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검은 점과 사탕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보안요원으로 일하게 된 장득칠입니다.”
장득칠은 병원 건물을 돌며 소개 때 못 본 직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온 곳이 식당 오계순이었다.
“네가 칼 갖고 설친 얼라들 정리했다는 문디가?”
“예, 맞습니다.”
“으흠. 어디 보자.”
오계순은 팔짱을 낀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득칠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손 내밀어 봐라.”
“예?”
“뭐고. 이기 귓구녕이 막혔나? 내 말 몬 들었나? 고마 손 내밀어 보라 안 카나.”
“아, 손이요. 여기.”
“이것 봐라. 니 칼 좀 만졌제?”
“……예?”
“손에 칼자국 있는 거랑 네 면상에 있는 상처랑 보니께 나쁜 짓 좀 하고 다녔는 갑제.”
장득칠은 느닷없이 손만 보고 자신의 과거를 얼추 맞추는 오계순의 추리에 놀랐다.
“혹시 깡패였나?”
“깡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을 한 건 아닙니다.”
“마 얼굴이나 표정 보니 그래 보인다. 근데 여기서 일하기로 한 이상 앞으로 개짓거리 하거나 그라믄 안 된다. 알긋나?”
“예. 이제 마음잡았습니다.”
“그 마음 단디 잡아라. 그라고 병원이 만만해 보여도 여가 보통 힘든 곳이 아니다. 미친년, 놈들이 주기적으로 오는 곳이 우리병원이다.”
“미친년놈이요?”
“그래. 지 새끼 때린 것들, 가정 폭력 하는 것들, 교도소에서 줘 터진 제소자 놈들까지 아주 골고루 비빔밥으로 온다 안 카나. 그라니께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해라. 알았나?”
“예, 여사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라고 우리 김 원장한테 항시 순종하고 고마 이제 퍼뜩 나가 일 봐라.”
인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장득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꽃분 씨보다 더한 사람은 처음 보네. 노인네 보통이 아니야.”
* * *
“몇 번 베드라고 했죠?”
“9번이요. 42세 남자 환자고요 오늘 아침부터 RUQ(right upper quadrant, 우상복부) 통증을 느꼈다고 하네요.”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환자를 보고 있었다.
챠륵-
“안녕하세요.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
“네, 선생님, 너무 아파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네, 종종 아팠어요. 근데요. 선생님? 제가 사실 며칠째 우리 와이프랑 냉전 중인데요. 이거 화병 아닌가요?”
가끔 부부 싸움을 하고 와서 이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환자들이 더러 있었다.
“네, 화병은 아닌 거 같고 지금 아프신 곳 한 번 짚어 보세요.”
“여기, 여기거든요.”
환자는 정확히 오른쪽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가 주로 어떨 때 아팠나요?”
“그게 식후에 주로 아팠던 거 같아요.”
“지금 아프신 곳이 담낭이 아플 때 주로 증상이 발생하는 곳인데요.”
“담낭이면 그 쓸개 맞죠?”
“맞습니다. 근데 담낭 외에 위염이나 십이지장 궤양일 때도 같이 아플 수 있어요. 감별을 위해서 CT 촬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피 검사도 같이 진행할게요.”
“네.”
“환자분 안내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환자분, 제가 도와드릴게요.”
진료를 마친 태경은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베드를 이동했다.
* * *
“다 왔네요.”
“촬영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일부러 병원까지 태워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저희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진료 보고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세리야 내려.”
도한연은 세라를 차에 그대로 둔 채 둘째인 세리만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탁-
“세라야?”
보조석에 앉아 있던 작가가 부르자 차창 밖의 병원을 보고 있던 세라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니까 세라는 알레르기 때문에 아이스크림도 못 먹었잖아. 세리만 먹던데.”
세라는 알레르기가 있지도 않았다. 도한연이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다.
“못 먹는 음식이 많다고 엄마가 그러던데. 그럼 우리 세라는 뭘 좋아해? 언니가 이따 세라 좋아하는 걸로 간식 사 줄게.”
“…….”
“세라 햄버거 좋아하니? 안 좋아해?”
“…….”
“그럼, 피자는? 피자 좋아해?”
“…….”
“음. 그럼 떡볶이는 어때?”
한창 아이들이 좋아할 음식이었지만 세라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햄버거도 피자도 떡볶이도 어떤 맛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먹은 기억이 너무 오래돼 좋아했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얘 놀라겠다. 그만 좀 물어봐.”
“세라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죠. 맞다. 피디님? 고 감독이 드라마에 세라 캐스팅하려고 했다는 거 진짜예요?”
고 감독은 유망주 아역을 발굴하는 드라마 감독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영상으로 세라의 모습을 본 감독은 끈질기게 캐스팅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걸 허락할 일 없는 도한연은 거절했다.
세라의 유명세로 호의호식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세라가 더 유명해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야. 그 눈 높은 양반이 몇 번이나 제의했는데 단칼에 거절했대.”
“정말요? 고 감독 드라마에 출현하면 아역 배우 코스 밟고 성인까지 엘리트로 갈 수 있는데 세라 엄마 대단하네.”
“내 말이. 다들 난리인데 세라 엄마는 애들 정서에 안 좋다고 그런 건 할 생각이 없다고 했대.”
“어머, 세상에. 진짜 대단하다. 현명하네요.”
“현명한 거지. 연예계가 얼마나 뒤가 구리고 더러운데 잘 생각한 거야.”
“안 그래도 세라가 평범하지 않아 쉽지 않았을 텐데 잘됐네. 어머! 세라야 혹시 이거 갖고 싶어?”
작가는 취재 수첩에 끼워 둔 캐릭터 모양의 작은 매직펜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세라에게 물었다.
“네.”
“이거 토끼 모양 매직인데 귀엽지? 귀도 움직인다. 언니가 세라 줄게.”
“감사합니다.”
“엄마 오실 때까지 그림 그릴래? 종이 줄까?”
세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더니 토끼 모양의 펜 뚜껑을 열고 양쪽 손바닥 중앙에 1cm 정도의 검은 점을 그렸다.
“세라야, 이게 뭐야? 동그라미?”
세라는 작가와 피디에게 점을 그린 양쪽 손바닥을 보여 줬지만, 그들은 검정색 점을 단순히 그림 놀이로 생각했다.
“세라 그림도 잘 그린다. 뭐 그린 건지 언니한테 알려 줄 수 있어?”
그 질문에 세라가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보여 준 그때였다.
탁-
“어머, 내 정신 봐! 세라야?”
둘째 딸과 병원으로 들어갔던 도한연이 뭔가 다급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세라는 도한연이 등장하자 펼친 손바닥을 빠르게 말아 쥐며 검은 점의 존재를 숨겼다.
“엄마가 세리 배 아픈 것 때문에 정신이 없었나 봐. 세라를 깜빡했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세라 제가 보고 있을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어우. 무슨 말씀이세요. 두 분도 촬영하느라 피곤하실 텐데. 그리고 전 우리 세라 없으면 불안해서 안 돼요. 세라야 이리와.”
탁-
세라는 말아 쥔 주먹을 조심하며 도한연과 병원으로 향했다.
“하여간 대단한 모성애다.”
“그러게요. 어쩌면 저러니까 복을 받아서 너튜브가 잘된 건지도 모르죠.”
* * *
“도한연 씨?”
“네, 저요. 세진아, 얼른 가자.”
접수처 직원이 이름을 호명하자 도한연이 둘째 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런데 데스크 쪽으로 향하는가 싶던 도한연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세라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너 여기서 꼼짝 말고 앉아 있어. 알았어?”
섬뜩한 소리에 세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멋대로 돌아다니거나 함부로 입 열면 집에 가서 북소리 아침까지 들을 줄 알아.”
“도한연 씨?”
“엄마, 빨리 가자. 이름 부르잖아.”
“그래, 가자.”
도한연은 접수처에 가까이 온 후에야 세라를 쳐다보던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진료 보러 왔거든요.”
“네, 도한연……. 어머, 세리 또 보네. 안녕하세요. 어머님.”
며칠 전 화장실 때문에 병원에 들렀던 도한연과 세리를 본 직원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그때 인사했던 직원이에요.”
“아, 네. 기억나요.”
“도한연이 어머님 성함이시구나. 어디 진료 보시게요?”
“제가 아니라 우리 세리, 아니 세영이가 어제부터 배가 아파서요.”
“아구. 우리 공주님 배가 아프구나. 접수해 드릴게요.”
“근데, 지금 제가 애들이랑 촬영하다 중간에 왔는데요. 응급실로 보는 게 빨라요, 외래가 빨라요?”
“아, 잠시만요.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
접수처 직원이 환자 현황을 확인하는 사이, 도한연은 고개를 돌려 또다시 세라를 확인했다.
“지금 좀 대기가 비슷한데요. 주말이 아니라서 응급실이 진료가 더 빠를 거 같아요.”
“그럼, 응급실 진료로 볼게요.”
“혹시 저희 병원 진료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그럼, 여기 이름이랑 생년월일 그리고 전화번호 적어 주세요.”
“네.”
* * *
“자기야, 뒤에 여자애 봤어? 무슨 아역 배우인가 봐.”
“아역 배우?”
세라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뒤를 힐끔거리며 함께 온 여자에게 말했다.
“애가 엄청 예뻐.”
“그래? 대박!”
뒤를 돌아본 여자는 세라를 단번에 알아보고 남자 친구의 어깨를 치며 좋아했다.
“웬일이야? 자기야 쟤 걔잖아. 내가 맨날 보는 키즈 채널.”
“그 세리세라인가 뭔가 그…….”
“그래. 세상에 병원에서 다 보네.”
여자는 남자 친구와 함께 고개를 돌려 세라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 너, 세라 맞지?”
세라는 도한연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대 어떡해. 언니가 세라 진짜 팬이거든. 세라 별그램에 가서 사진도 보고 좋아요도 매일 누른다.”
“애가 말이 없네.”
“그게 자ㅍ……. 암튼 그런 사정이 있어. 세라야 너 아파서 병원 온 거야?”
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도한연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걸 확인하자 천천히 양손을 펴고 커플에게 검은 점을 보여 줬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검은 점을 제대로 봐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응? 왜 손을 보여 주지?”
“낙서해서 지울 거 달라는 거 아닌가? 어릴 때는 몸에 낙서 같은 거 많이 하잖아.”
“어머, 자기 똑똑한 거 봐. 맞네. 세라야 언니가 물티슈 있거든. 물티슈 줄까?”
세라는 손을 든 채 고개를 흔들었고,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최모나가 아이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세라의 손을 쳐다봤다.
‘도와주세요.’
하지만 최모나는 콜을 받고 병동으로 향했다.
“세라야?”
그사이, 공포의 목소리가 세라를 불렀다.
“우리 세라 뭐하고 있었어?”
접수를 마친 도한연이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 * *
“환자분 CT 결과가 나왔습니다.”
태경은 다른 환자들을 진료한 뒤 우상복부 복통으로 CT를 찍은 9번 환자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됐나요? 선생님.”
“다행이 담낭은 깨끗해요. 그런데 십이지장에 궤양으로 의심되는 것이 보이거든요.”
“궤양이요?”
“네, 아직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더 심하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제가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까 꾸준히 오래 드세요.”
“무슨 약인가요?”
“위산 억제해 주는 약이에요. 자극적인 음식 피하시고 약 꾸준히 드세요.”
“약 잘 먹어야겠네요.”
“환자분 수납하실 때 처방전 가져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챠륵-
“외래 환자 지금 없죠?”
“네, 아까 다 보고 넘어오셨잖아요.”
“오늘은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지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진료를 마친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응급실을 나서고 있었다.
“당연하죠. 여태 환자 보느라 점심도 안 드셨잖아요. 얼른 가서 식사부터 하고 오세요.”
“그래야겠어요. 아으 배고프다.”
“맞다! 지금 대기실이 좀 시끄러울 거예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유명인이 우리 병원에 왔거든요.”
“유명인?”
그러고 보니 아까 환자를 진료하는데 옆 베드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네. 선생님처럼 너튜브 스타가 왔거든요.”
“내가 무슨 너튜브 스타ㄹ!”
순간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 가던 태경이 멈칫한 뒤 정색하며 입을 닫았다.
‘또다.’
며칠 전 느꼈던 독특한 다섯 번째 바이탈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놀이동산 사탕의 집과 풍선껌이 섞인 이상한 조합의 분뇨 냄새가 진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확실하다.’
그리고 태경은 확신했다. 이 냄새의 주인공이 현재 병원 안에 있다는 것을.
‘이번엔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