보지 못하고 부딪혔다.

그 순간 수건이 여자의 하이힐에 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답답한 수건이 떨어진 남자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악! 시발x아!!”

“어머! 이게 뭐야.”

질퍽한 수건이 발등에 닿자 여자는 기겁하며 땅에 떨어뜨려 발로 밞았다.

남자는 재빨리 떨어진 수건을 집어 입에 물려 했지만, 흙과 먼지가 묻은 수건 때문에 멈칫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또다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악! 개같xx! 으악!”

“이봐! 당신.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욕설을 들은 여자는 이내 분노하며 남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죄송……악! 죄, 시x. 악!”

남자는 죄송이라는 단어를 말하려 했지만 자꾸만 터지는 욕설 때문에 힘들었다.

“그게 악! 아니고……시x. 악! 아니고.”

“하! 참.”

실소를 터트리며 선글라스를 벗은 여자의 정체는 김서현이였다.

“별 그지 같은 의사 놈 때문에 그지 같은 일만 생기네. 딱 봐도 어린 거 같은데 얘? 너 사과 안 할 거니?”

“죄ㅅ……으악 시발아!”

김서현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남자는 급기야 왼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우겨넣었다.

“우웁!”

새어나오는 욕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수첩과 볼펜을 꺼내 바닥에 엎드려 황급히 글자를 적고 일어났다.

-욕을 듣게 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욕을 하고 있습니다. 불쾌감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우윽!!”

“얘 지금 뭐라는 거야? 너 술 먹었니?”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안 되겠다 싶은 남자가 무언가를 급히 적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탁-

김서현이 수첩을 손으로 뺏어 던지고 계속해서 사과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너 나랑 장난해? 그리고 이 구두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더럽게 침 냄새는 왜 이렇게 나는 거야? 빨리 사과 안 해!”

“우읍! 우읍!”

왼손 밖으로 침이 흘러내리고 남자는 고개를 숙였지만 김서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게 진짜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너 진짜 혼나 볼래?”

여전히 불쾌감이 식지 않은 김서현이 손바닥으로 고개 숙인 남자의 뒤통수를 기분 나쁘게 쳐 댔다.

“얘, 머리 더 깊게 숙여서 제대로 사과해.”

그리고 검지로 남자의 이마를 콕콕 찌르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쳐 대며 점점 더 강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허공에 멈춘 손바닥에 김서현이 힘을 실었다.

“우읍!”

남자가 욕을 삼키며 왼손을 입에 문 채 눈을 감은 그때였다.

“내 환자한테 뭐 하는 짓이야!”

우레와 같은 호통이 김서현의 고막에 때려 박혔다. 김서현에게 호통을 친 사람은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이었다.

“그 손 당장 치워!”

태경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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