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83화 (82/472)

83화. 윗분들의 심기

7시간 전-

누가호텔. CEO 사무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등장한 비서는 김서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중요한 일정은 다 끝난 거지?”

“네, 사장님. 오늘 저녁 모임은 내일 조찬 약속으로 변경됐습니다.”

“그건 알고 있고. 그럼 나머지 업무 보고 집으로 퇴근할게.”

“저, 사장님…….”

나가보라는 손짓에 비서가 난감한 듯 제자리를 지켰다.

“왜? 또 뭐가 남았어?”

“아까 언론사 인터뷰하실 때 회장님께 연락이 왔었습니다.”

“알아. 아버지 퇴원 기념해서 가족 모임 하니까 주말에 일정 빼 두라는 소리잖아. 맞지?”

“아닌데요.”

“아니라고? 주말에 가족 모임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요.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뭔데?”

“그게……그러니까 어…….”

비서는 말을 꺼내기 두려운 듯 한참 뜸을 들였다.

“나랑 장난하니?”

“아닙니다. 사장님.”

“그럼, 옹알이 같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말해.”

“회장님께서 이번 주 내로 우리병원 선생님들께 꼭 사과하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난 또 뭐라고.”

뜸들이던 비서와 달리 김서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 비서님은 신경 쓰지 말고 나가 봐. 나 서류 봐야 해.”

“사장님, 죄송하지만 회장님께서 저보고 언제 가실 건지 확답을 듣고 연락을 달라고 하셔서요.”

“알았으니 나가.”

“그래도…….”

비서는 김서현이 칼춤을 추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래도 김건형이 시킨 일이라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야!”

결국 참다못한 김서현이 칼춤에 시동을 걸었다.

“회장님이 너네 아빠니? 우리 아빠야. 내 아빠라고. 딸인 내가 알아서 한다고. 몇 번을 말 해. 몇 번을!!”

“죄송합니다.”

“내가 회장님께 직접 말할게. 할 테니까 걱정 마. 그럼 됐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발 빨리 나가.”

탁-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김서현은 비서에게 했던 말과 다른 말을 쏟아 냈다.

“미쳤어? 내가 그것들한테 왜 사과를 해.”

김서현이 사과를 하라는 김건형의 전화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김건형은 그때 태경과 의진을 만나고 온 다음 날부터 정식으로 사과를 하라고 말했지만, 김서현은 그때마다 알았다는 말로 대충 넘어갔다.

“아버지는 도대체 그딴 것들하고 왜 그런 약속을 하신 거야.”

여전히 앞으로도 김서현은 절대 죽어도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

“사과라니. 하여간 없는 것들이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기막혀.”

* * *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그리고 오늘부터 더 이상 야근은 없습니다.”

“정말이세요?”

의진의 언니이자 정&장 법률사무소의 수석 파트너 변호사인 정해진의 말에 주니어와 어쏘들이 열광했다.

“이러고 또 갑자기 회의한다고 호출하시는 건 아니죠?”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갑자기 하던 야근을 안 한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요?”

“더 이상 야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준비가 완벽하니까. 다들 고생했어요. 퇴근들 잘하고.”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이 나가고 정해진의 호출을 받은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변호사님.”

“나 일정 하나만 잡아 줘.”

“네, 말씀하세요.”

“누가호텔 비서실 연락처 알죠?”

“그럼요.”

“전화해서 지금 김서현 사장님 만나러 간다고 전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보통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약속이란 걸 한다. 그래야 서로 일정을 조율하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대기업 오너를 만날 때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정해진의 갑작스러운 일정에 비서는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전화하고 이 비서 바로 퇴근해.”

“아직 6시도 안 됐는데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안 그래도 빡센 회사 다니느라 힘들 텐데 대충 마무리하고 일찍 퇴근해요. 수고했어요.”

“네, 변호사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철컥-

“정 변 오늘 야근 없다며?”

비서가 나가는 동시에 정해진의 남편이자 같은 변호사인 이정익이 들어왔다.

“벌써 소식 들었어?”

“당연하지. 난 우리 마나님 소식이라면 모르는 게 없잖아. 간만에 같이 퇴근이네. 가자.”

“자기 지금 퇴근해도 돼?”

“그럼, 오늘 오전에 판결 듣고 와서 서류 정리 중이었어.”

“아! 맞다. 쏘리. 내가 정신이 없었다. 결과야 안 물어봐도 되지?”

정해진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며 이정익에게 물었다.

“말해 뭐해. 내가 언제 지는 거 봤어?”

“봤지. 나한텐 지잖아.”

“에이, 이 사람이 뭘 모르네. 그거야 집안의 평화를 위해 져 주는 거지.”

“그렇다고 해 줄게. 누구 차로 갈까?”

“내 차로 가야지. 가다가 와인이랑 애들 간식 좀 사 갈까?”

“근데 자기야, 잠깐 들를 데가 있는데 괜찮지?”

“그럼. 어딘데?”

“누가호텔.”

호텔이라는 소리에 이정익은 반쯤 풀어 놨던 넥타이를 다시 정갈하게 올렸다.

“근데 있잖아. 나 집에 가서 볼 서류도 많고 오늘 새벽 4시에 출근해서 내 바디가 지금 상당히 지쳐 있다고나 할까.”

“뭐래 이 남자 혼자 김칫국 마셨네. 이보세요. 이 변호사님.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닙니다.”

“아니야?”

“그래, 아니야.”

“아니라고 하니까 갑자기 확 불타오르는데?”

“됐네요. 김서현 사장 만나야 해. 빨리 나가자.”

“김서현을 왜?”

* * *

“네, 비서실입니다. 네. 안녕하셨어요? 예! 지금요? 무슨 일이신데요?”

-글쎄요. 저도 아는 게 없어서요. 변호사님이 직접 뵙고 말씀드린다고 하시는 거 보면 중요한 거 같긴 하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표정이 굳어진 여직원이 비서실장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실장님, 일 난 거 같은데요?”

“일이라니 무슨 일?”

“그게…….”

* * *

“뭐!! 누가 찾아와?”

김서현은 비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과하게 반응했다.

“정&장의 정해진 변호사님이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정해진 그 또라이? 갑자기 왜? 누가 사고 쳤구나? 이 인간 또 여자 생겼니?”

“아닙니다.”

“상혁이 또 프로포폴 했나?”

“그것도 아닙니다. 법무팀장과 보안팀장에게 확인했는데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근데 왜 그 상또가 날 찾아 오냐고?”

김서현의 이런 반응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기업인 특히 오너들은 정&장에서 연락이 오면 회사 간 소송이나 가족들이 사회적 사고를 친 줄 알고 기존 일정까지 미루며 바로 만나곤 했다.

같은 편으로 만나면 든든하지만 적으로 만나면 오줌 지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실 누가그룹 법무팀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곳이 바로 정&장이었다.

게다가 정해진과 그 남편은 전설의 사법연수원 또라이 커플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사법고시 수석과 사법연수원 수석을 한 인물이었다.

둘 다 판사 시절 좋은 쪽으로 똘끼들이 넘쳐서 각각 게또라이와 상또라이 줄여서 상또 게또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대단한 두뇌를 가진 두 사람을 더 대단하게 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집안이었다.

둘 다 집안 자체가 법조계 인사들이 즐비한 성골 중에 성골 출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잡음도 없이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을 많이 하여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기도 했다.

그만큼 정&장 법률사무소의 파워는 정계와 법조계에서 막강했다.

“하! 나 정해진이 그 여자 재수 없어서 싫은데…….”

김서현이 재수 없어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위대한 여성 리더상을 매년 타고 있는 정해진에게 은근 자격지심이 있었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갑자기 오고 난리야. 짜증나!”

정해진이 의진의 언니라는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김서현은 급기야 초조함마저 들었다.

“사장님,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뭐! 벌써?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

똑똑-

“정 변호사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김서현 사장님.”

“그러네요.”

“2년 전 재판 이후로 처음 보죠. 우리?”

“네.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서류 속에 묻혀 살죠. 갑자기 불쑥 찾아왔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무슨 말이에요.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죠.”

김서현은 우아한 가면을 쓴 채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했다.

“근데 어쩐 일로…….”

“피차 바쁘니까 빨리 말할게요. 우리병원의 김태경 선생님과 정의진 선생님 아시죠?”

“네?”

“얼마 전에 김건형 회장님 응급 처치하신 두 분이요.”

“그걸 어떻게…….”

김건형 일은 주식이 떨어질까 싶어 미디어를 새 나가지 않게 극비 사항이었다. 그런 극비를 정해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니 김서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재벌가의 일을 저희가 모를 리가 있나요. 회장님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아, 예. 건강은 전혀 문제없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우리 김서현 사장님께서 김태경 선생님과 정의진 선생님. 우리 두 선생님께 폐를 끼치셨다고 하던데…….”

“폐라니요. 변호사님이 오해가 있으시네요.”

“오해요?”

“네. 폐가 아니라 정당하게 할 말을 한 것뿐이에요. 어디 의사 같지도 않은 근본도 없는 것들이 쌍으로 얼마나 까불던지.”

정해진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싸움은 흥분을 하면 지는 법. 대신 과하지 않은 미소와 함께 차분한 말투로 일관했다.

“그 말인즉 근본도 없는 것들이 쌍으로 까불어서 할 말을 한 것뿐이셨다.”

“역시 변호사님은 말이 통하네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회장님의 목숨을 구한 의사에게 뺨을 날리고 막말을 한 건 폐가 맞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민폐요. 제 생각에는 깔끔하게 사과를 하시는 게 맞다고 봅니다.”

“사과요? 그것들한테 지금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요?”

“사장님 실수하셨어요.”

“실수! 실수는 무슨 실수?”

김서현은 서서히 흥분지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고작 의사 나부랭이들한테 할 말한 게 실수예요?”

“하! 김서현 사장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요?”

“무슨 상황 파악이요?”

“평범한 의사들 일로 나 정해진이 황금 같은 퇴근 시간에 그것도 내 발로 이렇게 직접 사장님을 찾아온 게 이상하지 않아요?”

“…….”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웬만한 일에는 사건을 맡지 않기로 유명한 정해진이 아닌가.

그런 여자가 왜 근본 없는 것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김서현은 슬슬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우리 김서현 사장님께서도 워낙 좋은 집안의 자제분이시지만, 그 두 선생님이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분들이시더라고요.”

“어마어마요?”

“네. 그 뒷배가 Another Level이에요. 조용히 의료인으로서 제 일 하며 살고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하셔서 윗분들의 심기가 많이 상하셨나 봐요.”

“하! 깜빡할 뻔했네.”

김서현은 정해진을 떠보려 했다.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두 의사가 돈으로 정 변호사님께 부탁했나요? 뭐 사과 좀 받아 달라고?”

“이봐요, 김서현 씨?”

“뭐, 뭐……김서현?”

“그래. 당신 내 수임료가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지? 항상 회사 차원에서 처리했으니까. 알면 아마 기절할 걸. 그리고 나 돈 준다고 다 일 안 맡아. 내 커리어가 있지. 안 그래?”

“너, 지금 나한테 반말…….”

“개망신 당하기 싫으면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급발진 하는 김서현을 정해진은 단 한 방에 포스로 제압했다.

“아, 맞다! 안 그래도 그분들이 혹시 당신이 안 믿을지 모른다고 작은 선물을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선물이라니?”

“메일 한 번 열어 봐.”

“메일?”

자리에서 일어난 김서현은 책상 앞에 선 채로 메일함을 클릭했다. 메일함에는 정해진의 말대로 선물이란 이름으로 도착한 영상이 하나 있었다.

딸칵-

“……!”

그리고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김서현은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내 말 맞지? 세상에는 당신과 나처럼 배경이 드러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우리 의뢰인의 자제분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 이제 이해 가세요? 김서현 사장님.”

“이, 이거……변호사님도 봤나요?”

“검토하느라 잠깐 봤어요. 이거 세상에 공개되면 꽤 곤란하실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사과만 하면 되는 거죠?”

영상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김서현이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다 못 해 안으로 말았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럼요. just apologize.”

“사과하면 이 영상은 안전한가요?”

“그건 제가 약속드릴게요. 아주 양심 있는 분들이라 믿어도 돼요.”

“알겠어요.”

“그럼 이야기가 끝난 거 같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 변호사님? 잠시만요.”

김서현은 나가려는 정해진을 불러 세웠다.

“그 두 사람. 어느 집안 자식들이죠?”

“그건 비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말해 드릴 수 있겠네요.”

“뭐죠?”

“우리 집안과 견줄 만한 집안이에요. 그럼.”

깔끔한 일처리와 함께 승리의 미소를 날린 정해진은 혼잣말을 속삭이며 사무실을 나갔다.

“누구든지 내 동생이랑 제부를 건들면 아주 x되는 거야.”

태경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방패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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