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02화 (101/472)

102화. Black Dot Campaign(블랙 닷 캠페인)

선망선이 즐비한 외국 항구.

항구와 가까운 숙소촌이 내일 항해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형님? 맥주 한잔하실라우?”

“내일 승선인데 맥주는 무슨.”

“에헤. 또 애들 영상 보고 있었어요?”

“이게 내 힘에 원천이라 계속 봐야 해.”

세영의 아빠 고영철은 함께 배를 타는 동료의 방문에 보고 있던 영상을 멈췄다.

“아니, 그렇게 예뻐요?”

“이 세상에 자기 자식 안 예쁜 사람도 있어? 너도 나중에 장가가서 네 자식 생기면 내 마음 이해 갈 거야.”

“난 그냥 혼자 사는 게 속 편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형님이랑 같이 배 탈 시간도 1년밖에 안 남았네요.”

“그러게 말이야.”

“정말 배 그만 타시게요?”

“애들한테 아빠 노릇도 하고 싶고 아내도 걱정하고 그만 타야지.”

고영철은 때려 죽여도 1년 이상은 원양어선 선원 생활을 안 한다는 그 일을 몇 년이나 지속했다. 힘들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일식집 하시게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다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니까. 다시 가게 열어야지.”

“아니, 근데 형님은 잘나가던 일식 요리사가 어쩌다 뱃사람이 되셨대요.”

“주제 모르고 가게 확장하다가 넘어진 거지 뭐. 자영업자들이 한 번 삐끗해서 손님 빠지면 그때부터 지옥이잖아.”

“저도 알죠. 자영업이나 사업이나 한번 미끄러지면 바닥이 없습디다.”

“그렇게 아등바등 하면서 뭔가 해 보려고 해도 쉽지 않더라고. 그때 와이프가 몇 년 바짝 고생해서 우리 가족 행복하게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

“지금 형수님이요?”

“응. 안 그래도 운동을 좋아해서 몸 쓰는 일에는 자신 있었거든. 뭔가 극한으로 나를 몰아붙여 정신 차리고 싶던 차에 잘됐다 싶었지.”

“지금 형수님이 보면 은근히 보통은 아니신 거 같아요. 애들 너튜브도 시작해서 잘되고. 집도 좋은 곳으로 이사하고.”

함께 배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영철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토끼 같은 자식에 잘난 부인에 형님은 요즘 걱정도 없으시죠?”

“솔직히 말하면 없어.”

휴대폰 속 가족사진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고영철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아주 행복해. 하하하!”

자신이 배를 타며 나가면서 세영이가 얼마나 끔찍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는지. 앞으로 자신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선생님?”

“응. 그래. 할 말이 있어? 말해 봐. 선생님이 세영이 얘기 다 들어 줄게.”

늘 공허하게 축 쳐져 있던 동공에 힘이 들어갔다. 거듭 태경이를 부르던 세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좋은 냄새.”

“응?”

“선생님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거 같아요.”

“…….”

좋은 냄새라니.

갑작스러운 말에 태경은 잠시 당황했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바이탈이 생긴 뒤로 일부러 향이 있는 제품들을 피하고 있었다.

무취에 가까운 향이 약한 올인원 화장품만 쓰고 비누나 샴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그런 인공적인 향 때문에 다섯 번째 바이탈의 냄새를 잘 못 맡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태경은 자신의 손을 들어 냄새를 맡다 세영이의 표정을 보고 이내 정신을 차렸다.

벽에 걸린 액자 속 그림처럼 똑같았던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기 때문이다.

“세영아. 혹시 엄마가 너를 힘들게 하거나 관심을 안 주시니?”

태경은 아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러자 세영이가 작은 두 손을 모으며 태경의 귓가에 바짝 갖다 대며 속삭였다.

“저 여자 엄마 아니에요.”

“엄마가 아니야?”

“근데 저분이 세영이한테 딸이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 아빠 부인은 맞는데 내 엄마는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작은 항아리 안에 있어요.”

“작은 항아리?”

“네, 엄마는 이제 거기서 지내요. 화장하셨거든요.”

태경은 세영이의 친어머니가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랬구나. 그럼 저분이 세영이의 새엄마인가 보네.”

“엄마도 새엄마도 아니에요.”

미묘하게 밝아졌던 세영이의 표정이 도한연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허무하게 보였다. 다시 그 초점 없는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기 세영아?”

그 표정을 직면한 태경은 이내 꼭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그 질문을 꺼냈다.

“저 아빠의 부인 되는 사람이 너를 때리니?”

질문을 받은 세영이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대답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 줬다.

“……!”

검은 점이 그려진 아이의 양손을 마주한 태경의 동공은 흔들리며 어깨는 떨렸다.

“세리 어머님?”

그때 도한연에게 화장실을 안내해 준 임정숙 간호사의 외침이 화장실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세리는 좀 괜찮아요?”

도한연이 화장실에서 나왔다는 신호를 주기 위한 임정숙의 기지였다.

“아이고, 간호사 선생님. 말도 마세요. 우리 세리가 또 설사를 하네요. 선생님?”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도한연이 다가왔다.

“우리 세리 좀 빨리 봐 주세요.”

태경은 아이의 곁에서 재빨리 일어나고 세영이는 새엄마가 다가오자 다시 표정을 감추며 말 잘 듣는 인형을 자처했다.

“선생님, 우리 세리가 설사하고 배 아픈 지 벌써 며칠 됐거든요. 방금은 아주 묽은 설사까지 했지 뭐예요.”

“어머님, 많이 걱정되시죠?”

“조금 괜찮다 싶으면 다시 배가 아프고 또 괜찮다 싶으면 또 화장실 가고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있어요. 속상해!”

“많이 놀라셨겠어요.”

“말도 마세요.”

“사실 아동에게 나타나는 이런 설사는 또래 아이들에게 옮겨질 수도 있거든요.”

“어머! 정말요?”

“그래서 본격적인 치료 전에 잠시 우리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을까 해요. 저희가 두 따님을 조금 거리를 두고 배정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사실 차일드 어뷰스(Child Abuse,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세영이를 도한연과 떨어뜨리기 위한 태경의 거짓말이었다.

“어쩐지……. 세리만 이런 증상이 있는 게 이상했어요.”

조금 전까지 침착했던 도한연은 화장실에서 나오자 전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세라가 원인일 수도 있겠네요.”

자신의 친딸인 세리가 설사를 심하게 하자 예민해진 것이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목숨처럼 소중한 딸이 조금만 아파도 아주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선생님. 세라랑 세리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선 배정할게요. 우리 설사로 배가 아픈 세리는 3번 베드로 이동하고 우리 세라는 25번 베드로 가죠. 임 선생님?”

“네, 선생님. 어머님, 세리랑 저 따라 오세요.”

태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한연은 세리와 함께 임정숙의 뒤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갔다.

“세영아, 우리도 이동할까?”

눈앞에서 공포의 존재가 사라지자 세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경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것도 아주 꼭 잡았다.

이 작은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현재 자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도 자신을 구해 줄 사람도 태경이라는 것을 말이다.

“선생님 냄새가 좋네요. 이런 냄새 좋아요.”

“아까도 그러더니 나한테 무슨 냄새나?”

“네.”

“무슨 냄새?”

“몰라요. 그냥 좋은 냄새,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신기한 냄새가 나요.”

“그래?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하니 고맙네.”

챠륵-

태경은 도한연과 그 딸이 있는 베드와 가장 거리가 먼 베드로 들어와 커튼을 쳤다.

“세영아?”

그리고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검은 점에 대해 물었다.

“아까 선생님한테 손바닥에 있는 검은 점 일부러 보여 준 거 맞지?”

“네, 선생님이 물어봐서 그래서 검은 점을 보여 준 거예요.”

“세영이가 선생님한테 도와 달라고 보여 준 거니?”

“맞아요.”

“세리의 엄마가 널 괴롭혀?”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세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이의 손바닥에 있는 검은 점은 일종의 구조 신호였다.

일명 블랙 닷 캠페인(Black Dot Campaign)으로 불리며 손바닥에 검은 점을 찍는 이것은 2015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가해자가 구조 요청을 보내는 신호로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가정 폭력 외 구조 요청 신호로 쓰이고 있다.

태경이 이 캠페인을 알게 된 건 전 직장에 있을 때 동료 의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 캠페인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블랙 닷 캠페인으로 세영이가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세영아? 선생님이 여기 침대에 눕힐 건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선생님이 올려 줄게.”

태경이가 25번 베드에 세영이를 들어서 눕혔다.

“……!”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아이가 가벼웠다.

“잠깐 옷 안에 좀 볼 수 있을까?”

세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자신의 상의를 올렸다. 작은 손이 천천히 긴 상의 끝을 잡고 올리자 아이의 복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럴 수가!’

태경은 믿을 수 없는 처참한 모습에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학대당하는 아이 환자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접한 아동학대 중에 가장 심했다.

세영이에게서 밀려오는 다섯 번째 바이탈의 분뇨 냄새가 오늘처럼 슬픈 것도 처음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태경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려 왔다.

‘하! 침착하자.’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그때였다.

챠륵-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별안간 베드의 커튼이 열리고 있었다.

* * *

5분 전-

“선생님 때문에 우리 바깥양반 통증 없이 잘 잤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환자분이 힘들어 하시면 언제든지 콜 주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3층 병동에서 내려오던 최모나는 2층 복도에서 보호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의진을 쳐다봤다.

‘선생님한테 한 번 물어볼까?’

아까부터 계속 손바닥의 검은 점이 머릿속에 맴돌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손에 있는 검은 점만 봤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우진이의 그 웃는 얼굴과 세상을 포기한 듯한 아이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해외에서 진료를 본 의진이라면 뭔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 최 쌤. ER 가?”

“네, 그런데 선생님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하나 말고 많이 물어봐도 돼. 뭔데?”

“이거 말입니다.”

최모나는 의진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손바닥? 왜 손 아파?”

“아닙니다. 혹시 손바닥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손바닥에 찍힌 검은 점?”

“예.”

“아아, 그거 블랙 닷 캠페인이잖아.”

“그게 뭡니까?”

“최 쌤 모르는구나. 그거 구조 요청이야. 그냥 쉽게 SOS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또는 아동학대…….”

아동학대!

의진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최모나는 계단을 내리뛰기 시작했다.

“최 쌤 왜 그래?”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때 눈치채지 못했나 싶었다.

“조금 전에 대기실 저쪽 의자에 있던 작은 여자아이 진료 봤습니까? 눈이 엄청 크고 피부가 하얀 아이였습니다.”

어느새 1층 접수처까지 단숨에 온 최모나가 직원에게 물었다.

“아, 세라요? 원장님이 25번 베드? 맞나?”

“어, 맞아. 최 쌤 그 아이 25번 베드에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최모나는 빨리 태경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며 25번 베드로 향했다.

챠륵-

“선생님 그 아이 차일…….”

그리고 빠르게 커튼을 열자 마주한 끔찍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복부 이곳저곳에 무언가로부터 당한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배인 흔적과 함께 얼굴과 목, 손과 다리를 제외한 옷으로 가려진 모든 곳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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