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지x 발광 육갑
“가만있자, 오늘은 어떤 옷을 입힐까.”
세면장에서 세수를 하고 온 김철기는 언제나처럼 전날 세척한 민기 인형을 들고 있었다.
‘여보. 내일은 우리 민기 곰돌이 그림 있는 옷으로 부탁해요.’
잠이 들기 전 부인이 했던 말을 기억한 그는 곰돌이 무늬가 있는 하늘색 상의를 인형에게 입혔다.
“민기야, 오늘도 엄마 잘 부탁한다.”
그는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 품에 민기 인형을 넣어 두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작업 끝나고 드세요.”
“아고, 매번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잘 마실게요.”
오늘도 어김없이 청소 직원에게 음료를 건넨 김철기는 병원 산책로에 앉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김 원장, 내가 전화를 너무 늦게 했나?”
-아닙니다.
김철기가 반갑게 통화중인 사람은 태경이었다.
-제가 어제 갑자기 문자를 드려서 놀라셨죠? 생각해 보니까 새벽에 연락을 드렸더라고요. 주무실 시간에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어차피 자고 있어서 몰랐어. 그리고 이 김에 자네랑 통화도 하고 더 좋지.”
-그런가요. 선생님도 사모님도 건강하시죠?
“둘 다 건강해. 근심 걱정 없이 지내니 스트레스도 안 받고 회복도 잘 되고 와이프도 나도 행복해.”
-다행이네요. 제가 급히 연락드린 이유는 보안요원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면접날이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김철기는 태경이 주기적으로 보내 주는 메일을 통해 병원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 뭐든 물어봐.”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소개해 준 지원자를 알고 싶어서요.
“내가 소개한 지원자?”
-네. 지원자가 총 두 명인데 그중에 누군지 궁금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했지만, 이름부터 그 어떤 것도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기에 태경의 궁금증은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이력서에 적힌 이름과 사진을 보면 태경이 저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사채 빚으로 지독하게 얽힌 장득칠의 얼굴과 이름을 모를 리 만무했다.
분명 장득칠의 모친인 김꽃분은 이력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김철기는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혹시 메일 주소를 잘못 보냈나? 계산 빠른 장득칠이 그 정도로 맹하진 않은데.’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지. 김 원장은 첫인상이 누가 마음에 들었는데?”
사태 파악에 나선 김철기는 기지를 발휘해 질문을 던졌다.
-첫인상이요?
“이력서에 붙어 있는 사진 첫인상을 말하는 거네.”
-그게 지원서를 잘못 올리는 바람에 장현수, 김건훈 씨가 사진을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태경이 별안간 말한 지원자 중에 장득칠이란 이름이 없었다.
‘장현수와 김건훈이라…….’
이름을 들은 김철기는 생각했다.
장득칠은 분명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지원서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장득칠이 이름을 바꿔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김 원장, 그냥 모르는 게 어때?”
김철기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모르게요?
“그래, 내가 누군지 이름을 알려 주면 은연중에 신경이 쓰일 거야. 하지만 누군지 모른 상태로 면접을 보면 김 원장도 편하게 면접 볼 수 있고 지원자들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지원자도 나와 병원의 관계를 모르고 있어. 어때?”
-블라인드 면접을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의견일 뿐이고 김 원장이 알고 싶다면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어.”
김철기는 모든 선택권을 태경에게 주고 싶었다.
현재 우리병원의 수장이기도 했고, 앞으로 병원을 키워 나가는 것도 모두 태경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지금처럼 선배로서 뒤에서 지지해 줄 뿐이었다.
“어차피 선택과 결정권은 다 김 원장에게 있으니 나는 자네 의견을 존중할 뿐이야.”
-블라인드 면접으로 보겠습니다.
“괜찮겠나?”
-솔직히 선생님이 소개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공정하게 보는 게 맞는 거 같네요.
“내가 소개한 사람이 김 원장 눈에도 믿을 만한 사람일지 두고 보면 알겠지.”
-결과 나오면 메일 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서 한 번 찾아뵐게요.
“그럴 시간에 자네 오프나 챙겨. 바쁠 텐데 이만 끊자고.”
-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은 김철기는 잔뜩 재미있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전 채무자와 사채업자가 고용자와 지원자로 만난 면접이라. 오늘 아주 볼만하겠어.”
* * *
외래 진료 시작 전 태경은 진지한 고민 끝에 지원자들에게 물어볼 질문을 작성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그래도 병원에 새 사람이 들어오는 건데 좋은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네.”
“보나마나 좋은 사람이 들어올 거예요.”
청소 때문에 열어 놓은 진료실 문으로 들어온 임정숙 간호사가 말했다.
“원래 우리 병원이 인복이 있거든요.”
“그런가요?”
“그럼요. 보세요. 선생님도 우리병원에 오셨잖아요.”
“듣고 보니 상당히 일리가 있는데요. 수 쌤은 어떤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겉으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 말고 좀 우직한 사람이요. 우리병원이 업무량도 많고 쉽지 않은데 끝까지 잘 버틸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저도 딱 그런 사람이면 좋겠네요. 혹시 외래 환자 오면 진료 볼 수 있으니까 안내해 주세요.”
“안 그래도 선생님을 찾아온 환자분이 있어요.”
“지금요?”
외래 환자가 왔다는 말에 태경이 시계를 쳐다봤다. 외래 환자가 오기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원래 우리병원의 외래 시작 시간은 오후였다. 태경이 온 뒤로 외래 진료 시간이 많이 빨라지긴 했지만, 아직 외래 환자들이 올 시간은 아니었다.
“네, 잠깐 화장실 들렀다 온다고 하셨는데……어! 저기 오시네요.”
“그럼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환자분 진료실 들어가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
드르륵-
다리를 살짝 절며 들어온 환자를 보자 동공이 커진 태경이 급하게 의자를 밀어 재끼며 책상을 벗어났다.
“환자분 무슨 일이세요?”
태경은 환자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쏟아 내며 상태를 살피려 했다.
“어디가 아프세요?”
“이거 보세요. 제가 아마 놀라실 거라고 했죠?”
“네, 정말 간호사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태경의 다급함에 환한 미소로 화답한 사람은 공사장에서 복부가 관통해 수술했던 최선해였다.
“선생님 저 멀쩡합니다. 아픈 곳 없어요.”
그동안 최선해는 수술 후 경과가 좋아 퇴원했었다. 그 뒤 주기적으로 외래로 와서 몸 상태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다음 외래가 정확히 일주일 뒤였는데 느닷없이 이른 시간에 찾아오니 놀랐던 것이다.
“아픈 곳 하나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혈색, 표정, 몸 상태 그리고 다섯 번째 바이탈까지. 모든 게 정상이라는 걸 확인한 태경은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진정시켰다.
“그럼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오늘 근처에서 동료를 만나기로 했는데 선생님께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최선해는 흰색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청첩장입니다. 입원했을 때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정확히 기억한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 때문에 그가 한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요. 기억나죠. 그땐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꼭 결혼식장에 와 주셨으면 해서요.”
“제가요?”
“네, 저를 살려 주신 분이라 우리 가족에게는 선생님이 의미 있는 분이시거든요.”
“이거 너무 좋게 말씀해 주시는데요.”
“정말입니다. 사실 오늘 제 딸이 같이 오겠다는 걸 괜히 선생님께서 부담스러우실까 봐 제가 말렸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가야죠. 근데 날짜가 아직 꽤 남았네요.”
청첩장을 보니 결혼 예정일이 무려 3개월이나 뒤였다.
“그래서 일부러 지금 드린 겁니다.”
아직 청첩장을 돌리기는 이른 시기였지만, 태경이 일정을 생각해서 미리 전달한 최선해였다.
그만큼 꼭 참석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결혼 날짜에 급한 일이 없다면 꼭 참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꼭 오신다고 생각하고 우리 미리한테도 그렇게 전달할게요.”
기분 좋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돌아갔다.
“오늘 이왕 오신 거 외래 보시고 다음 외래일 변경하는 게 어떨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픔과 근심도 없어진 최선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
* * *
“아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요양병원에서 외출한 김꽃분은 아들의 면접을 위해 전날 도착했다.
“참, 너 옷 뭐 입고 갈 거야.”
“뭐 입고 가긴. 평상시에 입던 옷 입고 가야지.”
“너 설마 지금 면접에 이 옷을 입고 간다는 건 아니지?”
장득칠이 꺼낸 옷을 본 김꽃분을 기가 막혔다.
“그 설마가 맞는데.”
“미쳤네. 미쳤어. 어디 빚 받으러 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런 옷을 입고 다녀.”
벽에 걸린 옷은 품이 큰 정장 바지와 등판에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재킷으로, 장득칠이 평상시 교복처럼 입던 옷이었다.
“뭐 어때서. 지금까지 저 옷 입고 잘만 다녔어.”
“너 지금 돈 뺏으러 가는 거 아니야. 면접 보러 가는 거라고. 면접 볼 때 정장 입고 가는 거 몰라?”
“아, 됐어. 내가 무슨 회사원이유? 그런 옷 입으면 막 두드러기 날 거 같아서 싫어.”
“지랄 발광 육갑떨고 있네.”
“아주 말씀이 걸쭉하신 게 역시 우리 꽃분 씨야.”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 입고 가.”
“이게 뭐야?”
장득칠은 김꽃분이 내민 검정색 정장 한 벌을 보며 물었다.
“뭐긴 뭐야 네 옷이지. 어제 서울 올라오면서 네 사이즈 맞춰서 한 벌 샀어.”
“거참. 돈도 없는 양반이 본인 거나 사시지 뭣 하러 쓸데없는 데 돈을 써. 붙을지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입! 입!”
면접을 보러 가기도 전에 막말을 하는 장득칠의 입을 김꽃분은 손바닥으로 쳐 댔다.
“이게 어떤 기횐데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너 사람이 말이 씨가 된다고 ‘나는 붙는다’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알았어?”
“네, 알았습니다.”
“맞다! 너 이력서에 이름 장현수로 쓴 거 맞지?”
이력서를 쓰는 당일에도 몇 번이나 확인하던 김꽃분은 또 이름 타령을 시작했다.
“그렇다니까. 아니 아들내미 본명이 장득칠인데 왜 쓰지 말라는 거유?”
“야, 이눔아. 안 그래도 얼굴에 무시무시한 흉터가 있는데 이름까지 득칠로 적어 봐. 아주 그냥 얼굴이랑 이름이 세트로 깡패 같잖아.”
“아들한테 참 좋은 소리 하십니다. 그래도 난 내 이름 남자답고 좋은데.”
“나는 네 이름 현수로 하고 싶었어. 근데 시아버지가 득칠이로 해야 명이 길다고 어찌나 반대하시든지.”
김꽃분은 아들의 와이셔츠를 정성스럽게 다리며 말을 이었다.
“네 친할아버지가 무서워서 입도 뻥끗 못 했다니까.”
“하긴 우리 할아버지 포스가 어마어마하시긴 했지.”
“자! 다 됐다. 입어 봐.”
“뭘 수고스럽게 시리…….”
입을 삐딱하니 투덜거리면서도 처음 제대로 된 정장을 입은 장득칠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야! 뉘 집 아들인지 아주 듬직하니 멋있다.”
“아까는 깡패 같다더니?”
“내 새끼라 예쁜 거지 밤에 길가다 만나면 도망치고 싶게 생기긴 했어.”
“거참. 면접 보러 가는 아들한테 할 소리가 따로 있지.”
“떨지 말고 잘하고 오라고 농담한 거여. 아까 엄마가 한 말 잊지 않았지?”
“그 많은 말을 어떻게 다 기억해.”
“거기 원장님이 무슨 말씀하시면 무조건 열심히 죽어라 일하겠다고 간절하게 말해.”
“알았어.”
“그리고 병원은 아픈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좀 까칠해도 성질부리지 말고 친절하게 굴어.”
“알았다고요. 무슨 유치원생 면접 보내? 내가 알아서 하고 올게.”
“마지막으로 웃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으니까 무조건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해.”
“우리 꽃분 씨 걱정도 팔자네.”
“이것아, 네가 나이나 작아야지. 요즘 젊은 사람들도 취업하기 힘들잖아. 떨어져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후회 없이 면접 보고 와. 이왕이면 붙으면 더 좋고.”
“알았수. 열심히 하고 올게.”
“득칠아? 아 해 봐.”
“……?”
“입 벌려 보라고.”
“입은 왜……아!”
따져 묻는 장득칠 입에 김꽃분은 강제로 엿을 쑤셔 넣었다.
“엿 먹으라고. 그거 먹고 철썩 같이 딱 붙으라고.”
“하여간 못 말려. 다녀올게요.”
“그려. 잘하고 와. 항상 웃고 대중교통 탈 때도 인상 쓰지 마.”
요란한 응원과 함께 장득칠은 드디어 면접 장소인 병원으로 향했다.
“면접이 뭐 대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