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의료사고
그리고 날카로운 외침을 뻔뻔한 면전에 던졌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생각지 못한 불호령에 여의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움찔했다.
“당신 의사 맞아?”
“……!”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이럴 거면 그냥 오지를 마요. 수술이 끝났으며 환자의 안위를 먼저 물어야지. 보호자 앞에 두고 뭐하는 짓입니까?”
불같이 화내는 태경의 외침을 들은 여의사는 이제야 분위기 파악이 됐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느끼는 분위기 파악이 아니었다.
보호자란 단어를 듣자마자 진짜 보호자 옆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본 것에 대한 자신의 미련함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좀 조용히 물어볼걸. 괜히 보호자가 꼬투리 잡겠네.’
눈물 맺힌 얼굴로 자신을 째려보는 보호자를 보며 여의사는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태경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같은 의사끼리 쪽팔리게 굴지 맙시다. 네!”
“마,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지나쳐? 지금 당신이 하는 언행은 안 지나치고? 양심은 어디 엿 바꿔 먹었습니까?”
평소에 태경이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분노였다.
“그리고 이런 거 물어보려거든 오지 마세요. 그냥 정식 절차대로 하시고. 보아하니 이미 변호사 선임도 했겠네.”
태경은 콧방귀를 끼며 보호자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
여의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지나치는 태경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선생님, 저희 엄마 수술은…….”
“많이 걱정하셨죠? 수술 잘 끝났습니다.”
“하!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태경은 그 뒤 10분 정도 보호자에게 자세한 수술 내용과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며 이찬희와 함께 보호자 대기실을 나왔다.
“아까 선생님 화내시는 거 보고 놀랐어요.”
“화? 나 화 안 났어. 무슨 소리야.”
“네? 아니 아까 분명 소리치시고 그러셨잖아요.”
“아, 그거?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요?”
“그래, 일부러 정신 차리라고. 당신 의사라고 말이야. 그럴 때는 선배 의사라도 할 말은 해야지.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 그 선배 의사에게도 그리고 보호자에게도.”
“예의…….”
“그리고 오늘……. 뭐야. 어디 갔어?”
이어서 말을 하며 걷던 태경은 옆자리가 허전한 걸 느꼈다.
“너 안 오고 뭐하고 있어?”
뒤를 돌아보니 2미터 남짓한 간격을 두고 가만히 서 있던 이찬희가 태경을 보며 씨익 웃음을 보였다.
“뭐냐, 그 기분 나쁜 웃음은?”
“선생님도 참. 기분 나쁘시다니요. 뭐랄까.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동에 잠시 가슴이 벅찼다고 할까요.”
방정맞은 소리와 함께 입이 살아난 걸 보니 이찬희의 놀란 마음과 긴장감이 다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냉철한 판단! 환자를 향한 마음! 멋진 인성! 그리고 훌륭한 실력까지. 저는 어떡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무슨 웅변대회 나왔어?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해라.”
“정말 닮고 싶습니다.”
“비법이 알고 싶어?”
“비법이 있나요?”
“그럼, 일단 방금한 수술 복기를 두 번 할 것.”
“두, 두 번……!”
“그리고 오늘 당직을 할 것. 이게 비법이야.”
“당직이요? 아니. 잠시만요.”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에 이찬희는 가던 길을 멈추고 태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전 말이죠. 제가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도 두 번은 안 봐요. 그 좋아하는 배트맨 시리즈도 딱 한 번씩만 봤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비켜.”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복기 노트를 두 번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 드린 거예요.”
“너 오늘 놀라서 수술 내내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놀란 건 맞지만 집중은 했다고요.”
“그래? 그럼 내가 오늘 수술 중에 봉합 몇 번 했는지 이리게이션은 총 몇 번 했는지 말해 봐.”
“……예?”
“거봐. 너 대답 못 하잖아. 요즘 내가 좀 풀어 주니까 정신 못 차리지?”
억지가 아니었다. 평소 이찬희라면 저 질문에 즉각 대답하고도 남았을 거다.
단순히 오늘 환자일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어 이찬희가 살짝 들떠 있는 분위기라 채찍을 든 것뿐이다.
“불만 없지?”
“불만 있으면 더 난리 날 거 같아 없다고 하겠습니다.”
“당연하지.”
“그런데 저 오늘 당직 아닌데요?”
“너 때문에 환자 엄청 많이 왔으니까 당직해야지.”
“아니, 선생님 그게 무슨 억지 논리예요?”
“네가 비 오라고 노래 불러서 비가 왔고 덕분에 환자 많이 왔으니까 당직해야지. 안 그래?”
주말에 당직이라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이찬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직은 좀 정말 하기……. 한 번만 봐주세요.”
“안 돼.”
“어차피 선생님 계시잖아요.”
“주말인데 손 하나 더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최 선생이 당직인데요?”
“잘됐네. 사이좋게 다 같이 당직하면 되겠다.”
“선생님!!”
이찬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태경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 * *
“이거 보세요? 선생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태경과 이찬희가 나온 대기실에서는 보호자가 문제의 의사와 대화 중이었다.
“제가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그때도 괜찮을 거라고, 원래 나이가 많아 그럴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네, 그런 거 같기도…….”
“그때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 줬더라면 우리 엄마 이렇게 아파하면서 이 밤에 응급실 오지도 않았고 수술도 안 했을 거예요.”
“보호자분의 심경 충분히 이해합니다.”
심경을 충분히 이해한다던 말과 달리 의사는 지금까지 사과 한 마디 전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똑같은 말은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지겨워!’
그저 10분이 넘도록 이어지는 지겨운 하소연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이해요? 선생님 같으면 이 상황이 이해되시겠어요? 까딱 잘못했으면 우리 엄마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다고요.”
“그래도 어머님이 수술이 잘돼서 괜찮다고 하시니까…….”
“뭐라고요! 어떻게 미안하다는 소리 한 번을 안 해요?”
어쩜 의사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는지 보호자는 기가 막혔다.
가뜩이나 태경을 본 뒤로 같은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확연한 차이와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저는 그쪽처럼 의사도 뭣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 당신이 하는 전문적인 거 그런 거 몰라요. 하지만 사람이 잘못됐으면 일단 사과를 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그리고 제가 분명히 몇 번이나 물어봤죠? 엄마 연세가 많으신데 내시경 괜찮겠냐고? 근데 당신이 괜찮다고 다들 하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제가 한 건 맞아요. 그런데요. 보호자분. 실례지만 이게 완전히 제 탓만 하실 건 아닌 거 같아요.”
“…….”
그저 진심을 담은 사과 한 마디를 바랐던 보호자는 의사의 안하무인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그게 할 소리인 가요?”
“사실 환자분께서 워낙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위벽이 원래 약했던 거예요.”
그렇게 극에 달한 뻔뻔함이 계속되던 순간,
“악!”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의사의 고개가 순식간에 뒤로 확 재껴졌다.
“누구야! 이 여자야?”
키가 상당히 큰 중년 여자가 들어와 의사의 머리채를 잡은 것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야! 네가 울 엄마 죽일 뻔한 그 의사x이냐?”
“얘, 미희야?”
연락을 받고 온 보호자의 여동생이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언니 이 여자 맞지?”
“이거 못 놔요? 빨리 놔.”
고상한 척 혼자 다 하던 의사는 머리채가 잡히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를 높였다.
“어. 못 놓겠다. 어쩔래?”
“미희야 말로 해.”
“이 물건 아직 사과도 안 했다며? 내가 그래서 그 병원 가지 말라고 했지? 이 사람 실력 없다고 동네 소문 다 났다니까.”
“실력이 없다니? 그런 헛소문 퍼트리면 당신 고소당할 수 있어.”
“사람 죽게 만들어 놓고 고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만하고 일단 놓고 얘기해.”
언니의 계속된 만류에 동생은 잡고 있던 머리채를 마지못해 놓고 의사와 마주했다.
“어머, 내 머리카락!”
“이봐! 당신 빨리 사과해. 그러면 우리도 조용히 넘어갈게.”
“사과! 사람 머리를 뽑아 놓고 유언비어까지 퍼트리고 사과는 무슨 사과. 당신이 나한테 사과해야지!”
“언니도 다 들었지? 이 여자 말하는 거 보소. 너 때문에 멀쩡한 울 엄마 죽다 살아났잖아!”
“당신 엄마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걸 왜 내 탓을 해. 너 두고 봐.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명예훼손 그래? 해! 나도 너 의료 사고로 고소하면 돼. 대신 너도 울 엄마 아프게 한 벌은 받자.”
“어머, 미희야! 얘 미희야 안 돼!”
보호자의 만류와 함께 쫙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뺨을 맞은 의사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등학교 배구 선수 출신이 때린 싸대기는 달랐다.
“……!”
순간 맞은 곳이 너무 아프고 놀란 의사는 할 말을 잃은 채 뺨을 부여잡았다.
“어때? 아프지? 아까 우리 엄마는 더 아팠어. 이걸로 퉁치자고. 가자, 언니.”
“얘, 너는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면 어떡해. 진짜 고소하면 어쩌려고.”
“고소 못 해. 저 여자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로 머리 뜯기고 우리 동네 와서 간판 바꿔 오픈한 거래.”
자매는 의사와 담판을 짓고 대기실을 나와 엄마에게 향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 어쩐지 사람이 너무 뻔뻔하더라. 근데 저 여자 괜찮겠지?”
“언니 저 여자 걱정하는 거야?”
“네 손이 보통 손이니? 스파이크 때리던 손이니까 그렇지”
“걱정 마. 힘 안 줬어. 엄마 수술은 잘된 거지?”
“응. 여기 원장님이 잘해 주셨어. 선생님이 너무 젠틀하시더라.”
“그러니까 병원도 의사도 잘 보고 다녀야 해.”
* * *
수술을 마친 태경은 쉴 틈 없이 병동 회진을 돌았다.
“좀 어떠세요?”
“선생님. 또 오셨다.”
수술 후 입원 중인 이고철 병실에 들어가자 부인인 푸엉이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저는 다 좋습니다. 선생님.”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어요?”
“남편 계속 똑같다. 상태 아주 좋다.”
“이 사람 말 들으셨죠? 내가 수술한 환자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뭔 회진을 그렇게 많이 도십니까?”
우리병원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코 태경일 것이다. 그런데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으로도 모자라 새벽에도 회진을 했다.
이고철은 이런 태경이 참 신기하고 대단했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도 바쁠 때는 못 올 때도 있어요.”
“아직까지 못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요?”
“그런가요? 근데 회진 많이 돌면 환자분들은 좋아하시는데. 이고철 씨는 별로세요?”
“별로긴요. 저도 좋죠. 선생님께서 힘드실까 봐 하는 소리죠.”
“맞다! 선생님 너무 힘들겠다. 좀 쉬면서 살아라.”
“선생님도 건강관리 잘하세요. 그래야 나 같은 사람 많이 고치죠.”
“그렇긴 한데. 입원해 있는 환자분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건 또 맞는 소리네요. 하하하!”
“저도 건강관리 잘하고 있어요. 혹시 질문 있으세요?”
“그게 저 퇴원은 언제 할까요? 이 사람 때문이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어서요.”
“나는 괜찮다. 남편 너나 걱정해.”
“수술 경과도 좋고 칼슘 수치도 정상이라서 당분간 칼슘제제 계속 복용하고 며칠 더 지켜보다 퇴원할 거예요. 그리고 항암은 그 후 시작할게요.”
“며칠이면 기분 좋게 기다릴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쉬세요.”
* * *
“그럼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조절할게요.”
“그래요, 부탁해요.”
“선생님?”
스테이션에 전달 사항을 마지막으로 회진을 마친 태경이 계단으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불렀다.
“대장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아래도 내리자 우진이가 서 있었다.
“어구. 우리 우진이 아까 봤는데 왜 선생님한테 할 말 있어?”
“네, 대장 선생님.”
아빠한테 원장님의 뜻을 물은 우진이는 대장이라고 들은 뒤부터 태경을 대장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무슨 말인데?”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태경이 한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우리 우진이 선생님한테 할 말이 뭘까?”
모든 입원 환자들이 다 애틋하고 마음이 쓰였지만, 가장 신경이 쓰이는 입원 환자는 어린이 환자였다.
한참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또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때에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게 마음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경은 아이들을 대할 때면 총각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으로 아빠 미소를 보이곤 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이 뭘 도와주면 되는데?”
“두 가지인데요.”
“두 개나 있어? 그럼 하나 씩 말해 볼까?”
“우선 이거요.”
우진이는 비타민C 가루가 들어 있는 노란색 레모나 플라스틱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선생님 주는 거야?”
“아닌데……. 이거 대장 선생님 거 아니고 전해 주세요.”
“아! 이거 전해 주라고?”
“네. 맞아요.”
“그래 누굴 전해 줄……큭!”
태경은 아무 생각 없이 상자 뒷면을 돌려보다 그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큭! 큭!”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구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