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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77화 (76/472)

77화. 최모나 사용설명서

태경이 이고철 환자의 수술 준비로 자리를 비운 사이, 응급실은 이찬희와 최모나가 사수하고 있었다.

“4번 베드 환자 X-ray 나오면 알려 주세요.”

“네, 이 쌤 그리고 영천과일 할아버지께서 소화제 좀 세 달치 처방해 달라고 하시거든요.”

“아이고 할아버님 또 그러시네.”

“어제도 그제도 오셔 갖고 접수처에서 진료는 안 보시고 처방만 해 달라고 그러시는데 좀 난감하네요.”

“춘배 할아버지가 소화제를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맹신하셔서 그래요.”

“소화제를요?”

“네, 진료 꼭 봐야 하고 할머님 허락 받고 오셔야 한다고 하세요. 그럼 아마 가볍게 짜증내시고 가실 거예요.”

“그게 통할까요?”

“그럼요. 할아버님이 할머님 은근히 무서워하시거든요.”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아으, 허리야.”

간호사와 대화 후 이찬희는 허리를 두드리며 스테이션 의자에 앉았다.

“최 쌤, 너 아직 저녁 안 먹었다며?”

“안 먹었지.”

“가서 밥 먹고 와.”

“가면? 이 선생 혼자 응급실 보겠다고?”

이찬희 못지않게 응급실을 뛰어다녔던 최모나가 모니터를 주시하며 대꾸했다.

“한바탕 휘몰아쳐서 잠깐 괜찮을 거 같은데.”

“선생님, 17번 이갑수 환자 가슴에 물이 덜 나와서 이따 다시 한번 뺄 수도 있다고 한 번 더 알려 주세요.”

“네, 선생님. 그리고 보호자분께서 입원해야 하냐고 물어보셨는데 뭐라고 할까요?”

“좀 지켜보고요.”

“빨리 밥 먹고 오라니까.”

이찬희가 오더를 내린 최모나에게 다시 한번 밥 타령을 했다.

“너 밥 못 먹으면 더 사나워지는 거 모르지? 배 안 고프냐?”

“고프지.”

“그럼 빨리 가 먹고 오라니까.”

“내가 본 환자가 지금 거의 다 노인이라서 계속 지켜봐야 하는데 어떻게 밥이 목구멍에 들어가겠냐?”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최모나의 시선은 모니터 속 환자의 정보를 확인 중이었다.

확실히 노인 환자들이 오면 그만큼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크흠!”

“너 지금 웃었냐?”

“쏘리. 그게 아니라. 김 선생님이 진짜 대단하신 거 같아서.”

“뭐가?”

“우리 까칠이 최모나를 이렇게 만드시다니. 거의 뭐 최모나 사용설명서를 쓰셔도 될 듯.”

“뭐라는 거야 지금?”

“아니, 그렇잖아. 다른 병원에서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는데 널 이렇게 조련하는 거 보면 내공이 남다르시구나 싶다.”

“내가 물건이냐? 다루게. 그리고 조련은 무슨 조련이야. 그냥…….”

“그냥 뭐?”

그냥 태경의 말을 공감할 수 없어 악착같이 할 뿐이라는 말을 최모나는 하지 않았다.

사실 일부러 지각을 할까 아니면 하루쯤 무단결근을 해 버릴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막 필드에 나온 햇병아리 인턴도 아니고 의사로서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뭔데. 말을 왜 하다 말아?”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밥 안 먹을 거야? 선생님도 오실 텐데 밥 먹고 오지?”

“오늘 바쁘셔서 응급 아니면 콜 하라고 하셨는데 오실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오실 거야.”

“그걸 이 선생이 어떻게 알아?”

“최 쌤은 아직도 선생님을 모르네. 선생님 바라기인 내가 볼 때 넌 아직 멀었어.”

“그런 거까지 알아야 하나. 이 선생이나 많이 알아.”

배는 고프고 환자들을 계속 체크해야 하는 최모나는 슬슬 예민 지수가 상승하고 있었다.

“오호! 최 쌤 이 와중에 너의 팬클럽께서 저기 또 오셨다.”

이찬희의 고갯짓을 따라간 최모나의 시선이 병원 내부로 통하는 응급실 입구에 멈췄다.

그곳에는 최모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우진이가 서 있었다.

“하!”

짜증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새벽 회진 때 아이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화장실을 같이 가 줬다. 근데 그게 실수였다. 오늘 출근 때부터 계속해서 가는 곳곳마다 우진이가 최모나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병원 복도에서도, 1층 접수처 대기실에서도, 3층 병동에 갔을 때도 시선이 느껴지는 곳에 항상 우진이가 있었다.

“심지어 나 저녁 먹으러 갈 때도 너 있나 찾았다니까. 이 정도면 우진이가 최 쌤이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왜, 화장실에서 노래까지 불러 줬다며?”

“뭐! 누가 그래?”

“우진이가 나한테 막 자랑하면서 말하던데. 천하에 최모나가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다니.”

“노래를 부르긴 누가 노래를 불러. 그냥 핸드폰으로 틀어 준 것뿐 이야.”

“최 쌤, 그래도 저 정도 정성이면 한번 아는 척 좀 해 줘라.”

“됐어. 괜히 그랬다간 더 친하게 굴지 몰라. 모른 척하면 알아서 갈 거야.”

“매정해. 너무 매정해요.”

이찬희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최모나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저 환자에게 그만 시달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제발 노인 환자 그만 보고 싶다.’

정확히는 노인과 아이 환자였다. 한 시간 전, 진료를 볼 때 베드 위에 실수를 한 노인의 배뇨가 얼굴에 튀는 일이 있었다.

물론 환자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특정 환자들만 반복해서 보다 보니 그냥 넘어갈 이런 일이 짜증으로 다가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 쌤, 최 쌤. 신환이요.”

“아, 네.”

“13번, 14번 베드고요. 성인 남자 두 명이 술 먹고 서로 시비가 붙었답니다. 술병으로 머리 찍고 주먹다짐을 했다대요.”

응급실에서는 역시나 잠깐의 휴식도 쉽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하는 사이 간호사가 연달아 새로운 환자의 존재를 알렸다.

“선생님들, 신환입니다. 노부부인데 두 분이 계단에서 굴렀대요.”

“골절인가요?”

“일단 겉으로 보기에 큰 부상은 없어 보여요. 19, 20번 베드로 가시면 돼요.”

“바로 갈게요.”

“잠깐, 이 선생?”

최모나가 급히 일어나는 이찬희를 붙잡았다.

“내가 13, 14번 갈게.”

“뭐? 술 먹은 남자 환자야. 버거울 텐데.”

“알아. 그래도 내가 갈게.”

“최 쌤 너 혹시…….”

“나, 오늘은 진짜 노인 아이 그만 보고 싶어서 그래. 부탁한다.”

“괜찮겠어?”

“취객 환자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그게 아니라 괜히 선생님한테 걸리면 너 혼날까 봐 그러지.”

“지금까지 안 오시는 거 보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리고 오셔도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실 거야.”

최모나는 술 먹은 환자를 보는 것보다 지금은 노인과 아이 환자를 보는 게 더 싫었다.

“그래. 그럼.”

“고맙다.”

* * *

“하여간 너랑 나는 진짜 안 맞아.”

“내가 할 소리다. 인마! 넌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냐?”

“너야말로. 곧 있으면 50이야. 정신 차려.”

“넌 세상 그따위로 살지 마.”

챠륵-

서로를 향한 날선 말과 알코올 냄새가 풍기는 베드 안으로 최모나가 입장했다.

“최성필 환자분?”

“저요.”

“김준성 환자분?”

“전데요.”

“두 분 술 먹고 다투시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 저 자식 제 이마를 술병으로 깼는데 괜찮을까요? 아까 대가리까지 울리는 거 같거든요. 아무래도 유리 파편이 좀 들어 간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좀 보겠습니다.”

최모나가 13번 베드에 있는 환자의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다행이 파편은 없습니다. 환자 분 현재 머리가 울리거나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뭐 지금은 괜찮습니다.”

“머리를 가격 당한 거기 때문에 지금은 괜찮아도 뇌진탕 증상이 있을 수도 있고, 겉으로 괜찮아도 내부 출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내부 출혈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단 머리 촬영을 한 다음 소독하고 상처가 부위가 깊어서 봉합을…….”

최모나가 13번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던 그때였다.

“야, 이 시발 새끼야!”

13번 환자가 별안간 최모나의 말허리를 끊고 거친 욕설을 발사했다.

“성필이 너 이 새끼 나 죽이려고 했냐?”

내부 출혈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환자가 급발진을 하며 친구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지랄한다.”

“뭐! 지랄?”

“환자분들 여기 지금 병원입니다. 두 분 다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챠륵-

두 남자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최모나가 13번과 14번 베드 사이에 커튼을 치며 경고했다.

하지만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남자들은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곧이어 닫힌 커튼이 다시 열렸다.

챠륵-

“너 말 다 했어?”

“아니, 다 못 했다. 네가 병나발 분다고 설치는 거 말리다 네 손으로 때린 걸 왜 내 탓을 하고 난리야.”

“야! 이 개x끼야.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아무리 욕을 해 봐라. 내가 너한테 겁을 먹나.”

“사람 죽이려고 해 놓고 뚫린 입으로 말은 잘한다. 살인자 새끼.”

“뭐, 사, 살인자아?”

“환자분들 분명 제가 그만하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면 치료가 힘듭니다.”

“아니, 선생님 저 새끼가 나보고 살인자라고 하잖아요.”

“선생님? 저 쌍놈이 저 죽이려고 마빡에 술병 꽂았다니까요. 너 어디 콩밥 한 번 먹어 봐라.”

“잘됐네. 여기 경찰 좀 불러 주세요.”

“그래 불러! 내가 오늘 아주 너 아작을 내줄라니까.”

“환자분들!!”

“말리지 마세요.”

“네가 그러니까 자식들한테 인정도 못 받는 가장인 거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환자분들 멈추세요.”

최모나와 간호사가 말렸지만 두 남자의 격한 감정은 점점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똥 싸고 있네. 너야 말로 새꺄 그러니까 마누라한테 이혼 당한 거야.”

“뭐야! 야 네가 뭔데 남의 가정사를 들먹이고 난리야.”

“당장 멈추지 않으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의사 양반 저리 비켜요.”

“못 비켜 드립니다.”

간호사가 최 팀장을 부르러 간 사이 최모나가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던 찰나,

“아, 저리 비키라니까 무슨 말이 많아.”

흥분한 남자들의 의해 최모나가 응급실 바닥으로 세게 넘어졌다.

“이거 놓으라고 야이 씨…….”

탁-

“당장 멈추지 못해!”

그리고 그 순간 정확한 딕션과 함께 호통이 두 사람의 고막에 때려 박혔다.

넘어진 최모나는 자신의 바로 옆에 보이는 남색 크록스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태경이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의사로서 풍기는 강한 아우라와 함께 태경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보세요. 환자분들! 여기는 병원, 그것도 응급실입니다. 최 선생 괜찮아?”

“예, 전 괜찮습니다.”

“어머, 선생님 괜찮으세요?”

최 팀장과 함께 돌아온 간호사가 최모나를 일으켰다.

“응급실에서 소란 피우면 안 된다는 기본 상식도 모릅니까? 최성필 씨 김중성 씨, 눈에는 다른 환자분들이 안 보이나 보죠?”

조폭한테 맞아도 보고 협박도 받아 보고 병원 생활 만렙인 태경에게 이런 환자를 다루는 것 즈음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환자의 유형만 봐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능했다.

이고철 수술을 생각하다 응급실로 온 태경은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보고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런 환자들은 소리만 클 뿐이지 의외로 다루기 쉬운 상대라는 것을.

“어린아이들조차 병원에서는 조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밥 먹듯이 욕을 입에 담고 최모나의 말을 무시하던 두 남자는 태경의 포스에 알코올이 날아가는 듯 했다.

“치료하는 의료진을 밀어 넘어뜨리기까지 하고 다 큰 어른들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친구놈과 제가 술이 취해 흥분을 해서…… 저희가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남자들은 태경과 최모나를 향해 사과를 전했다.

“한 번 더 소란을 피우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경, 경찰이요?”

“아닙니다. 선생님. 앞으로 조용히 치료받겠습니다.”

“최 팀장님 들으셨죠? 이분들 한 번 더 소란 피우면 바로 경찰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옆에서 떡하니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럼 곧 치료해 드릴 테니 잠시 베드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아, 예 선생님. 알겠습니다.”

챠륵-

능숙하게 현장을 정리하고 두 사람 사이에 커튼을 친 태경이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김준성 환자 상처 부위 드레싱 하고 머리 촬영 좀 해 주세요. 봉합 준비도 좀 해 주시고요.”

“네, 선생님.”

“그리고 최 선생은…….”

간호사와 대화한 태경이 뒤 따라온 최모나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는데 대뜸 사과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부끄럽고 자신에게 분하고 쪽팔린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노인 환자가 보기 싫어서 이찬희의 만류에도 괜찮다며 자신 있게 환자를 봤는데, 의사로서 민망한 꼴을 보였다. 그것도 태경의 앞에서 말이다.

그동안 큰소리 뻥뻥 쳤는데 요령을 피우다 환자에게 무시나 당한 모습을 봤으니 뭐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당장 눈앞에서 크게 혼이 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최모나?”

“네.”

그런데 당연하게 한 소리 들을 준비를 하며 서 있던 최모나에게 태경은 전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었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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