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82화 (81/472)

82화. 고작 5분?

문이 확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태경이 들어왔다.

“서, 선생님.”

태경이 올 거라 생각 못 한 최모나는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 최 선생. 어디 가?”

“선생님께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나한테 왜? 뭐, 할 말 있어?”

“그게…….”

“선생님, 의국실에 어쩐 일이세요?”

최모나가 말을 꺼냈지만, 수술 성공으로 텐션이 대기권을 뚫은 이찬희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두 사람 보러 왔지.”

“저랑 최 쌤이요? 왜요? 뭐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라고…….”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

태경은 이찬희을 말을 끊으며 봉지에서 꺼낸 게또레이 음료를 던졌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나와 식당에 가기 전 태경은 진료실부터 들렀다. 힘든 수술이 끝나면 그렇게 이온 음료가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수술이 끝나자마자 꼭 한 캔은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힘든 수술 때만 마시게 됐다. 시원한 게또레이를 한 캔 마시고 나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함이 전달돼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냉장고에 이온 음료가 똑 떨어졌고 자판기에서 뽑는 김에 전 직원들 걸 다 뽑아 나눠 주고 있었다.

“갑자기 웬 음료수예요?”

“왜, 싫어?”

“에이, 그럴 리가요.”

“아까 수고 많았다. 이 선생.”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커피로 사 주세요. 라고 하면 혼나겠죠?”

“커피는 네 돈으로 사 먹어라. 그리고 최 선생 수고했어. 이거 받아.”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수고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수술하는 동안 응급실 환자들 꼼꼼하게 잘 봤으니까 수고한 게 맞지. 안 그래?”

“아닙니다. 음료수는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 그럼 간다.”

“저기 선생님?”

음료를 나눠주고 나가려던 태경을 최모나가 불렀다.

“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할 말 있구나.”

“그것보단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왜 제가 아닙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제가 아니라 이찬희이냐 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아…….”

태경은 이제야 최모나가 하고 싶은 말에 맥락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게 왜 본인이 아닌 이찬희가 어시를 했냐 이 말이야?”

“그렇습니다.”

“왜, 최 선생이 못 들어왔는지는 생각해 봤고?”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에 결론이 뭔데?”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최 선생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야.”

“혹시 제 메일이 부족했습니까? 이 선생이 보내드린 게 더 훌륭했기 때문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비슷했어. 굳이 우위를 가리자면 최 선생이 보낸 게 더 좋았지.”

본인 것이 더 좋았다는 소리를 듣자 최모나는 억울하고 분한 기분이 더 상승했다.

“근데 왜 제가 어시가 아니고 수술실 공포증이 있는 이찬희입니까?”

얼마나 수술방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버럭 하는 최모나의 모습이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최모나 넌 말을 해도 꼭.”

화가 날 발언이었지만 이찬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고 요즘 좋아졌기 때문에 저 소리를 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다만 민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 많이 좋아졌거든.”

“넌 좀 빠져.”

“어, 그래. 빠질게.”

“선생님 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최모나는 코 평수를 넓혀 가며 반드시 듣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런데 너무 의외에 답변이 되돌아왔다.

“지각!”

“예? 지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너 오늘 지각했잖아.”

“아닙니다. 저 지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시에 온 걸로 기억합니다.”

“평소보다 5분 지각했어.”

“하! 고작 그 5분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고작 5분?”

순간 태경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말인즉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오우! 친구야 그 발언은 아닌 거 같은데.’

태경바라기인 이찬희는 그 시그널을 터득했기에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조마조마해졌다.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이럴 땐 쥐 죽은 듯이 얼른 나가는 게 상책이다. 이찬희는 뒤꿈치를 들며 조용히 의국실을 나갔다.

“최모나 너 지금 고작 5분이라고 했어?”

“5시간도 아니고 5분인데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네가 집도의고 큰 수술을 앞두고 있어. 어시를 누구로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일찍 와서 준비하는 1번과 평소와 달리 고작 5분을 지각한 2번 중 누굴 데려갈 거 같아?”

“……!”

“단순히 고작 5분이 아니라 태도의 차이야.”

‘태도’라는 단어가 최모나의 입을 막았다.

“네 말마따나 이찬희는 수술실 공포증이 있어. 그걸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저 녀석은 노력이라는 걸 해. 근데 넌 뭘 했지?”

태경의 질문에 여전히 답변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찬희가 일찍 와서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최모나는 알지 못했다.

자칭 태경바라기라고 떠드는 이찬희를 단순히 편애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회사 다니는 회사원도 중요한 회의나 미팅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서 준비를 해. 하물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고작 5분이라는 말을 하고 있으면 되겠어? 안 그래?”

“이 선생이 일찍 온 걸 몰랐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이제 이유 납득이 돼?”

“납득……됩니다.”

“회의 망쳤다고, 미팅 가서 실수 했다고 혼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죽진 않아. 하지만 우린 실수하면 사람이 죽어.”

“지금까지 수술실에서 큰 실수를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아직 그 정도 발언할 만큼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 태도 고쳐. 계속 그런 식이면 내 수술 못 들어와.”

“그럼 앞으로 수술이 있으면 계속 일찍 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최모나는 기준을 정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물었다. 그게 속이 편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최 선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밥 먹으러 간다.”

“하!”

태경이 나간 뒤 최모나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진짜 되는 게 없네.”

궁금해하던 이유는 알았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하다!”

* * *

“와, 한 그릇 갖고는 부족하나?”

오계순은 방금 전에 음식을 담아간 의진이 또 식판에 음식을 담자 물었다.

“오늘 수술이 6시간이나 걸렸다고 하더니만 정 선생 배가 많이 고팠는갑다.”

“그게 아니라 김 선생님 거 담으려고요.”

“김 원장 걸? 와? 수술해서 팔 아프다나?”

열심히 불고기 산을 쌓고 있던 의진이 민망한 표정으로 대충 둘러댔다.

“김 선생님이랑 같이 먹기로 했는데 좀 늦는 거 같아 미리 담아 두려고요.”

“그래?”

의진이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다음에 들려올 답변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김 원장이 아가? 지 밥은 알아서 퍼 묵것지.’

‘정 선생 니도 같이 고생했는데 퍼뜩 먹지 뭐 할라고 퍼 주나?’

직설화법과 거침없는 언변의 소유자인 오계순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을 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따뜻한 말과 함께 칭찬이 날아왔다.

“정 선생 니도 같이 수술해서 힘들낀데 맴이 예쁘다. 예뻐. 계란후라이 하도 좀 해 주까?”

“아니요. 여사님. 이렇게 반찬이 끝내주는데 무슨 후라이예요. 괜찮아요.”

대체로 병원 밥이 맛없다는 말은 우리병원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모든 직원뿐만 아니라 환자들까지 아마 전국 병원 밥의 순위를 매긴다면 당연 우리병원이 1등이라며 입을 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계순은 우리병원에 오기 전 3대 째 내려오는 한식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은 며느리들에게 물려주고 병원 식당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 솜씨는 여전했다.

“보면 의료진들 참 딱하다. 수술하느라 자정까지 저녁도 못 먹고 이래 일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고 안쓰럽고 그렇다.”

“저희만 대단한가요. 직원분들도 그렇고 이 시간까지 밥해 주시는 여사님도 대단하시죠.”

“뭐시 대단해. 나야 늙어가 일하러 나오는 게 복이고 운동이야. 야야, 정 선생?”

“네, 여사님.”

야무지게 탕국을 담는 의진에게 오계순이 제동을 걸었다.

“김 원장은 칼칼한 거 좋아한다 안 카나. 땡초 좀 타야 한다.”

“그래요? 어! 선생님. 여기요.”

의진이 태경의 식판을 다 채운 사이 태경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식판 여기 있어요. 그냥 오세요.”

“정 선생이 내 것까지 푼 거야?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기다리다 푼 거예요. 가서 얼른 먹어요.”

“그래, 잘 먹을게. 고마워. 여사님 잘 먹겠습니다.”

“저도요.”

“얼른 가 먹어.”

두 사람은 제일 안쪽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임정숙 간호사가 들어왔다.

“임 쌤, 같이 드세요?”

“아니에요. 두 분 어서 드세요.”

의진이 손을 들어 불렀지만, 임정숙 간호사는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거절했다.

“저 집에 전화해야 해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전화는 무신.”

오계순이 입구 쪽에 자리 잡은 임정숙 간호사 앞에 앉으며 말했다.

“임 선생도 거짓말할 때가 다 있나.”

“여사님도 참. 거짓말이라니요. 밥 먹고 전화하려고 했어요.”

“치아라. 저 두 사람 같이 먹게 해 줄라꼬 한 거 내 모를 줄 알았나?”

“여사님도 눈치채셨어요?”

“척 보면 딱이제. 김 원장 쳐다보는 정 선생 눈에 마 깜빡이가 깜빡깜빡 켜지는 게 빛이 난다 아이가.”

촉이 좋은 오계순 역시 의진이 태경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저렇게 같이 있는 모습 보니까 괜히 제가 다 흐뭇하네요. 두 분 잘됐으면 좋겠어요.”

“마, 사람 좋아하는 맴은 누가 등 떠민다고 되는 거 아니다. 얼라들도 아니고 내비 두면 된다. 어차피 잘될 사람은 가만히 둬도 지들끼리 알아서 붙는다.”

“그건 여사님 말씀이 맞네요.”

“오! 불고기. 오! 연포탕. 오늘도 위장이 호강하겠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이찬희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수 쌤, 맛있게 드세요.”

“잠깐!”

이찬희가 식판을 들고 테이블 옆을 지나려 하자 임정숙 간호사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우리 이 쌤 저기 제일 끝자리에서 식사하고 계시는 두 분과 합석하시려고 하세요?”

“네, 맞아요.”

“오늘은 저랑 함께 드세요.”

“수 쌤이랑요?”

“네. 저랑 먹기 싫으세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이찬희는 살짝 고민했다.

사실 환자 때문에 밥 먹는 타이밍이 달라 직원들이 함께 먹는 날이 드물었다. 그러다 오늘처럼 같이 먹을 기회가 되면 늘 자연스레 두 사람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인데 임정숙 간호사와 둘이 먹자니 살짝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럼 수 쌤도 저랑 가서 저쪽 테이블에 합석해요.”

“아니요. 이 테이블에서 같이 먹자는 말을 드리는 거예요.”

“죄송하지만 수 쌤. 저, 선생님들과 먹으면…….”

“아따 마. 이 문디 와 이라노?”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오계순이 답답함에 한마디 톡 내뱉었다.

“눈치는 갔다 엿 바꿔 묵엇나?”

“예? 여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 시끄럽고 저짝 테이블 신경 끄고 고마 빨리 여 앉아 밥이나 묵으라.”

“왜요? 두 분 심각한 이야기 중이세요?”

대놓고 두 사람에게 가지 말라는 말에 이찬희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선생, 니 연애 많이 안 해 봤제?”

“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의예과 시절 때 여자 동기 등과 선배 누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이노무 자슥이 허파에 바람 들었나 보다.”

“당연하죠. 여사님 우리는 모두 숨을 쉴 때마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요. 특히 성인은 한 번에 2리터 넘게…….”

“문디 자슥 대답하는 거 봐라. 답답아. 그 시답잖은 소리로 아까운 기운 빼지 말고 낙지나 묵으라.”

보다 못한 오계순이 이찬희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며 세 사람의 설전은 일단락됐다.

* * *

“선배 오늘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너도 수고 많았어.”

“수술방 하루 이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전 아직도 어려운 수술이 잘 끝나면 그 여운이 한참 가는 거 있죠?”

“다 그렇지 뭐. 그건 아마 우리보다 더 선배님들도 똑같은 심정일 거야.”

그건 태경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의사들이 그렇지만 특히 외과의들은 그날 어려운 수술이 잘 끝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내 일처럼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푸엉 씨가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에요.”

“식당 오기 전에 병실 들렸는데 이고철 환자는 웃고 푸엉 씨는 울고 있더라고.”

“왜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배가 고파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맛있는 거 같네.”

배가 심히 고팠던 태경은 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의진은 덩달아 자신까지 배가 부르는 기분이었다.

‘고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해산물도 잘 먹는구나. 다음에 낙지 맛집 데려가야겠다.’

자꾸만 의지와 상관없이 주책맞게 웃음이 날 것 같아 밥을 크게 떠 입안에 가득 넣었다.

“의진아 밥 천천히 먹어. 너 그러다 체한다. 자 얼른 물도 한 모금 마셔.”

“됐거든요. 선배야 말로 천천히 드세요.”

Rrrrrrrrrr

그렇게 식판 위 반찬이 점점 줄어들 즈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두 사람의 핸드폰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Rrrrrrrrrr

“선배, 핸드폰 진동이요.”

“너도.”

“그러네요. 누구지?”

톡톡-

한손에 젓가락을 들고 한 손에 폰을 든 태경이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터치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

메시지를 확인한 태경은 입에 넣으려던 겉절이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의진아 너 혹시?”

“선배도 받았어요?”

태경과 의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 못한 상대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거 장난은 아니겠지?”

“이 사람이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게 장난은 아닌 거 같은데요.”

태경과 의진은 다시 한번 서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누가그룹 김서현입니다. 김태경, 정의진 선생님과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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