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포르말린과 유x?
“키야! 역시 우리 와이프 음식 솜씨는 죽인다니까.”
집에 들어온 이고철은 푸엉이 차려놓은 밥상을 감탄하며 먹고 있었다.
“특히 이 쌀국수는 당장 팔아도 될 만큼 맛있어. 그리고 이 불고기도 아주 끝내줘.”
“천천히. 당신 체한다. 천천히 먹어.”
“이 사람아 나 감기도 한 번 안 걸린 사람이야. 근데 당신 홑몸도 아닌데 힘들게 음식을 했어.”
“하나도 안 힘들어. 우리 신랑 먹는 밥인데 왜 힘들겠어. 즐거워.”
“내가 나가서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지.”
“우리 이제 엄마 아빠야. 돈 아껴야 해.”
“당신은 돈 걱정하지 말고 우리 깐담이랑 마음 편하게 있어. 간만에 진짜 잘 먹었다.”
고봉밥을 순식간에 비운 이고철은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켜며 미리 씻어 놓은 포도를 푸엉에게 건넸다.
“당신 좋아하는 샤인머스캣이야. 아주 달아. 어서 먹어.”
“남편아? 갈 거지?”
“깐담아 엄마 또 시작이다.”
이고철은 푸엉의 배를 쓰다듬으며 포도 한 개를 그녀의 입속에 넣었다.
“어때 맛있지? 끝내주게 달지? 과일 집 사장님이 당신 임신했다고 선물로 주셨어.”
“…….”
“뭐, 뭐야! 당신 왜 울려고 해!”
푸엉은 그토록 좋아하는 포도를 씹지도 않고 뱉으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표정이 안 좋았다.
“남편아 나 너무 속상하다. 약속도 안 지키고 내 말 듣지도 않고 너무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홑몸도 아닌데 괜한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홑몸이 아니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 다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
“나 건강하다니까 그러네.”
이고철은 요즘 자꾸만 건강 관련 잔소리가 늘은 푸엉이 이상했다.
“나 슈퍼맨이잖아. 슈퍼맨은 안 아파.”
“무슨 슈퍼맨이 약속도 안 지켜! 남편 너 거짓말쟁이다.”
“알았어. 갈게. 가자. 병원 갈게.”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결국 이고철은 백기를 들었다. 홑몸도 아닌 아내를 계속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근데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 당신 내가 감기 걸리는 거 봤어?”
“못 봤지.”
“그럼 왜 그렇게 병원을 가자고 조른 거야.”
“이거! 난 이게 싫어.”
푸엉은 손가락으로 이고철의 어깨를 가리켰다.
“어깨?”
“응. 어깨가 계속 신경 쓰인다.”
* * *
“선생님!”
진료실에서 나온 태경은 정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르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김 선생, 오랜만이야.”
태경 못지않게 반가움을 드러낸 상대는 신화대 마취과 이동훈이었다.
“내가 너무 급하게 연락했지? 미안해.”
“무슨 말이세요. 아직 진료 전이라 여유 있어서 괜찮아요.”
한 시간 전,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던 이동훈에게 급히 연락이 왔었다. 오프 날이 변경됐는데 병원으로 갈 테니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아침 식사 후 잠이 오지 않아 진료 준비를 하고 있던 태경도 마침 시간이 맞아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여기가 우리 김 선생 진료실이야?”
“네. 신화대에 비하면 병원이 아담하죠?”
“아담하긴. 전혀 아닌데.”
이동훈은 태경이 건넨 비타민 음료를 받으며 손을 흔들었다.
“실제로 와 보니까 동네 병원치고는 규모가 꽤 있네. 그보다 병원이 생기 있고 분위기도 좋은데?”
“우리병원이 분위기가 좋긴 한 거 같아요.”
“왜 병원마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뭔가 쳐진 느낌이랄까 그런 게 없어.”
이동훈은 그동안 태경이 어떻게 지냈는지 새로운 병원 생활은 어떤지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온 진짜 목적을 꺼냈다.
“김 선생. 내가 전화로 한 이야기 어떻게 생각 좀 해 봤어?”
“교수 건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솔직히 이 선생님 전화 받고 좀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갑자기 이제 와서 왜 그럴까 싶더라고요.”
“왜 아니야. 나 같아도 그런 생각하고도 남지. 내가 통화 끝나고 남긴 카톡 봤지?”
이동훈은 태경과 통화한 뒤 현재 신화대병원이 처한 상황을 메시지로 남겼었다.
“기존 환자는 물론이고 새로 온 신환까지 자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 의료진도 자네의 빈자리가 절실하고.”
“신화대에도 훌륭한 선생님들 많이 있잖아요.”
“하지만 자네처럼 출중한 실력과 인성을 다 갖춘 의사는 없잖아. 김 선생?”
이동훈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칫하며 이 과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태경을 교수로 설득만 시켜 준다면 분원 원장 자리를 책임지고 드리겠습니다.’
순간 태경에게 교수 자리를 수락하면 자신도 분원 원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는 태경이지 않은가. 분명 저 얘길 하면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알짜배기인 분원 원장은 상당히 메리트가 있는 자리였기에 이동훈은 간절했다.
“원장님이 김 선생 교수 자리를 수락만 한다면 개인 연구비까지 매년 아낌없이 지원한다고 하셨어.”
“아, 그래요? 엄청나긴 하네요.”
“그렇지? 그리고 우리끼리 말이지 자네 실력에 이런 곳에서 있기는 아깝잖아.”
“…….”
“가자. 김 선생. 응?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신화대병원이면 메이저 중에 넘버 투야.”
“신화대병원이 대단한 병원인 거 저도 알죠.”
“그 위에 새희망병원 말고는 다 신화대병원 밑이라고.”
태경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이동훈은 결심한 듯 진지한 분위기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그 후 한참 동안 태경과 대화를 이어 가던 이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선생 지금 한 결정에 번복은 없는 거지?”
“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없습니다. 제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드렸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여기 온 보람도 있고 솔직히 아주 만족해.”
“다행입니다.”
“가 볼게. 나오지 마. 다음에 술 한잔하자고.”
이동훈은 처음 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태경과 인사를 나누며 우리병원을 나왔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선생님, 말씀하신 오늘 외래 예약 리스트입니다.”
이동훈이 가고 진료 준비를 서두른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가 건넨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다.
“오늘 예약이 좀 많네요.”
“아마. 여기 인근 상점들이 정기 휴일이라서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좀 일찍 시작해도……!”
무심코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던 태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해졌다.
[예약자: 이고철]
예약자 명단에 결코 반갑지 않은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고철 씨 혹시 그 베트남 사람인 푸엉 씨 남편분인가요?”
“네, 맞아요.”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확인했지만 역시나였다.
지금도 그때 그 냄새를 기억하는 태경은 아직까지도 종종 이고철을 생각하곤 했었다. 더군다나 며칠 전 병원 로비에서 푸엉을 마주쳤기에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 참 대단하세요. 하루에 환자를 그렇게 많이 보시면서 다 기억하시는 거 보면 제가 속으로 많이 놀란다니까요.”
“선생님?”
평소 같으면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농담을 주고받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고철 씨 어디가 불편해서 오는 건지 아세요?”
‘이고철’이란 이름을 본 뒤로 머릿속에 먹구름이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글쎄요. 푸엉 씨가 전화로 예약할 때 데스크 영이 씨가 물어봤더니 그냥 진료 예약만 잡아 달라고 그랬대요.”
“아, 네…….”
푸엉이 한국말이 유창하진 않아도 아프냐는 말을 모를 리 없었다. 뭔가 애매한 답변이다.
“이고철 씨 오면 다른 환자 순서 상관없이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먼저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외래 시작해도 될까요?”
“그래요. 환자 들여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기영 씨,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염려와 불안감을 안은 채 태경은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 * *
“여보? 당신은 어느 게 마음에 들어?”
“난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필요 없다.”
“에이. 우리 깐담이가 신을 건데 왜 필요 없어.”
병원에 가겠다던 이고철은 푸엉과 함께 마트 안에 있는 아동 코너에 있었다.
“손님,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거 보여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지금 우리 와이프가 저한테 삐져서 그래요.”
“임신하면 감정 때문에 힘들어지는데 남편분이 더 잘해 주세요.”
“예, 그래야죠. 여기, 분홍색이랑 하늘색 두 개 다 주세요.”
“혹시 쌍둥이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직 성별을 몰라서요.”
“그러시구나. 가끔 손님처럼 두 가지 다 구입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앙증맞고 귀여운 아기 신발을 두 개나 구입했지만 푸엉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영수증도 함께 넣었고요, 건강하게 순산하시고 예쁘게 신기세요.”
“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여보? 여보?”
이고철은 잔뜩 볼멘 표정을 짓고 앞서 걸어가는 푸엉에게 다가갔다.
“왜 마음에 안 들어?”
“…….”
“당신 좋아하는 치킨 먹으러 갈까?”
“됐다. 당신이나 많이 먹어.”
“그럼 당신 옷 보러 가자. 왜 저번에 당신 원피스 찜해 둔 거 있다고 했잖아.”
“…….”
“푸엉? 화났어?”
“화 조금 났다. 내 말 하나도 듣지 않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너무 속상하다.”
“안 그래도 지금 병원 가려고 했어.”
“또 거짓말하지 마. 남편 말 안 믿어.”
“아니, 진짜야. 나는 당신이랑 쇼핑도 한 다음에 병원 가려고 했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방 공사장을 돌고 오랜만에 집으로 온 이고철이었다. 그동안 아내가 집에만 있던 게 미안해서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병원을 가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 깐담이 엄마 기분 풀어 주려면 빨리 병원부터 가야겠네.”
“그래. 빨리 가자. 예약 시간 벌써 지났다. 택시?”
그제야 기분이 풀어진 푸엉은 대로변으로 다가가 택시를 잡았다.
* * *
“현재 오른쪽에 있는 건 물혹이에요. 많이 들어 보셨죠?”
“네, 선생님.”
“0.4mm 하나 있고 여기 보시면 경계도 아주 뚜렷하고 지금은 경과만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니까 6개월 뒤에 한 번 다시 볼게요.”
“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오늘따라 외래 시작부터 환자가 계속 들어왔다. 대부분의 의사는 수술보다 병동보다 외래를 더 힘들어 한다. 그건 태경도 비슷했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늘 예약은 끝난 건가? 아!”
정신없이 외래에 파묻혀 있던 태경은 그제야 푸엉의 남편이 생각났다.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오늘따라 검사할 환자가 많고 진단을 내려야 하는 환자도 많았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철컥-
“선생님?”
벌써 훌쩍 지난 예약 시간에 안 되겠다 싶은 태경이 진료실을 나와 접수처로 향했다.
“혹시 푸엉 씨 나 그 남편분한테 연락 온 거 없었나요? 예약 시간이 넘어서요.”
“안 그래도 아까 연락 왔는데 조금 늦을 거 같다고 하네요.”
“병동 갔다 올 테니까 그사이에 오면 바로 콜 해 주세요.”
“선생님, 이고철 씨가 각별하신 가 봐요?”
태경은 환자를 워낙 잘 챙기고 환자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의사였다. 임정숙 간호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뭔가 좀 달랐다.
왜 그렇게 이고철 환자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각별하다면 각별하죠. 아니 각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네?”
“아니에요. 저 병동 갑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네, 안녕하세요.”
병동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마주친 환자에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태경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랑 우리 남편 아빠 엄마 된다. 나, 임신했다.’
부모가 됐다는 푸엉의 말이 떠오르며 점점 더 이고철과 그날의 냄새를 떠올리던 그때였다.
‘그때 다섯 번째 바이탈이…….’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임정숙 간호사가 이고철의 도착을 알렸지만 태경의 몸은 이미 다시 1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
임정숙의 말보다도 빠른 다섯 번째 바이탈이 이고철의 등장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포르말린과 유황?’
4단계의 주범인 포르말린 냄새 속에 묘하게 이질적인 유황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유황인 거 같은데.’
이고철에게서 미세하지만 분명 유황 냄새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