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김태경의 분수
신화대학병원-
거짓말 조금 보태서 민족 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무리가 정문 로비에 모여 있었다.
웬일인지 해가 지기도 전에 퇴근을 하는 병원장 고계득을 필두로 각과 주요 선생들이 저마다 하나같이 방긋 웃는 얼굴들이었다.
“고 원장 자네 때문에 이번에도 아주 잘 쉬다 가네.”
“아닙니다, 의원님.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다 저희 선생님들이 애써 주신 걸요.”
“하하하! 이 사람 겸손은.”
고계득이 퇴근까지 미루고 가식적인 웃음을 팔고 있는 건 건강 검진차 입원한 국회의원의 배웅 때문이었다.
“비켜 주세요.”
“응급 환자 지나갑니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응급실 입구에서는 피가 흥건한 TA(교통사고)환자들이 이제 막 도착했다.
“잠시만 길 좀 터 주세요.”
축 늘어진 환자와 촉각을 다투는 구급대원의 외침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도 들렸지만, 고계득과 무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부지원금 말인데……. 아마 신화대병원이 선정되지 싶어.”
“아고. 의원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무슨 소리야. 국민들 건강에 힘쓰는 신화대병원이 타야 우리들도 일할 맛이 나지 않겠나.”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보다 고계득에게는 국회의원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일반 환자들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VIP들은 자신과 병원에게 큰 이익을 갖다 주기 때문이었다.
“항상 저희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각자 할 일을 하는 건데. 그보다 다음 달에 우리 아들 내외가 들어오는데 건강 검진을 좀 받았으면 하는 거 같더라고.”
“연락 주시면 제가 잘 도와드리겠습니다.”
“고 원장 때문에 내가 항상 든든해. 수고했어.”
“고생하셨습니다.”
부웅-
국회의원 차가 로비를 떠나자마자 고계득은 웃음기를 싹 걷어 내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하여간. 저 인간은 준만큼 뽑아 먹으려고 하는 그지 근성이 있어.”
“원래 있는 사람들이 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야. 김태경 이 병원 아니래.”
뒤따라오는 의사들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때마침 지나가는 여자의 통화 소리가 고계득의 관심을 끌었다.
“김태경 선생님 그만둔 지 좀 됐대.”
요즘 한참 관심 인물인 태경의 이름이 나오자 고계득은 일부러 걸음 속도를 늦췄다.
“해진 엄마가 신화대 너튜브에 있다고 하길래 나도 그런 줄 알고 왔는데 예전 영상이래잖아. 그래서 그냥 기다렸다 시간 되는 의사한테 검사 받고 이제 끝났어.”
여자의 통화를 대충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태경에게 진료를 보고 싶어 하는 소리였다.
저 여자의 말대로 그만둔 지 좀 됐건만 아직도 태경을 찾는 환자들이 꽤 있었다.
“이 과장님, 아직입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답변이 올 겁니다.”
고계득은 태경과 만난 이동훈의 소식을 물었지만, 이 과장 역시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지 말고 이동훈 선생한테 다시 확인해 보세요.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 원장님. 알겠습니다.”
* * *
“하여간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 과장은 사무실로 향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Rrrrrrrrrr
“…….”
통화 연결음 소리와 함께 벨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이동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무실에 안 계시길래 저도 막 전화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오셨네요.”
“나도 지금 이동훈 선생님한테 전화 중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이동훈을 사무실로 안내한 이 과장의 표정은 한껏 기대감에 차 있었다.
“우리 김 선생을 좀 만나고 왔습니까?”
“예.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요? 제가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동훈은 태경을 만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일부러 지금까지 만나지 않았다며 둘러댔었다.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과장과 병원장 두 인간이 얄미워서였다.
그렇게 사람을 힘들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안달복달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질질 끌며 답답하게 한 것이다.
“어떻게 김 선생과 대화를 좀 해 봤나요?”
“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수직 제안도 전달했고요.”
“그럼요. 과장님과 원장님이 애타게 기다리고 원하는 게 있다면 그 조건 다 맞춰 준다고 자세히 전했습니다.”
“그래, 우리 김 선생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니지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 언제쯤 복귀가 가능하다고 하나요?”
이 과장은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긴 대한민국 메이저 대학병원에서 교수 자리는 물론이요 원하는 건 다 해 준다고 하는데 누가 거절하겠는가.
미친놈이 아니고서 절대 거절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인 건 분명했다.
“연구비 전폭 지원해 준다는 말 듣고 김 선생이 좋아했을 겁니다.”
태경의 복귀를 애타게 기다리는 건 비단 원장만은 아니었다. 이 과장은 물론이야 외과 전체가 태경을 기다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 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 게 아니라 아쉬움은 더 커져 갔다
“과장님. 말씀드리기 전에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럼요.”
“과장님은 지금 의사로 일하시면서 행복하신가요?”
“행복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이 과장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 선생님, 무슨 철학책 읽었나요?”
“안 읽었는데요.”
“의사한테 그런 낭만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아무나 붙잡고 한 번 물어보세요. 행복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형 병원은 셀 수도 없는 환자 진료와 수술의 반복이라면, 로컬은 병원 운영과 함께 그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이런 영양가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언제 복귀한다고 합니까? 이번 달?”
“아니요. 안 온답니다.”
“뭐, 뭐라고요?”
순강 이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뜩 기대한 마음에 찬물이 아닌 빙하수를 끼얹은 꼴이었다.
“안 와요?”
“네, 거절했습니다.”
“거절을 해요? 이 조건을? 이 신화대병원 교수 자리를 감히!”
“네. 전혀 망설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시원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김태경이 그거 미친 거 아니랍니까?”
남들은 되고 싶어 줄까지 서서 들어오는 교수 자리였다.
게다가 본인 또한 교수가 되고 싶어 인고의 시간을 개고생하며 보냈으면서 이렇게 쉽게 거절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유가 뭐랍니까?”
“행복해서요.”
“뭐, 뭐라고요?”
“지금 의사로서의 삶이 행복하답니다.”
“아, 아니……. 그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지금 나랑 장난하십니까? 그걸 믿으라고요?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예. 김 선생이 존x 행복하대요.”
물론 태경이 비속어를 쓰진 않았다. 이동훈이 개인적으로 시원하게 욕을 한번 하고 싶어서 넣은 거였다.
“원장님께도 그렇게 전하시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 그만 건드리세요. 그리고 저 분원 자리 필요 없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탁-
이동훈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이 과장을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저 표정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그냥 거절도 아니었다. 태경은 그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애원도 해 봤고 사탕발림도 해 봤다. 하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동훈은 그날 태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 선생. 가자. 이번 기회 잡으면 앞으로 신화대병원에서 입지도 확실히 잡고 정년 때까지 편하게 환자 볼 수 있어.’
‘말씀은 감사한데 저 안 가요. 앞으로도 갈 일 없을 겁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고?’
‘좋은 기회라는 거 저도 알죠.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근데 왜? 이유가 뭐야?’
‘이 선생님 행복하세요?’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금 의사로서 행복하시냐고 묻는 겁니다.’
‘행복은 무슨 행복이야. 그냥 일이니까 하는 거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이유나 말해 봐.’
‘전 지금 의사로서 행복하거든요. 그게 제 이유입니다.’
‘뭐?’
‘여기서는 등 떠밀려 진료하지도 눈치 보지도 않고 환자에게 오지랖을 부려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환자와 진심으로 소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신뢰한 채 치료에 전념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일하니까 되게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갑니다.’
태경의 표정을 보니 진짜였다.
만약 저 표정이 연기라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만큼 저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원장님이랑 과장님한테 전해 주세요. 행복하게 일하니까 다신 저 찾지 말라고요.’
‘나 사실 오늘 김 선생 설득하러 왔는데 내가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네.’
그날 이동훈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태경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의사로서 가장 피를 많이 보고 가장 치열하게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태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탕을 손에 쥔 3살 아이처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상당히 쇼킹했다.
“의사가 저렇게 행복한 직업이었나? 하여간 김태경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이 아니라니까.”
* *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계득은 원장실을 찾은 이 과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김 선생이 거절했습니다. 지금 일하는 병원이 행복하니 다시는 찾지 말라…….”
탕- 탕-
책상에 앉아 있던 고계득은 이 과장의 말허리를 단숨에 끓으며 책상을 세차게 내리쳤다.
워낙 성질머리가 지랄 맞은 사람이라 예상은 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 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계득은 지금 태경의 복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갖고 온 겁니까?”
“면목 없습니다. 김 선생이 워낙 확고해서 복귀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깟 코딱지 병원에서 대장 놀음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 병원에서 수련한 기간이 얼마인데 그따위로 굴면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원장님. 신화대병원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렸습니다.”
이 과장 역시 아쉬운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동훈이 사무실을 나간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경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원장님. 기분이 언짢으시겠지만, 다른 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공백을 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태경이 이거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말이죠.”
신화대병원 내에서 고계득의 별명은 뱀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사하게 굴기 때문이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오죽하면 의대 동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람이 더럽다는 표현을 썼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이 과장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내 자신을 알라입니다. 사람이 말입니다. 분수를 알아야 해요. 분수를 모르면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추락해서 다시는 기어오르지도 못하죠.”
“그럼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김태경이 분수를 좀 알게 해 줘야겠습니다.”
“예!?”
“사실 김태경이 그놈이 그딴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신화대병원의 명성 때문 아니겠습니까?”
“어쩔 생각이신지…….”
“뭐,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행복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요.”
고계득은 기분 나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소름끼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