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23000!!
“선생님?”
태블릿 PC로 어린이 영화를 보고 있던 세영이 의진을 불렀다.
“응. 세영아, 왜 뭐 줄까?”
“이거요. 이제 지우고 싶어요.”
“검은 점?”
“네.”
지금까지 주먹을 꼭 쥐고 있던 세영이 손을 펼치며 내밀었다.
도한연의 옆에 있을 때보다 불안한 표정은 많이 사라졌지만, 세영이는 아직도 주변을 경계하며 마음 놓고 웃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또 그 마녀가 나타나 자기를 데려가진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 이제 점 지우자. 선생님이 물티슈로 지워 줄게.”
“엘사다.”
“세영이 엘사 좋아하니?”
“네. 예뻐요.”
물티슈 패키지에 찍힌 캐릭터를 보며 아이가 반응했다.
“엘사는 공주잖아요. 예뻐요.”
“선생님 눈에는 우리 세영이가 훨씬 더 예쁜데.”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예뻐요.”
“어머, 정말? 최 쌤 들었지? 선배가 이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데. 자! 다 됐다. 깨끗하게 지워졌네.”
의진은 아주 능수능란하게 세영이를 대했다. 말과 행동을 오버하며 과하게 했는데 일부러 그랬다.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을 하며 학대당한 아이들을 많이 겪은 의진이었다.
경험상 학대 아동의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아이 앞에서 의료진이 심각해하면 아이들은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과할 정도로 밝은 얼굴로 대응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것이다.
“최 쌤 좀 앉아. 왜 그러고 서 있어.”
능숙한 의진과 달리 최모나는 병실 벽에 딱 붙어 서 있었다. 아동학대를 처음 본 그 충격에 저 아이에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
“저 선생님 여기 앉으라고?”
의진의 말에 세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 쌤 얼른 이리와. 세영이가 여기 앉으래.”
“저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근데 아까부터 가운 안에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아, 그게 실은 이걸…….”
병실에 들어설 때부터 한쪽 손을 가운 안에 넣고 있던 최모나는 쭈뼛쭈뼛한 손길로 뭔가를 꺼냈다.
“어머, 세상에 인형이잖아. 최 쌤 설마 이거 세영이 주려고 갖고 온 거야?”
“맞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귀여운 인형의 모습이 아닌 독특한 지렁이 형태의 인형이었다. 그래도 최모나가 독일 본사 젤리 공장 견학 때 사 온 가장 아끼는 인형이었다.
“세영아. 여기 최모나 선생님이 세영이 인형 주려고 가져왔대.”
“세영이 어린이 이거 받아.”
세상 쑥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어색한 말투였지만 도움이 되고픈 최모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영아, 뭐 필요한 거 없어? 말만 해. 선생님이 다 갖다 줄게.”
“정말 다 말해도 돼요?”
“그러엄. 뭐든 다 말해.”
“아빠요. 우리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 그래 아빠한테 연락해 볼게.”
“네.”
세영이는 짧은 대답과 함께 지렁이 인형을 끌어안으며 베드에 누웠다.
* * *
“접니다.”
태경은 손을 들어 일부러 경찰이 들리도록 단어를 강조했다.
“제가 아동학대로 신고한 의사입니다.”
경찰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도한연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쳤다.
“원장님. 또 뵙습니다.”
태경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경찰은 응급실 칼부림 때 출동했던 김 경사였다.
“김 경사님, 또 뵙네요.”
“아동학대라고 신고를 하셨던데 맞습니까?”
“맞아요. 여기 이 여자가 아동학대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최 순경, 지금 서에 전화해서 김 순경 이쪽으로 오라고 하고 올 때 사복 입고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이 여자분이 그랬다는 거죠?”
“네.”
“아, 아니에요. 그냥 말을 하도 안 들어서 훈육한 거예요. 훈육! 그리고 여기 이 사람들이 날 폭행했어요.”
경찰이 등장하자 미쳐 날뛰던 조금 전 모습과 달리 도한연은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폭행이요?”
“네. 명백한 폭행이에요. 여기, 제 양쪽 뺨 벌겋게 부은 거 보이시죠?”
“살짝 붉기는 한데 붓지는 않았네요.”
“제대로 봐 주세요. 그리고 입술도 터졌어요. 피 난 거 보이시죠?”
“입술 끝에 살짝 피가 나긴 하네요.”
“저기, 있는 저 아줌마랑 그 옆에 노인네가 제 뺨을 때렸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은 모르고 여기 일하는 사람들 같아요.”
“아니요. 지금 말씀하시는 여자 분 이름이요.”
“저요?”
경찰이 이현자와 오계순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자 도한연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네, 그쪽이요.”
“아니, 저 사람들이 날 때렸다니까요. 내가 아니라. 그럼 저 사람들 이름을 물어봐야지 왜 내 이름을 물어봐요.”
“일단 여기 계신 선생님께서 아동학대로 그쪽을 신고했으니까 조사를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어본 겁니다. 그리고 순서대로 진행할게요. 일단 이름 대세요.”
“…….”
“도한연.”
도한연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버티자 태경이 대신 이름을 말했다.
“학대한 아동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학대 아니라고요. 경찰관 아저씨는 자식 안 키워 봤어요?”
“총각입니다. 아이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습니다.”
“학대 아니고 훈육이에요. 그리고 이 사람들 폭행 건 먼저 조사해 주지 않으면 조사 응하지 않겠어요.”
“미친 거 아니야?”
“저 여자 진짜 사이코네.”
“훈육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환자복을 입은 점잖은 노인 한 명이 김 경사와 태경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경찰 선생님, 제가 올해 초에 교장으로 퇴직한 사람입니다. 아까부터 쭉 보고 있었는데 이분들은 때리지 않았습니다.”
“환자분.”
태경이 노인을 부르자 그는 괜찮다는 식으로 눈을 살짝 찡긋했다.
“저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그리고 노인 환자를 시작으로 대기실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도한연의 말을 부인했다.
“저 미친 여자 좀 빨리 잡아가세요.”
“자기 새끼 학대한 여자 말을 뭐하려고 믿어요. 가서 콩밥이나 먹게 해 주세요.”
“얼른 수갑 채워 데려가요. 저 얼굴 꿈에 나올까 무섭네.”
“이봐! 당신들 다 봤잖아. 다들 한 통속인 거야. 경찰 아저씨 지금 하는 말 다 거짓말이에요. 나 억울해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CCTV확인해 주시면 군말하지 않고 조사 받을게요.”
“그래요? 원장님 여기 CCTV 좀 볼 수 있죠?”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도한연 때문에 김 경사는 결국 CCTV를 확인하기로 했다.
* * *
“이거 봐요. 도한연 씨 이제 조사 받을 거죠?”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자신했던 CCTV를 확인했지만, 이현자와 오계순이 뺨을 때리는 영상은 찍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도한연이 난리치는 광경만 고스란히 경찰이 확인한 꼴이었다.
“분명 아까 그 여자랑 노인네가 절 때렸다고요.”
“근데 영상에는 그런 장면이 없잖아요.”
“한 번만 다시 확인해 주세요.”
영상을 다시 한 번 돌려봤지만, 역시나 때린 장면도 맞는 장면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중간 즈음부터 화면이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의 발만 나오고 있었다.
“여기, 이상해요. 화면 내려간 게 이상하잖아요.”
“외람되지만 저희 병원 CCTV 오래된 구식이다 보니 가끔씩 이렇게 화면이 내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옆에 있던 최 팀장이 그럴 듯한 말로 이유를 설명했다.
“선배님. 제가 방금 확인하고 왔는데 CCTV가 옛날 모델이 맞습니다.”
“그래? 먼저 응급실 때는 이상 없었는데. 어쨌든 지금 보는 영상으로 놓고 본다면 도한연 씨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계순이 식당에서 나오는 걸 본 최 팀장이 보안실로 가서 화면의 포커스를 살짝 아래로 내린 것이다.
워낙 불같은 오계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뭔가 사달이 날걸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영상은 CCTV 말고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찍힌 영상이었다.
바로 세리세라의 다큐를 촬영하던 피디가 찍은 영상이었다. 하지만 피디는 말을 하지 않았고 미쳐 날뛰던 도한연은 영상이 찍히고 있는 줄도 몰랐다.
* * *
그 뒤 조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김 경사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여성 경찰이 태경의 동행하에 3층 병실로 도한연을 데려갔다.
“세영아, 여기 이 사람이 세영이를 괴롭혔어?”
이 시간이 얼마나 아이에게 무섭고 두렵고 힘든 순간인지 병실에 모인 모든 사람 알고 있었지만, 절차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세영아, 아니지!”
이날 도한연은 애들 아빠와 영상통화를 할 때를 빼고는 처음으로 세라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껴 주고 예뻐해 줬잖아. 그렇지?”
“도한연 씨, 그런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여자 경찰이 도한연의 말을 제지하고 나섰다.
“세영아, 괜찮으니까 솔직히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돼. 우리가 널 지켜 줄게.”
그 말을 들은 세영이는 태경이를 쳐다봤다. 태경이가 말없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헤이 카카오 큰 북소리 틀어 줘.”
예상치 못한 세영이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하던 그때, 드디어 가려진 진실이 병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시작되면 절 지하실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옷을 벗긴 다음…….”
절대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도한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세영이는 마치 이날만을 기다린 것처럼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용기 내어 고백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참혹한 현실에 모든 이들은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손을 떨었다. 몇몇은 뒤를 돌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도한연 씨, 할 말 있어요. 이래도 부인합니까?”
아이의 몸에 난 상처까지 전부 다 확인한 여자 경찰이 묻자 도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말하는 세영이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도한연 씨, 인정합니까?”
도한연은 대답 대신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다가갔다.
* * *
도한연과 응급실에 있던 친딸을 경찰차에 태운 김 경사는 태경에게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 다시 병원으로 들어왔다.
“원장님이 이번에도 큰일 하셨네요.”
“아닙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일단 서에 가서 조사를 제대로 진행해야죠. 집도 가서 봐야 하고 친딸은 도한연과 분리 조치될 겁니다.”
“그렇군요.”
“김 순경이 남아서 도와드릴 거고요. 세영이 아버님 연락 닿으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세영이 치료 잘 부탁드릴게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괴물 같은 도한연이 병원을 떠나고 태경은 빠르게 뛰어 3층 스테이션에 뛰어 올라갔다.
“검사 결과 나왔죠?”
“네, 선생님.”
악마 같은 도한연을 해결됐으니 이제 세영이한테 집중할 시간이었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섯 번째 바이탈의 원인을 빨리 찾아야 했다.
탁탁-
“뭐야? WBC가 23000!”
모니터로 결과를 확인하던 태경은 깜짝 놀랐다.
‘이런, 염증 수치가 너무 높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3단계인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건 그만한 지병이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태경은 세영이가 있는 병실로 뛰어갔다.
“우리 세영이 어디 아픈 곳 있어?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해 줄래?”
“네.”
큰 표정 변화가 없는 세영이는 태경이만 보면 약간의 미소를 보였다.
“세영이가 선생님을 봐서 기분이 좋은가 봐요. 세영아, 의사 선생님 좋아?”
“네, 선생님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나서 좋아요.”
“세영아. 지금 아픈 곳이 어디야?”
“여기, 배가 계속 아파요.”
지금까지 참을 수밖에 없던 세영이가 아픈 곳을 정확히 말했다.
“배 아픈 지 얼마나 됐어?”
“오래됐어요.”
“우리 세영이 그동안 밥은 잘 먹었니?”
“아니요. 배가 많이 고파요.”
배고프다는 그 말에 태경이도 임정숙 간호사도 가슴이 먹먹했다.
‘말랐다.’
확실히 세영이는 또래보다 왜소해 보였다. 어린 동생보다 키가 작은 걸로 보아 평소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한연은 정말 악마 같은 인간이다. 별안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다시 세영이에게 집중했다.
“우리 세영이 배 아픈 거 다 나으면 선생님이 맛있는 거 아주 많이 사 줄게.”
“정말이에요?”
“그럼, 약속하지. 우선 지금 배 어디가 아파?”
“오른쪽이 아파요.”
그 말에 태경은 몇 가지 지병을 의심해 봤다.
소아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장 일부가 주머니처럼 쳐져 있을 수도 있고 지금 위치로 봐서는 충수염일 수도 있었다.
“지금부터 CT라는 커다란 통에 들어가서 배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볼 거야. 우리 세영이 할 수 있을까?”
“네, 할 수 있어요.”
“와! 세영이 멋지다. 그럼 여기 선생님이랑 CT 찍으러 갔다 와서 다시 선생님 만나자.”
“네.”
“임 선생님, 서둘러 주세요. 오더 내릴 테니까 지금 당장 찍어 달라고 하세요. 빨리.”
“네, 알겠습니다.”
30분 뒤-
“아…….”
아이의 영상을 확인한 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