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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94화 (93/472)

94화. 이찬희! 다시 보고해 봐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잘 좀 부탁드릴게요. 같은 의사잖아요.”

이찬희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태경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환자에게 향했다.

‘항상 지금 네가 할 일과 눈앞의 환자에게 집중해.’

“그래,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내 일을 잘하면 돼. 내 앞의 환자를 생각하자.”

챠륵-

이찬희는 커튼을 힘차게 재끼며 환자를 대면했다.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

“네……. 너……너무 아파요.”

“아니, 선생님. 엄마가 내시경 받으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정말 어제부터 하루 종일 아파하시는 거 있죠.”

80세 여자 환자와 그 딸인 보호자가 이찬희를 보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배가 너무 아파요.”

“선생님, 이렇게 엄마가 계속 배가 아프다고 하세요. 검사받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어요.”

얼핏 봐도 환자가 심한 복통에 시달려 보였다. 환자는 160cm 정도 되는 키에 복부 비만이 어느 정도 있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80세 할머니의 외모였다.

“선생님, 우리 엄마 아픈 것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네, 우선 진통제 강한 거 드릴게요. 그리고 환자 과거력이 있나요?”

“딱히 없으신데 신장이 좀 안 좋다는 말을 듣곤 하셨어요.”

“당뇨나 고혈압은 없으시고요?”

“네. 그런 병은 없으셨어요. 근데 어제…….”

“아아악! 아이고!!”

보호자인 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환자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선생님 너무 아픕니다. 너무 아파요.”

그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환자는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다.

“여기요. 우선 페치딘(pethidine, 마약성 진통제) 주세요. 처방 낼게요.”

“네, 선생님.”

“엄마? 괜찮아? 엄마!”

보호자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환자 옆에 찰싹 붙어 자신의 엄마를 살폈다.

“저, 보호자분. 진통제가 들어가지 전에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제가 촉진을 해야 하거든요. 잠시 좀 비켜 주시겠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엄마 좀 잘 부탁드려요.”

“환자분 많이 아프시죠? 지금 어디가 제일 아프세요?”

“아이고 선생님 다 아파요. 정말 죽겠어요.”

보통 노인분들이 어느 정도 약간의 엄살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 노인 환자는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을 계속 쏟아 낼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가 배 좀 볼게요.”

이찬희가 우선 배를 촉진해 본다. 아랫배에서부터 상부인 위 근처까지 촉진을 이어갔다.

‘어!?’

그런데 촉진이 이상하다.

이렇게 아파하는 와중에 배를 지그시 눌렀는데도 불구하고 통증이 악화되지 않고 있었다.

보통 복부 문제로 복통이 심한 환자들은 촉진 시 큰 통증이 악화되어 즉시 아픔을 호소한다. 그런데 통증이 크게 악화되어 보이지 않았다.

‘촉진할 때와 안 할 때가 별 차이가 없다고?’

어떤 곳을 눌러 보아도 누르지 않을 때와 비슷했다.

“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찬희는 환자의 복부 근육 강직이 전체적으로 분명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복막으로 염증이 퍼질 경우 자연스럽게 강직이 생긴다. 그건 응급 수술의 매우 중요한 지표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애매하다. 아닌 것도 같고 맞는 것도 같았다.

‘왜 강직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환자라면 당연히 엄청난 강직이 있을 것 같았다. 이찬희는 애매한 촉진에 다소 당황했다.

“선생님 페치딘 준비됐습니다. 지금 투여할까요?”

“네, 지금 바로 주세요.”

이찬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진기를 꺼내 환자의 복부 끝에 갖다 댔다.

‘안 들리잖아?’

청진기로 들려야 할 장음이 하나도 안 들렸다. 멀리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지만 공허하게 들려왔다.

신체검사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이찬희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조금 뻔했기 때문이다.

내시경 이후에 엄청난 복통이면 대다수가 천공이 원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검사를 했지만,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선 CT를 찍을 건데요. 환자가 평소에 신장이 안 좋다는 말을 들으셨다고 해서 피검사 후에 신장수치 보고 촬영할게요.”

환자는 보호자와 함께 CT를 찍으러 갔고 내과의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이찬희는 CT를 기다리며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스토막 퍼포레이션(stomach perforation, 위천공)이 아닌가? 그럼 뭐지?’

환자의 복통 원인을 계속해서 생각하던 이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간호사를 쳐다봤다.

“CT 늦어지네요? 무슨 일 있나요?”

이쯤 되면 올라와야 할 영상이 30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선생님 지금 응급실 환자들 순서대로 찍고 있다고 해서요. 혹시 응급이면 다른 환자보다 빨리 찍어 달라고 할까요?”

“네, 먼저 빨리 해 달라고 해 주세요.”

“선생님 LAB나왔습니다.”

그사이 간호사가 피검사 결과가 나왔음을 알렸다.

딸깍-

이찬희는 빠르게 마우스를 클릭하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이 신장기능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염증 정도 혹은 감염 정도를 나타내는 WBC, CRP 등의 수치가 생각보다 높지 않게 나왔다.

“이게 다라고?”

천공이라면 그 수치가 2배, 3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정상 수치보다 20% 정도 상승된 것이 다였다.

‘하! 원인이 뭐지? 천공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답답했다.

“저, 선생님……?”

내시경을 했던 내과의가 다시 이찬희 옆에 다가왔다.

“네?”

“혹시 환자는 어떤 거 같나요? 스토막 퍼포레이션인가요?”

“그게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 검사 수치와 신체 검진상으로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혹시 보호자들에게 말 좀 잘 해 주실 수 있나요?”

아닐 수도 있다고 했지 아니라고는 하진 않았다. 그런데 안절부절못하던 내과의는 표정이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네? 말을 잘 해 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알면서 그러세요. 그러니까 내시경을 하다 보면 이렇게 될 수 있다 뭐, 그런 정도로 가볍게라도 언질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

그 말에 이찬희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있는 내과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실 그렇잖아요. 제가 뭐 위벽을 뜯은 것도 아니고 통상적으로 한 것뿐인데 이렇게 된 거는 환자의 위벽의 문제가 원채 심해서 그렇다고 볼 여지도 있잖아요. 그렇죠?”

내과의는 약간의 웃음기와 함께 빠르게 많은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보기 싫고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찬희는 선배 의사라서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지인이라면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선배 의사로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해서 참고 있었다.

“검사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결국 이찬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답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제 말을 이해해 주신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이네요.”

“……!”

이찬희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꾹 눌러 내렸다.

‘어떻게 저러지?’

어이가 없고 이제는 화까지 났다. 하지만 굳이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저런 사람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후다다닥-

“선생님! 선생님?”

급하게 뛰어온 간호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내시경 받은 선생님 환자 혈압 떨어져요.”

이찬희는 간호사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환자에게 뛰었다.

“엄마! 엄마, 정신 차려! 선생님저희 엄마 왜 이래요?”

“환자 언제부터 이랬어요?”

“방금이요. 바로 말씀드린 거예요.”

“우선 normal saline 조절 하지 않고 bolus(조절 장치를 최대로 연 상태로 환자에게 투여하는 것)로 주세요. 산소포화도는 어떤가요?”

“지속적으로 떨어집니다.”

‘뭐지? 감염인가? 쎕시스(sepsis, 패혈증)인가? 아니면 천공이 맞나?’

이찬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천공이든 무엇이든 이렇게 WBC, CRP가 높지 않은데 패혈증이 온 건가 싶었다. 게다가 과거력은 없는데 혈안은 왜 계속 떨어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환자 혈압이 계속 떨어져요!”

“수액 주고 있나요?”

“네. 들어가고 있는데 효과가 없어요.”

“에페드린(ephedrine, 혈압 저하 시 처음으로 적용해 볼 수 있는 혈관수축제) 준비해 주세요.”

“환자 새츄(satu, 산소포화도를 일컫는 약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모르겠다. 뭐지?

이찬희는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환자 상태는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르게 환자 상태가 나빠지는 것도 흔한지 않았다.

‘침착해! 침착하자.’

스스로를 격려하며 머릿속에 저장된 의학적 지식을 꺼내려는 찰나,

“원장님!!”

간호사의 외침에 이찬희의 모든 세포가 반응하며 뒤를 돌아봤다.

응급 수술을 마친 태경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다.’

이찬희는 구세주를 영접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태경이 너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환자에 대해서 속수무책일 때 자기보다 상급자가 오는 것은 절대적으로 힘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태경이지 않은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선생님!”

이찬희는 얼른 태경에게 뛰어갔다.

“선생님 수술 중이신 줄 알고 연락 미리 못 드렸습니다. 80세 환자가 내시경 이후로…….”

태경의 옆에 딱 붙은 이찬희는 빠르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태경의 행동이 이상했다.

중요한 브리핑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갑자기 옆에 있는 응급 수술과 술기가 가능한 처치실로 쑥 들어가 버렸다.

“서, 선생님?”

그리고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태경이 다시 나왔다.

“환자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고 산소포화도도 동시에……?”

이찬희는 태경의 손을 보고 브리핑을 멈춘 채 질문했다.

“선생님 그거 복수 천자 때 사용하는 니들(needle) 아닙니까? 어디다 쓰시려고?”

복수 천자에 사용하는 니들은 길이가 10cm정도 된다.

두께도 다른 니들에 비해서 두꺼운 편으로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 거의 흉기에 가깝게 보였다.

저벅저벅-

김태경은 그 니들을 들고서 환자 앞으로 걸어가고 걸어갔다. 그리고 옆에 다른 환자 처치를 위해 꺼내 두었던 주사기에 그 무지막지한 니들을 연결한 뒤,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옆에 놓여 있던 포비돈 통의 뚜껑을 따서 환자의 배에 들이붓는다.

“어……?”

“!”

‘갑자기 포비돈은 왜…….’

이 행동에 주변에 있던 보호자와 간호사 그리고 이찬희는 일동 당황하여 행동을 멈칫했다.

태경은 그 옆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서 혈압이 떨어지고 있는 환자의 복부를 망설임 없이 그 큰 니들로 순식간에 찔렀다.

“어머! 이 선생님 지금 뭐하는 거예요?”

“보호자분, 잠시 이쪽으로 나와 주세요.”

그 행동에 보호자가 놀래서 크게 소리치자 간호사가 커튼을 치며 베드 밖으로 안내했다.

그사이 태경은 태연한 표정으로 바늘을 빼냈다.

-푸슈우우우

바늘이 빠짐과 동시에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에 띄게 환자의 복부 직경이 바로 작아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환자에게 풍기던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도 안정권으로 돌아왔다.

“어! 작아졌다.”

전체적으로 비만인 편이라 몰랐지만 환자의 배는 굉장히 팽창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경은 환자의 배 위아래를 약한 힘으로 누른 뒤 가스를 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이찬희! 다시 보고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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