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71화 (71/472)

71화. 메디컬 수송기

“나머지 하나는 메디컬 수송기입니다.”

“메디컬 수송기?”

지금까지 동요 없던 김건형의 동공이 크게 반응했다.

“회장님이 소유하고 계신 의료용 비행기의 사용권입니다.”

Medical Transportation plane.

기존 에어 앰뷸런스와는 다른 김건형 소유의 최첨단 의료용 비행기였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 라는 말의 표본이 바로 이 메디컬 수송기였다.

메디컬 수송기는 소위 하늘 위의 종합병원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다.

누가그룹의 그 대단한 의료용 헬기조차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실제로 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실제로 메디컬 수송기 한 대만 있으면 세계 오지를 가서도 진료와 수술이 가능했다.

차량 설계부터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수술 기기까지 전부 미국과 독일에서 맞춤으로 7년 동안 만든, 세계 단 한 대뿐인 어마어마한 비행기였다.

일례로 김건형이 미국에서 메디컬 수송기의 완공식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김 회장, 그러지 말고 이 물건 나한테 넘겨. 내가 비싸게 살게.’

‘누구한테 팔려고 만든 물건이 아니야. 헛소리하지 말게.’

그와 친분이 있는 미국 존슨 종합병원 재단 이사장이 다섯 배의 값을 주겠다고 팔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병원과 의료 사업에 나름대로 철학이 있는 김건형은 단칼에 거절했다고 전해졌다.

워낙 의료계에서 화제가 됐던 일이라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메디컬 수송기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고 팀장 자네 말대로 이 친구 이거 아주 보통이 아니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장난이 아니라고 했죠.”

“나한테 수송기 사용권을 달라?”

“네, 제가 원할 시 1회 사용권을 허락해 주시면 됩니다.”

“자네, 그거 한 벌 굴리는 데 드는 유지비가 얼마인지 알고 있어?”

“당연히 모릅니다.”

“하하하!!”

너무나 당당하게 모른다고 답하는 태경의 말에 김건형은 진료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허락이 떨어졌다.

“좋아! 내 허락하지.”

그 유지비가 몇십억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메디컬 수송기의 사용을 승인한 것이다. 그것도 태경이 원할 때 언제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약속하겠네.”

원하는 걸 다 말하라고 했지만 설마 메디컬 수송기를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자신 있게 말하는 태경의 배포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나 김건형이야. 한 입 갖고 두말하는 정치인들하고는 달라. 대신 김 선생도 내가 원할 시 부탁을 들어주면 좋겠는데.”

“어떤 부탁입니까?”

“그거야 부탁이 생겨야 알지. 지금은 나도 몰라.”

“알겠습니다. 저도 약속드리죠.”

“좋아. 그럼 정리가 다 된 것 같으니……. 고 팀장?”

“네, 회장님.”

“이만 가자고. 입원실 너무 오래 비우면 병원장이랑 주치의한테 안 좋은 소리 듣지 않겠나.”

“그런 말 신경도 안 쓰시면서 괜히 그러십니다.”

“이제 신경 좀 쓰려고. 아무튼 김 선생과 정 선생, 날 살려 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볼일 있으면 보자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태경과 의진은 진료실을 나가는 김건형을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차! 그리고 김 선생 아직 하나 남았어.”

할 말을 깜빡했던 김건형이 가던 길을 멈추고 태경에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걸 세 가지라고 했는데 두 가지만 말했으니 아직 하나 남았네.”

“아닙니다. 처음부터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거 더 없습니다.”

“나머지 하나쯤은 김 선생 본인을 위한 걸로 해야지. 소원 하나 킵 해 둔다고 생각해. 잘 있어.”

김건형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본 뒤 병원을 떠났다.

“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네요.”

“김건형 회장님?”

“네, 처음 병원에 왔을 땐 누가 봐도 따지러 온 사람같이 삐딱선 타는 게 그저 그런 재벌인가 보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목숨 빚졌다면서 화끈하게 고마워하는 거 보면 확실히 난사람은 난사람이가 싶기도 한 거 같아요.”

“그렇지. 저 사람의 위치가 대단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난사람은 확실하지.”

“맞다! 근데 선배, 비행기 사용권은 왜 달라고 했어요?”

의진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메디컬 수송기에 대해 물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 계획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아무 것도 없어.”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말하길래 의진은 태경이 무슨 원대한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했어요.”

“가정법!”

“가정법이요?”

“응. 혹시 언젠가 환자를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 말 한 거야.”

“그게 뭐예요? 난 무슨 원대한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요.”

“실은 나도 허락할 줄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하나 정도는 말할 걸 그랬나 봐요.”

“후회해?”

“아니 후회까지는……네, 사실 완전 후회해요. 회장님한테 다시 한번 부탁해 볼까요?”

“그건 힘들 거 같은데.”

“그렇겠죠? 에이 아까워라.”

“그렇게 아까우면 킵 한 소원 양도해 줄까?”

“됐거든요.”

야구장 사건이 잘 마무리된 태경과 의진은 웃음꽃을 피우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 * *

“최 선생 보고서 잘 봤어.”

환자 진료를 본 태경은 스테이션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최모나에게 다가갔다.

“학회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유익했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보고서를 아주 잘 썼던데?”

“저도 쓰면서 다시 복습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환자 관련 모니터를 보며 대화하던 최모나는 대뜸 일어나서 사과를 전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고 그래.”

“그게……이 선생과 너무 대책 없이 먹다 보니 밥값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날 바로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무슨 소리야. 그게 왜 죄송해. 잘 먹었으면 됐어. 신경 쓰지 마. 그건 그렇고 최 선생 지금 바쁜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얼른 병동 한 번 돌고 와.”

“예? 오늘도 돌아야 합니까?”

“아니. 오늘도 내일도 쭉 돌아야지.”

“정말 너무하십니다.”

태경의 말에 최모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 환자와 아동 환자를 보는 것도 모자라서 잠깐 쉬는 시간에 병동까지 돌게 하시는 건 너무 과합니다.”

“의사가 학생이야? 쉬는 시간이 있게?”

“…….”

“그리고 병동 한 바퀴 순회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힘들지도 않은데 과한 줄 몰랐네. 그렇다면 안 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긴 한데…….”

“그게 뭡니까? 방법을 알려 주시면 그걸 하겠습니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데. 어떻게 좀 환자의 마음이 이해가 됐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뭡니까?”

“환자에게 불만 카드가 아닌 감사 카드 받는 것. 어때? 꽤 쉽지?”

“전혀 쉽지 않습니다.”

“그럼 뭐 별수 있나? 얼른 회진 가야지. 안 갈 거야?”

“갑니다.”

태경의 으름장에 최모나는 어쩔 수 없이 병동으로 향했다.

“그래도 전 최 쌤이 기특하네요.”

업무를 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슥 다가와 물었다.

“기특해요?”

“그럼요. 그렇게 하기 싫어하면서도 그래도 꿋꿋하게 하잖아요. 난 처음에 최 쌤 도망가면 어쩌나 맘 졸였다니까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세요?”

“군인 집안이잖아요.”

“도망가지 않는 거랑 군인 집안인 게 연관이 있나요?”

“있죠. 상당한 연관이 있답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후배 의사들은 본 태경이었다. 그 때문에 단 며칠만 일해도 어떻게 일을 할지 어떤 사고를 칠지 머릿속에 그림이 대충 그려질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최모나는 도망가는 사고를 칠 위인은 아니었다. 군인 집안 그 특유의 뚝심과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할 게 분명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콘크리트 벽이 과연 무너질까요?”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좋은 말인데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쩌면 이미 젖고 있는데 아직 최 선생이 느끼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럼 최 쌤이 느끼는 순간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게 언제일까요?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글쎄요.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더 나중일 수도 있겠죠.”

태경과 임정숙 간호사는 최모나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대화를 이어 갔다.

* * *

“메디컬 수송기라니. 하하하!”

병실에 도착한 김건형은 아까부터 계속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자꾸 헛웃음이 나.”

“제가 보기에는 헛웃음이 아니라 재미있어 웃는 걸로 보입니다.”

“인물이야. 인물.”

“김 선생 말씀이시군요.”

“낭중지추(囊中之錐)야.”

지금 김건형의 머릿속엔 온통 태경 생각뿐이었다.

CCTV를 볼 때는 긴가민가했고 비서들이 올린 자료를 보고는 머리가 타고 났구나 했다. 그런데 실제로 태경을 만난 순간 그 비범함과 범상치 않음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고 팀장?”

“네, 회장님.”

“김태경이 손 봤나?”

“아니요. 못 봤습니다.”

“수술을 아주 숱하게 한 손이야. 메스랑 보비(전기칼)를 자주 잡는 곳에 굳은살과 자국이 가득하더군. 그것도 양손에 말이야. 진짜 닮았어.”

“형님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난다 긴다 하는 의사들을 봐도 단 한 번도 형님 생각이 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김태경이를 보는데 형님이 떠오르더라고.”

김건형은 오래전 갑자기 연락이 끊긴 친형을 떠올렸다.

“사실 난 이 병원도 내 거라 생각하지 않아. 구태여 따지면 우리 형님 거지 내 거는 아니야.”

“그럼 찾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못 찾을 리 없으실 텐데요.”

“됐어! 이름까지 바꿔서 사라진 노인네를 뭐하려고 찾아. 내가 왜!”

“그리워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평생 환자랑 병원에 미친 고지식한 노인네가 뭐가 그립다고…….”

“제가 한 번 찾아볼까요?”

“찾지 마.”

경호팀장의 말에 김건형은 단호했다.

“그나저나 자네 시골 안 내려가도 되겠어.”

“김 선생이 아까운 소원 하나 날린 거죠. 회장님께서 저 자르실 생각 없던 거 알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자네는 생긴 건 곰인데 속은 여우야. 나 좀 누울 테니 이만 가서 일 봐.”

“네, 회장님. 쉬세요.”

* * *

최모나는 평소보다 더 시니컬한 표정으로 병동에 들어섰다.

“최 선생님 오늘도 오셨네요?”

“네. 당분간은 계속 올 것 같습니다.”

원래는 새벽에 응급실이 그나마 숨 돌릴 타이밍이 생길 때 태경이 한 번씩 병동을 돌아보곤 했었다.

그 말인 즉 새벽 회진은 누구의 일이 아닌 태경의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모나가 하게 된 건 역시나 태경의 지시 때문이었다.

회진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하는 일에 마음이 쓰일 리가 없었다.

‘빨리 돌고 내려가자.’

최모나는 어제처럼 빨리 끝내고 내려갈 생각뿐이었다.

드르륵-

201호부터 차례대로 병실 문을 열고 환자들에게 별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2층 병동을 끝내고 3층 병동 역시 확인을 마쳤다.

“선생님, 307호 구철호 환자 BP(blood pressure, 혈압)랑 레이트 (pulse rate, 맥박수) 기록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여기 있습니다.”

최모나는 병동 담당 간호사가 건넨 자료를 확인하며 기록 옆에 사인을 남겼다.

“염려했는데 괜찮아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근데 회진 확인 사인 꼭 하셔야 하는 거예요?”

“김 선생님이 꼭 간호사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원장님이 그러신 거면 어쩔 수 없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최 쌤도 수고하세요.”

전용 회진일지에 사인을 마친 최모나는 내려가려던 발길을 복도 끝으로 돌렸다.

“충전하자.”

떨어진 당을 충전하기 위해 음료 자판기 앞에 멈추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러더니 아이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뽀로롱 음료수 사과 맛 버튼을 눌렀다.

“완벽해.”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지렁이 젤리와 뽀로롱 음료수를 본 최모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새콤달콤한 젤리를 입에 넣고 뽀로롱 음료를 마시면 쌓인 스트레스가 한 방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보는 사람 없겠지?”

가장 좋아하는 간식 레시피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린 아이들 음료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절대 먹지 않았다.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먹냐? 하여간 지렁이에 뽀로롱에 애다. 애야.’

특히나 이찬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눈만 마주치면 실없이 놀릴 게 뻔했다.

“오늘 따라 지렁이가 실하네.”

지렁이 젤리 한 개를 입에 넣은 최모나가 음료수를 막 먹으려던 그때였다.

“엄마…….”

갑자기 들려온 엄마 소리가 뽀로롱을 잡은 손에 제동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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