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hcg
밤 12시가 넘은 시간.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연락을 받은 태경과 의진은 진료실에서 김서현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저희를 찾아오셨죠?”
태경은 5분 동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있는 김서현에게 물었다.
“그게……할 말이 있어서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김서현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요?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요?”
의진의 말대로 이 늦은 시간에 오기 위해 집에는 야근한다는 거짓말을 하며 회사 사무실에서 버티다 온 것이다.
행여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싶어 옷도 평범하게 입고 운전도 직접 해서 온 김서현이었다.
“사과하러 왔어요.”
“사과요?”
일전에 김건형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 마녀가 진짜로 사과를 하러 올 줄은 몰랐다.
“김서현 씨가 사과를요?”
의진은 진짜인가 싶어 되물었다.
“네, 그날 두 분께 무례하게 군 점 사과드려요. 그날 아버지 일로 경황이 없다 보니 제가 말을 막 했어요. 그리고 함부로 손을 올린 것도 미안합니다.”
급기야 김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말 그 김서현이 맞나 싶었다.
물론 허리까지 굽히진 않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과하러 왔으니 저희도 더 이상 그날 일은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김서현 씨가 앞으로 의료진들을 좀 더 존중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태경은 사과를 받아들이며 그날 김서현을 보며 느낀 생각을 전했다.
“저도 김 선생님이랑 같은 의견이에요. 김서현 씨 입장에서는 놀랐겠지만, 도움을 준 의료진에게 그러는 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에요.”
“두 분이 무슨 말하는지 잘 알았어요.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김서현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영상을 막으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업무 중에 실례 많았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 * *
김서현이 진료실을 나간 뒤 태경과 대화를 나눈 의진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저기요?”
손을 씻고 나가려는 의진을 김서현이 불렀다.
“아! 깜짝아.”
“어머, 미안해요.”
“아직 안 갔네요?”
“이제 가야죠. 정의진 선생님이라 하셨죠?”
“네, 근데요.”
“부디 영상에 대해 잘 좀 말해 주세요.”
“네……?”
“제가 사과 꼭 하고 갔다는 것도 같이 말해 주면 좋고요. 그럼.”
안 그래도 영상 이야기를 하지 못해 찜찜했던 김서현이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저기 김서현 씨? 잠시만요.”
의진이 황급히 불러 세웠다.
“왜요?”
“실은 제가 아까 진료실에서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이 나서요.”
“뭐죠?”
“그러니까 말이죠.”
의진은 푹 눌러쓴 김서현의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똘끼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남자 얼굴에 손찌검하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나요. 알았어요?”
탁-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서는 의진을 보며 김서현은 어이가 없었다.
“쟤도 또라인가?”
그 뒤 빠르게 병원 밖으로 나가 차에 시동을 건 김서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가만! 정&장보다 대단한 집안이 누가 있더라?”
* * *
“언니가 했구나?”
의진은 진료실에 오자마자 확신에 찬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런 일을 해낼 사람은 자신의 언니뿐이었다.
-어, 그래. 동생아. 김서현이 사과했니?
“좀 전에 사과하고 갔어. 생각보다 예의 있게 하고 가던데.”
-당연하지. 없던 예의도 생겼을걸.
“비법이 뭐야?”
의진은 칼춤을 제대로 추던 김서현을 저렇게 만든 비법이 궁금했다.
-비밀이야. 아무튼 너랑 내 관계 일절 모르고 언니가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참, 영상 이야기하던데 그건 또 뭐야?”
-김서현이 너한테 영상 얘길 하디?
“응. 화장실에서 마주쳤는데 되게 조용하게 이야길 하던데?”
-영상이 중요하긴 하지.
마녀의 꼬리를 내리게 만든 영상은 김서현 본인의 영상이었다.
정확히 3년 전, 김서현은 남편이 대표로 있는 백화점 화장실에서 요상한 행동을 했었다.
“천하의 난봉꾼. 이 나쁜 자식. 또 나 몰래 여자를 만나.”
화장실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김서현은 립스틱으로 벽면에 자기 남편을 향해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으로 도배를 한 것이다.
남편이 또 바람을 피자 분에 못 이긴 김서현이 남편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려고 꾸민 우발적인 일이었다.
애처가 이미지를 꾸미고 있던 남편은 한동안 그 사건으로 직원들 입에 오르내리며 곤욕을 치렀다.
문제는 그 영상이 세상에 공개되면 그때와는 전혀 다른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김서현은 남편과 겉으로 잉꼬부부 콘셉트를 유지 중이었다. 그런데 그 영상이 공개되면 리조트 오픈을 앞두고 올라간 주가가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도 주기적으로 여자를 만나는 남편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혼하자고 할 게 뻔했다.
이혼을 하면 유산 상속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에 김서현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태경과 의진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당시 이 영상을 김서현과 소송 중이던 모 기업의 간부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치고 찍은 것이었다.
그걸 제공받은 정해진은 영상의 사용을 반대했다.
개인사를 끌고 들어오는 더티 플레이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김서현이 가족을 건드렸기 때문에 정해진이 갖고 있던 영상을 쓸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무슨 영상이길래 그래?”
-나도 잘 몰라?
계산이 확실한 정해진은 의진에게조차 영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넘겨짚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야.
“설마, 김서현이 바보도 아니고 그 말을 믿으라고?”
-얘, 동생아? 아쉽게도 대한민국 재벌들이 그렇게 깨끗하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제 발 저린 거지.
“듣고 보니 그러네. 고마워. 이번 일은 언니 때문에 잘 넘겼어.”
-가족끼리 고맙긴. 그나저나 우리 제부는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내일? 모레? 글피?
“그런 거 아니거든. 얼른 주무세요.”
-그럼 병원 가면 볼 수 있니?
“뭐래!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정 변호사님 이만 끊습니다.”
-야, 의진아? 정의진?
의진은 언니가 또 태경의 이야기를 꺼내자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 * *
“선생님 3번 베드 환자 체온 떨어졌어요. 36.7도입니다.”
“다행이네요. 지금 들어가는 수액 반 정도 남았죠?”
“네, 그 정도 남았어요.”
“다 맞으면 퇴원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찬희와 최모나를 잠시 쉬러 보낸 태경은 응급실 환자들을 살피며 스테이션에 있던 종이로 눈을 돌렸다.
A4 크기의 종이를 양쪽으로 나란히 놓고 보는 시선이 꽤나 진지했다.
“장현수 씨는 46살이고 김건훈 씨는 31살이네. 둘 다 보안요원 경력도 있고 운동한 것도 비슷하고.”
태경이 이토록 꼼꼼하게 보고 있는 건 바로 보안요원 지원자들의 이력서였다.
원래 지원자는 김철기가 소개해 준 한 명뿐이었는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사람이 생겨 총 두 명이 됐다.
“누구지?”
한 명의 지원자가 더 생겨 좋았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바로 두 명 중 누가 김철기의 소개로 지원한 사람인지 모른다는 거였다.
“이쪽인가?”
김철기가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고 두 명 다 같은 날 지원을 했기 때문에 더 애매했다. 물론 김철기가 소개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뽑을 건 아니었다.
공정하게 면접을 통해 가장 적합한 사람을 채용할 생각이다.
“아니면 이쪽인가.”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소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김철기는 사람 보는 안목이 상당했다. 그런 그가 소개를 한 사람이라 어떤 사람일까 싶었다.
“선생님? 원장 선생님?”
최 팀장이 거의 경보 수준으로 응급실로 들어오며 태경의 옆에 섰다.
“내일 보안요원 면접이신 건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안 그래도 지금 이력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이력서가 살짝 이상한데요.”
“왜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게 아니라 사진이 없어요.”
이력서에는 보통 지원자의 사진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 특유의 밝고 건강한 웃음을 어필하는 표정과 푸르뎅뎅한 배경이 돋보이는 사진 말이다. 그런데 지원자 두 사람 모두 사진이 없었다.
“아! 사진. 그거라면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팀장님이 왜요?”
“제가 처음에 잡것코리아에 올릴 때 양식을 잘못 올려서요. 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내일 면접 볼 건데 상관없어요.”
“그게 왜 상관없어요. 그러게 팀장님께서 애초에 잘 검토하고 올리셨어야죠.”
병동을 다녀온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 대신 가볍게 한 소리를 던졌다.
“크! 역시 우리병원의 살림꾼 임 선생님다운 발언입니다. 50대가 되다 보니 노안이 왔는지 눈이 침침해서…….”
“아고, 팀장님 올해 건강 검진에 양쪽 시력 다 1.0 나오셨잖아요. 알 없는 안경 끼고 계시면서 참나.”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태경은 적잖이 놀라며 최 팀장을 쳐다봤다. 알 없는 안경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알이 없어요?”
“네. 멋으로 끼시는 거예요. 팀장님 그냥 잠깐 졸았다고 하세요.”
“역시 임 선생은 돗자리 깔아야 해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제가 팀장님 한두 해 뵙나요? 그나저나 이력서만 보고 더 끌리는 사람이 있으세요?”
“글쎄요. 아직은 그냥 반반인 거 같은데요. 두 분은요?”
“저희요?”
“저요?”
“네, 두 분은 이력서만 봤을 때 어느 사람이 더 관심이 가는지 궁금한데요.”
“음.”
태경의 말에 두 사람은 이력서를 빠르게 훑었다.
“저는…….”
“아뇨. 팀장님 저희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손가락으로 집을까요?”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럼 우리 원장님께서 카운트를 해 주시죠.”
“하나 둘 셋.”
“이 사람입니다.”
“저도요.”
두 사람의 검지는 동시에 같은 사람을 가리켰다.
“김건훈 씨요?”
“장현수 씨보다는 보안요원 경력도 더 있어서 그만큼 경험이 있을 거 같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40대 보다는 30대의 그 패기가 더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렇군요. 일단은 내일 보고 판단하죠.”
“선생님, 9번 베드 신환입니다.”
간호사의 외침에 태경은 보고 있던 이력서는 두고 베드로 향했다.
* * *
“환자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커튼을 열자 30대 중반 정도의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으로 나이가 지긋한 어머니가 서 있었다.
“배가 아프시다고요?”
“네, 배가 아파요.”
베드에 누워 있던 여자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픈 지 얼마나 되셨어요?”
“그게 한 2주?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환자분 주로 어느 쪽이 아프세요?”
“전반적으로 아프고요. 뭐랄까 뭔가…… 꿈틀대는 느낌도 나요.”
“그럼 제가 배 한번 촉진해 볼게요. 잠시 누워 보시겠어요?”
“네.”
태경은 배를 촉진했다.
“이쪽은 어떠세요?”
“이쪽은요?”
“다리를 살짝 들어 보시고요.”
꼼꼼하게 배를 촉진했지만 환자에게서 뚜렷한 이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섯 번째 바이탈 또한 2단계인 순한 암모니아 냄새였기에 지금까지의 지표로는 큰 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생님 저 정말 배가 아파요.”
하지만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니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환자분 검사 좀 해 볼게요.”
이후 응급실에서 반드시 진행되는 기본 검사와 혈액검사를 진행했다.
‘애매하네.’
환자가 병원에 오면 검사를 시행하기 전에 환자의 상태와 증상을 보고 의사로서의 경험에 기반해 짐작되는 병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환자는 조금 달랐다.
‘뭐지?’
환자의 병이 무엇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현재 이 환자는 위급한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환자의 위급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는 것과 그에 대한 응급 처치가 가능한가였다.
태경은 그쪽으로 이미 절정에 다다른 상태였기에 환자에 대한 파악은 누구보다 빨랐다. 그래서 이 환자처럼 원인 파악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선생님 9번 환자 결과 나왔습니다.”
고민하는 사이 임정숙 간호사가 검사 결과가 나왔음을 알렸다.
“네.”
태경은 마우스를 빠르게 클릭하며 스테이션에 있는 모니터로 환자의 정보를 하나씩 천천히 확인했다.
“수치도 정상.”
예상대로 염증 수치 등도 모두 정상이었다. 이렇다 할 이상함이 없다. 짐작하던 그대로다.
“자, 그럼 뭐가 문제냐.”
그렇게 모니터 속 결과지를 옮겨가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
의외의 결과 하나가 태경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이거 hcg가 너무 높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