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내꺼야! 내꺼!
“……!”
“최모나.”
충격적인 모습에 얼이 빠져 있던 최모나는 태경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흠칫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챠륵-
사람의 분노가 극에 달한 살벌한 눈빛에 정신을 차리며 다시 커튼을 쳤다.
태경이 저토록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동학대! 저 아이 아동학대당하고 있어.’
하지만 태경의 화난 모습보다 아이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털썩-
지금까지 학대받은 아동을 본 적 없던 최모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응급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
“최모나. 일어나.”
커튼을 열고 나온 태경이 말하자 최모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죄송합니다. 선생님.”
“최 선생, 나 3번 베드에 다녀올 테니까 잠시 아이랑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압니다.”
“최모나, 나 봐.”
응급실 바닥에 떨어진 당황한 시선을 태경이 끌어올렸다.
“너 의사야. 정신 차려.”
“네, 네. 알겠습니다.”
최모나는 표정을 정리한 채 세영이가 있는 베드 안으로 들어갔고 태경은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 * *
“선생님,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임정숙 간호사는 조금 전 태경의 오더로 진행한 세리의 검사 결과를 건넸다.
“역시 엔터라이티스(enteritis, 장염)네요.”
복부 엑스레이 와 피 검사 등으로 보아 예상대로 장염으로 진단됐다. 간단한 수액 치료만으로도 좋아지는 경우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선생님. 세영이는?”
“현재 최 선생이랑 같이 있고 차일드 어뷰스예요.”
“역시 그랬군요. 마음이 무겁네요.”
“무거워도 우리가 할 일은 해야죠.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시고 팀장님한테 보안요원 병원 쪽 응급실 입구에 배치하라고 전해 주세요.”
“네, 선생님.”
“그리고 혹시 실수하는 사람 없도록 직원들 공지 방에 올려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태경은 수액을 챙겨 3번 베드로 향했다.
학대를 일삼은 악마 같은 여자를 보고 싶진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의사로서 둘째 딸의 설사를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태경은 도한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정을 추슬렀다.
얼굴에 쌓인 분노를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베드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 우리병원 직원들 공지 단톡방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체 공지 알림◆
현재 응급실 3번 베드에 차일드 어뷰스(child abuse, 아동학대) 가해자가 있으니 다들 인지하고 올바른 행동 부탁드립니다.
가해자를 보더라도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며, 물어보는 말에만 답변하고 평상시 환자를 대하듯 행동하세요.
아이는 안전하게 의료진이 보호하고 있으며 경찰에 연락 조치한 상태입니다.
가해자 성명: 도한연
※병원 공지 알림 메시지는 외부에 공유를 금지합니다.※
“3번 베드라면 바로 옆인데…….”
“예, 선생님? 방금 뭐라고.”
“아닙니다. 환자분. 아프지 않으세요?”
“아니요. 참을 만합니다.”
응급실 한쪽에서 환자 드레싱을 하고 있던 이찬희도 공지를 확인했다.
“영이 씨, 공지 봤어?”
“아니요. 공지 올라왔어요?”
“응, 얼른 봐 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더라.”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쩐지 나 그날 봤을 때도 그 여자 인상 별로였어.”
“자기 뭐해?”
“화가 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튜브 신고했어요.”
평소 세리세라의 팬이라던 직원은 당황함과 어이없음에 구독을 취소함은 물론 조용히 신고 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네, 안녕히 가세요.”
카톡- 카톡-
“차일드 어뷰스! 아까 그래서 최 선생이 급하게 뛰어갔구나. 하!”
의진 역시 진료실에서 공지를 확인하며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고,
“뭐꼬! 이거. 뭐 이런 xxx같은 미친년을 봤나. 개 호랑말코 같은 x을 봤나. 아고 세상에.”
식당에서 일을 하던 오계순은 광분하며 치를 떨었다. 또한 각 병동과 응급실, 진료실 등 모든 간호사와 직원들이 공지를 확인하며 분노했다.
“선생님 공지 봤어요?”
“이게 말이 돼요?”
“난 이 공지만 봐도 눈물 날 거 같아요.”
* * *
“세리 어머니?”
“어머, 선생님 왜 이제야 오세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도한연은 태경을 보자마자 안달복달했다.
“아까 피도 뽑았는데 우리 세리 괜찮은 거예요? 애라서 살도 약한데 얼마나 아팠을까.”
“네, 검사 결과 장염으로 나왔습니다. 수액을 맞으면 좀 가라앉을 겁니다.”
“그래요. 어머, 내 새끼 다행이다. 혹시라도 결과가 안 좋으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아, 네. 세리한테 수액 놔 줄게요.”
“잠시만요. 애가 그새 잠들어서요.”
도한연은 자고 있는 딸을 깃털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깨웠다.
“세리야, 우리 공주님 눈 좀 떠 보세요. 선생님 오셨어. 응?”
“엄마아~”
“어구. 내 강아지, 잘 잤어?”
“왜 깨웠어. 더 잘래.”
“주사 딱 한 번만 맞고 자자. 응?”
아이의 작은 잠투정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르고 달래는 도한연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와 동시에 초점 없는 눈과 온갖 흉터와 멍이 가득한 세영이의 모습이 아른거려 태경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주사 맞기 시른데…….”
“선생님이 안 아프게 놔 주실 거야. 그렇죠, 선생님.”
“그래. 선생님이 안 아프게 놔 줄게.”
태경은 세리에게 수액을 놔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40분 정도면 다 맞을 겁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챠륵-
태경이 나가고 도한연은 주사를 잘 맞은 세리를 기특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공주님은 주사도 참 잘 맞네. 아프지 않았어?”
“응. 참을 만했어. 엄마 근데 나 졸려.”
“그래, 좀 자. 약 들어가려면 시간 좀 있어야 해.”
그렇게 20분 정도 세리의 배를 쓰다듬으며 곁을 지키던 도한연에게 제작진이 카톡을 보냈다.
-어머님 세리는 좀 괜찮아요? 만약 심하면 남은 촬영은 미뤄도 돼요.
-어머, 세상에! 죄송해요. 제가 세리 때문에 정신이 없다 보니까 연락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가벼운 장염이라고 해서 수액 맞고 있어요. 이거 맞고 촬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온 신경이 아픈 딸에게 가 있던 도한연은 제작진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저랑 감독님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네요.
-그러면 다음 촬영은 아까 설명 드렸던 대로 세라랑 세리가 평소에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자연스러운 모습 짧게 담을게요.
그리고 도한연이 잊은 존재가 또 한 명 있었으니 세라였다. 그러고 보니 세리랑 응급실에 들어온 후 세라를 본 기억이 없었다.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20분 안으로 수액 다 맞으니까 얼른 맞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가만, 애가 어딜 갔지?”
세리가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한 도한연은 베드 밖으로 조용히 나왔다.
“맞아. 아까 세리랑 떨어뜨려 놓는다고 했었지. 가만 몇 번이라고 했더라……. 25번 베드라고 했어.”
한참을 생각한 끝에 태경이 했던 말을 떠올린 도한연이 25번 베드로 향했다.
저벅 저벅-
‘아니, 근데 얘는 모르는 사람이랑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하여간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 짧은 거리를 가면서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세영이를 미워했다.
“세라야, 여기 있니?”
혹시라도 의료진이 함께 있을까 싶은 도한연은 목소리와 얼굴에 다시 위선의 가면을 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상냥한 말투로 세라를 찾으며 25번 베드의 커튼을 열었다.
“세라야 엄마 왔……!”
챠륵-
그런데 있어야 할 곳에 세라가 보이지 않았다. 베드는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이상하다. 분명 25번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아닌가?”
챠륵-
도한연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하며 커튼이 쳐진 응급실 베드를 하나씩 열고 다녔다.
“세라야?”
챠륵-
“세라 여기 있니?”
“뭐예요?”
“어머, 죄송해요.”
온 응급실 베드를 다 둘러 봤지만 세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선생님?”
뭔가 쎄한 느낌을 받은 도한연이 응급실 스테이지로 급히 향했다.
“네, 보호자분. 수액 봐 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딸이 안 보여서요.”
“따님이라면 지금 3번 베드에서 수액 맞고 있잖아요. 방금 베드에서 나오신 거 아니세요?”
“그건 그런데 우리 세리 말고요. 큰애 세라요. 아까 같이 온 첫째 딸이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모른다고요?”
“네. 제가 바빠서 잘 못 봤나 봐요.”
도한연은 간호사의 대답에 의아해하며 응급실 밖으로 향했다.
“저기요, 저 기억하시죠? 우리 큰 딸 어디 있나요? 세라요.”
그대로 접수처로 향한 도한연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직원에게 물었다.
“아까 응급실 같이 들어갔잖아요. 왜요, 세라가 안에 없어요?”
“없으니까 물어봤죠! 무슨 그런 말 갖지도 않은 소리를 해요.”
한껏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접수처 직원에게 내리꽂혔지만 직원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세요. 혹시 화장실 간 거 아닐까요?”
“화장실은 무슨 화장실……! 저기, 선생님?”
마침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도한연은 진료실에서 나오는 태경을 발견하고 그대로 직진했다.
“선생님, 세라 어디 있어요?”
“세라요?”
“네, 아무리 찾아도 응급실에도 없던데요. 아까 선생님이 데려갔잖아요.”
“…….”
태경은 진료실 문 앞에 서서 경멸의 눈빛을 보이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봐요! 선생님, 세라 어쨌냐고요?”
“세리 아직 수액 맞고 있을 텐데 응급실로 돌아가시죠.”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세라! 여기 있죠? 맞죠?”
“세리 어머님.”
도한연은 히스테리 섞인 신경질을 부리며 진료실 문을 격하게 열었다.
쾅-
“세라야? 세라!”
어찌된 일인지 진료실과 안쪽 처치실에도 세라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함과 짜증, 신경질이 섞인 도한연과 달리 태경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런 일이 예상한 태경이 조금 전 세영이를 3층 1인실로 미리 이동시킨 것이다.
세영이는 현재 최모나와 의진과 함께 있었으며 병실 문 앞에는 장득칠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요, 세리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 주세요.”
“일단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거 봐요. 의사 선생님! 내 딸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자꾸 딴소리를 하고 있어요.”
도한연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지만, 태경의 분노가 깃든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침착했다.
“세라야? 세라 어디 있니?”
급기야 도한연은 세라를 부르며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도 걱정돼서도 찾는 게 아니었다.
도한연이 세라를 찾는 이유는 오로지 딱 하나였다.
‘이 계집애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하, 사람들이 보면 안 되는데.’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세상에 드러날까 싶어서였다.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우리 세리를 위해서라도 내 딸을 위해서라도 꼭 세라가 있어야 해.’
지금까지 세라로 인해 누린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은 막아야 했다.
도한연의 눈에는 점점 더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눈 크고 리본 머리띠에 인형같이 생긴……. 아니, 이렇게 생긴 애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요.”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에게 세라의 사진을 보여 주며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세라야~?”
“보호자분 위쪽은 공사로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세라를 불렀지만 태경의 지시로 지키고 있는 최 팀장에게 제지당했다.
“당신 세라 어디가 숨겼어? 어! 빨리 말해!”
도한연은 표독스런 눈을 치켜뜬 채 태경에게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이, 정신 나간 의사 말고 여기 원장 좀 불러 줘요.”
“내가 이 병원 원장 김태경입니다.”
“하! 당신이 원장이야? 야, 원장이면 남의 애 마음대로 숨겨도 돼?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세라 데리고 와. 뭐하고 있어! 얼른 데리고 오라고.”
“도한연 씨, 난 세영이를 봤지 세라라는 아이는 본 적이 없어.”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태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피해자인 세영이는 현재 3층 병실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눈에 보이는 상처 치료 후 쉬고 있었다.
세영이가 있는 그곳은 3층 가장 안쪽에 있는 곳으로 다행이 1층의 소란은 들리지 않았다.
“당신 이제 세영이 못 봐. 아니!”
의사로서 침착해야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앞으로도 계속 못 볼 거야.”
세영이의 안전이 확보된 이상 인간이길 포기한 이 여자에게 적어도 죄를 졌다는 사실은 알게 해 줘야 했다.
“뭐, 뭐야! 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꺼 어디에 있어? 내꺼!”
광기 서린 도한연은 마치 미쳐 날뛰는 것만 같았다.
“내꺼야! 내꺼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난리들이야! 내놓으라고!”
“도한연!!”
태경이 큰 소리가 병원 로비에 울려 퍼졌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