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67화 (67/472)

67화. 대통령이 온다 해도

워낙 큰 소리에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던 이찬희와 최모나가 동시에 입구를 쳐다봤다.

“수 쌤. 방금 선생님 목소리 아니었어요?”

“제가 가 볼게요.”

역시나 호통 친 소리를 들은 임정숙 간호사가 응급실을 나와 접수처 직원에게 다가갔다.

“수 쌤 마침 잘 오셨어요.”

“무슨 일이야? 방금 김 선생님 목소리 맞지? 소리치신 거 같은데.”

“맞아요. 저기 김 선생님 옆에 두 사람 보이시죠?”

직원은 노란 투피스에 한껏 멋을 낸 김서현과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 남자를 번갈아 가리켰다.

“저 젊은 남자가 40분 전에 접수했고 노란 옷 입은 여자가 10분 뒤에 와서 김 선생님 보러 왔다면서 접수하고 밖에 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직원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남자가 욕을 하긴 했는데 사과를 했고,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때리려고 하자 선생님이 소리를 치셨다는 거네.”

“근데 저 여자 보통이 아닌 거 같아요.”

“뭔 소리야?”

“입은 옷은 죄다 고가의 명품인데 하는 행동은 뭐랄까 갑질이 몸에 밴 사람 같다고 할까요?”

접수처 직원은 김서현의 사람 됨됨이를 바로 알아봤다.

“그리고 수 쌤,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낯이 익다고?”

“네. TV에서 봤나?”

직원의 말에 임정숙 간호사가 천천히 태경 쪽으로 이동하며 여자를 주시했다.

* * *

“내 환자한테 뭐 하는 짓이야!”

우레와 같은 호통이 김서현의 고막에 때려 박혔다. 김서현에게 호통을 친 사람은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이었다.

“그 손 당장 치워!”

태경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소리쳤다.

“뭐야?”

김서현은 호통의 주인공이 병원 안에서 걸어 나오는 태경임을 확인했다.

“접수한 지 40분 만에 나오네.”

“그 손 빨리 내려놓지 못합니까?”

“아, 이 손? 왜 그래야 하는데?”

“그 사람 환자입니다. 그쪽한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뭐, 환자?”

태경의 ‘환자’라는 말에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자의 시선은 태경을 향했다.

“그래요. 김서현 씨한테 욕을 한 것도 일부러 한 게 아닙니다.”

“하! 이래서 의사도 잘 만나야 돼. 그러니까 당신이 근본도 없는 의사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입에 걸레를 물고 욕을 하는 게 병 때문이라고? 어디서 약을 팔아?”

자신에게 욕을 하는 남자를 두둔하는 태경의 태도가 김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든 상관없지만 내 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못 참습니다.”

“웃기고 있네.”

“고윤기 환자분?”

김서현이 콧방귀를 끼는 사이 태경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죠? 응급 환자를 보느라 좀 길어졌네요.”

“우읍!”

“괜찮으니까 손 내려도 돼.”

“아, 아니……시x. 악!”

태경은 고윤기의 입을 결박하고 있는 왼손을 그의 입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접수처에서 가져온 티슈로 흥건하게 묻은 침을 닦아줬다.

“개x끼…… 악! 괜찮…… x발! 악!”

화들짝 놀란 고윤기가 말렸지만 태경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대했다.

“야! 너 어디 가?”

그때 김서현이 태경과 함께 진료실로 향하는 고윤기의 어깨를 잡은 후 돌려세웠다.

“이러지 마세요.”

옆에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야, 너 나한테 욕한 거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할 거야.”

“김서현 씨, 그만하시죠?”

태경이 정색하며 김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임 선생님, 환자분과 함께 진료실 먼저 가 있으세요.”

“네, 선생님.”

“가긴 어딜 가! 누구 마음대로 가? 당신 저리 비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김서현이 태경을 밀치며 고윤기를 향해 소리치던 그때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발에 허리가 살짝 굽은 노인이 병원으로 뛰어 들어오며 냅다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 손자가 병이 있습니다. 일부러 욕을 한 거 아니니 부디 오해를 풀어 주세요. 죄송합니다.”

노인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두 손을 모아 사과를 전했다.

“이보세요.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죠. 할아버지도 손주 그 따위로 교육하시면 안 되죠. 애가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네네, 다 제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손주가 아파서 그런 거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세요.”

“보호자분. 어서 일어나세요. 임 선생님?”

“네, 선생님.”

“환자와 보호자 모시고 진료실로 가세요.”

“알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이봐요. 김서현 씨!”

또다시 김서현이 막아서려 하자 인내심이 극에 다른 태경이 김서현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단호하게 외쳤다.

“더 이상 내 환자와 보호자에게 함부로 하지 마.”

그 눈매가 어찌나 매섭던지 지금까지 불도저처럼 달려들던 김서현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뭐, 뭐라고?”

“그리고 사과는 저 환자분이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하는 거야. 내 병원에서 소동 피우지 말고 썩 나가.”

“나, 나가라고? 지금 그 말 나한테…….”

“서현아, 그만해라.”

김서현이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따지려는 찰나 김건형이 경호팀장과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 차에서 기다리시라니까 뭐하려고 이런 후진 곳에 들어오셨어요.”

“야, 이 녀석아. 진료를 보려면 병원으로 들어와야 할 것 아니냐.”

생각지도 못한 김건형의 등장에 태경을 비롯한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사무실에서 튀어나온 최 팀장부터 진료실로 향하던 임정숙과 환자, 보호자까지 모두 걸음을 멈췄다.

“세상에. 팀장님 저분 누가그룹 총수 아니에요?”

“마, 맞는 것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맞아요. 얼마 전에 아프다는 말 있었는데 아닌가? 근데 이 시간에 그것도 왜 우리병원에 왔을까요?”

“그러게. 저 유명한 회장님이 우리 병원에 왜 왔을까. 거 참 신기하네.”

갸웃했던 김서현과 달리 사람들은 김건형을 바로 알아봤다.

수술을 받은 김건형은 병원장과 주치의에게 회사 일을 한다는 명목하에 하루 동안 외출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의 목적지는 회사가 아니었고 태경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굳이 이 야심한 시간에 온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김건형은 김서현과 함께 도착했지만 대기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소리에 지금까지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김태경 선생, 나 김건형이요.”

“알고 있습니다.”

태경은 김건형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연한 암모니아 냄새다.’

약한 2단계 냄새로 김건형이 수술도 잘되고 회복도 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전 마주했던 모습과 달리 혈색이 아주 좋아 보였다.

“내가 이 시간에 왜 여기를 왔는지 알고 있나?”

“절 만나러 온 거라 생각합니다.”

“맞네. 그나저나 진료는 언제 볼 수 있는 건가?”

“기다리셔야 합니다.”

자신의 순서를 묻는 김건형에게 태경은 기다리라고 전했다. 그러자 잠잠했던 김서현이 칼춤에 또 시동을 걸려 했다.

“지금 우리 아빠한테 쌍욕한 사람을 먼저 진료하겠다는 거야?”

“저기 선생님, 저희가 더 기다릴 테니 저분들 먼저 진료 봐 주셔도 됩니다.”

뒤를 돌아 입을 막고 있는 손자의 등을 어루만지던 노인이 양보를 권했지만 태경은 단호했다.

“아닙니다. 보호자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할아버지가 된다잖아.”

“내가 안 됩니다.”

“그럼 고작 저 욕하는 어린놈 하나 때문에 우리보고 더 기다리라는 소리야? 미쳤어.”

”어허! 서현아 목소리 좀 낮추고 그만해라. 이봐, 김 선생. 내가 아까부터 40분째 기다리고 있는데 늙은이 좀 먼저 보면 안 되겠나?”

“예, 안 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김건형의 포스는 실로 대단했다.

그 당당한 아우라가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도, 안 된다는 거절을 들은 적도 없었다.

감히 그런 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경의 견고한 단호함이 김건형을 살짝 당혹케 만들었다.

“저기……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접수처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최 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회장님부터 진료 보시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공사다망한 분이시니 그게 좋을 것 같은데요.”

세계 재계에서 뛰어노는 거물이 우리병원에 진료를 보러 오질 않았나.

이걸로 입소문을 잘 내면 지금보다 환자들이 몇 배는 더 뛸 거라 생각했다. 환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병원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최 팀장은 더 이상 김건형의 심기가 상하지 않도록 태경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환자분도 보호자분도 동의하셨으니 괜찮을 거 같은데요.”

“팀장님, 그럴 수 없습니다.”

“김 선생, 나는 시간이 돈인 사람일세. 그런데 병원 복도에 내 피 같은 소중한 돈이 낭비되고 있지 않나.”

“회장님의 시간은 돈일지 모르지만 환자들의 시간은 목숨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 회장님의 시간만 소중한 건 아닙니다.”

태경의 사이다 발언을 지켜보던 직원들 후련한 표정을 보였고 최 팀장은 민망해했다.

“아빠,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데 별 그지 같은 의사 때문에 시간 버리지 말고 오늘은 그냥 가세요.”

붉으락푸르락하는 김서현의 뒤로 김건형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넌 가만있어. 끝까지 안 된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아니라 대통령이 온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태경의 눈에는 김건형 또한 재벌 거물이 아닌 보통의 환자였다.

“제 병원에서는 응급 환자가 아닌 이상 무조건 순서대로 진료하는 게 원칙입니다.”

“자네 사람이 참 대쪽 같은 성질이 있네.”

“기다리셨다 순서대로 진료를 보시든 지금 가시든 그건 회장님의 자유입니다. 고윤기 환자분 들어가시죠.”

“잠깐!”

김건형은 이제 막 진료실로 들어가려는 태경을 급히 불러 세웠다.

“김 선생이 아까 분명 저 젊은 친구의 욕설이 일부러 한 게 아니라고 했어. 맞나?”

“맞습니다.”

“솔직히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는데, 거짓말이 아니라면 저 친구가 무슨 병명으로 욕을 해 대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저럴 줄 알았어. 저 의사 근본이 없다니까. 욕하는 게 병 때문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진짜면 내가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사과한다.”

“의사는 환자의 의료 정보를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않습니다.”

“서, 선생……악! 시x!”

그때 지금까지 진료실 문 쪽에서 입을 막고 서 있던 고윤기가 태경에게 다가왔다. 그는 터져 나오는 욕설에 다시금 입을 막고 급히 수첩을 꺼냈다.

-선생님은 제 병명 알고 계시죠?

고윤기가 적은 내용을 보고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에게 알려 주셔도 돼요. 저들의 반응이 당연한 반응이에요. 말하지 않으면 저는 계속 정신 나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예요. 이유 없이 욕을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보호자분도 괜찮으시겠어요?”

“윤기가 괜찮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정말 괜찮아요.

고윤기와 대화를 끝낸 태경은 다시 김건형에게 다가갔다.

“왜 저 친구가 험한 말을 했는지 물으셨죠?”

“그랬네. 사람이 병으로 인해 예민해지고 힘들어서 욕을 할 수 있지만, 병 때문에 욕설을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의사인 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속에 있는 병을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뭔가, 저 친구의 병명이?”

“Tourette Syndrom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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