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절차고 나발이고
“어때. 편집 죽이지?”
“피디님 편집 솜씨는 언제 봐도 대단하네요.”
도한연의 만행을 찍은 피디와 작가는 사무실에서 편집을 마치자마자 SBC 방송국으로 향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편집을 기가 막히게 하실 수 있어요?”
“내가 원래 편집 속도 빠르다고 입봉 전에도 선배들이 편집기계라고 칭찬 많이 했었어.”
“맞다! 피디님 그 장면은 확실히 잘랐죠?”
“뭐, 도한연 귀싸대기 맞는 장면?”
“네, 줘 터지는 장면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장면만 리플레이 연속으로 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어.”
피디는 오계순과 이현자에게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싶어 아예 원본을 폐기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그 장면 내보내도 다들 잘 때렸다고 하지 그 두 분 욕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거지. 것보다 나는 김태경 선생이 열라 멋있더라.”
“저도요. 무슨 드라마 보는 줄 알았잖아요. 소리 빡 질러서 시선 집중시키더니 갑자기 전문적인 의학용어로 기선 제압하는데 뭔가 카리스마가 느껴지더라고요.”
“내 말이. 그래서 김태경 선생 모자이크할 때가 제일 아쉽더라. 그 생생한 표정을 시청자들이 같이 봤어야 하는데.”
“그렇긴 한데 일반인들 얼굴 나가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피디님 전 직장이 아니라 왜 하필 SBC 보도국에 주려는 거예요?”
“다른 곳은 뉴스가 너무 윗선 눈치 봐서 예전 같지 않아. 그나마 구고찬이 버티고 있는 SBC가 제일 뉴스다워.”
“하긴. 거긴 그래도 뉴스로 쇼는 하지 않죠.”
“구고찬 그 꼰대, 성질은 지랄 같은데 뉴스에 대한 진실성과 정의감은 진짜거든.”
피디는 자신이 다니던 전 직장이 아닌 이번 아동학대 사건을 제대로 보도해 줄 방송국에 제보하기로 했다.
“근데 듣기로는 구고찬 팀장이랑 피디님 원수라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원수?”
“대학 때 구 팀장이 피디님 여친 뺏어서 둘이 절친에서 원수 된 거라고 예능팀 사람들 다 알고 있어요.”
“아, 그거? 근데 그거 반대야.”
“반대요?”
“응. 내가 고찬이 형 여친 뺏은 거라고. 그래서 그 형이 빡쳐서 나 의절한 거잖아.”
“와! 대박. 피디님 완전 쓰레기네요.”
“한 작가, 쓰레기라니. 쓰레기는 도한연 그x이지. 그리고 다 혈기 왕성한 20대 애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떻게 구 팀장한테 연락은 해 봤어?”
“피디님 같으면 받겠어요?”
“연락 안 해 봤어?”
“여기 오는 내내 피디님 전화로 전화했는데 절대 안 받아요.”
“차단했나?”
“당연히 차단하죠. 이제 어떡할 거예요.”
“연락이 오게 만들며 되지.”
“무슨 수로요. 도한연 얼굴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게 한다면서요.”
“걱정 말고 한 작가 폰이나 좀 줘 봐.”
피디 역시 두 딸의 아빠였기에 이번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한연 그 사이코x 오늘 9시 뉴스에 꼭 나오게 하고 만다.”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해 놓고 세라의 앞에서 세상 따뜻한 엄마인 척했던 그 역겨운 인간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 * *
30분 뒤-
“아…….”
아이의 영상을 확인한 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젠장!”
CT 촬영 전 예상했던 대로 세영이는 압뻬(appendicitis, 충수염)였다.
보통 충수염이라 하면 간단하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세영이의 경우는 달랐다.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버텼을까.”
너무나 오래 방치되어 있어서 그 염증들에 의해 충수가 다 녹아 버렸다. 아마 대장의 일부도 잘라야 할 것이다.
“미친 인간! 하!”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터진 충수 주변 장기들이 벽을 형성해서 복강내로 염증이 퍼지지는 않았다. 만약 복강내로 염증이 퍼졌다면 심한 복막염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서두르자.’
시간이 없다. 태경은 한시라도 아이의 몸을 고쳐 주고자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향했다.
“저기, 원장님?”
병실 앞에 서 있던 김 순경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태경을 불러 세웠다.
“지금 현재 세영이의 상태가 어떤지 여쭤 보려고요.”
아까부터 다급하게 움직이며 검사하는 의료진을 보던 김 순경은 물어볼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처음에 진행된 검사에서 염증 수치가 높게 나와 몇 가지 검사와 함께 CT를 찍었는데 그 결과 충수염으로 나왔어요. 근데 상황이 좋지 않아서 빨리 수술을 진행해야 해요.”
“수술이요?”
“선생님. 저 수술할게요.”
수술이란 말에 놀란 되묻는 김 순경의 말보다 뒤이어 들려온 말에 태경이 놀랐다.
임정숙 간호사와 화장실을 갔다 오다가 세영이가 내용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한 말투가 이어졌다.
“저, 수술할 수 있어요.”
“우리 세영이 씩씩하네. 세영아, 일단 우리 병실에 잠깐만 들어가 있자.”
임정숙 간호사는 세영이의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가 살짝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던 태경과 김 순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보통의 또래 아이라면 ‘수술’이라는 말만 듣고 울거나 놀랐을 것이다. 어른들도 수술이 무서운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세영이는 달랐다.
그동안 고통에 익숙해져서 수술이라는 단어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우선 지금 아이의 수술에 대해 법적 보호자가 동의를 해 줘야 합니다.”
“아, 수술 동의서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근데 지금 새엄마가 학대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받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확인해 보니 아빠는 친아빠거든요. 그분에게 물어보는 게 맞긴 한데 같이 학대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어요. 적어도 방임의 책임은 회피할 수가 없죠. 이런 상황에서 국선변호사에게 수술을 진행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물론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겠죠.”
절차를 무시하는 것도 싫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처럼 촌각이 급할 때까지 절차를 논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한 아이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태경은 절차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김 순경님. 그 절차 꼭 지켜야 합니까?”
“네?”
“지금 세영이의 상태가 심각해요. 바로 수술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유지된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부러 수술을 진행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거의 세영이의 정신력으로 버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기적……이요?”
“네, 그리고 언제 복막염이 악화될지 몰라요.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 제가 알아보고 있을 테니까 원장님은 절차고 나발이고 그딴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수술 시작해 주세요.”
고마운 일이다. 아이에 대한 태경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와주다니 진심으로 김 순경이 고마웠다.
사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끝까지 절차를 따지고 원칙대로 하는 답답한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런데 시간을 끌지 않고 수술을 할 수 있게 해 주다니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법률 쪽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명 서에 돌아가면 한 소리를 듣겠지만, 김 순경은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귀 따갑게 잔소리를 듣더라도 아이를 살리는 일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까짓 거 시원하게 혼나면 되지 뭐. 시말서 한두 번 쓰나.”
* * *
태경은 세영이와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응급실로 돌아왔다.
“자! 다들 집중해 주세요.”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이찬희를 빼고 주요 의료진이 스테이션으로 모였다.
“우선 3세대 세파인(cefotaxime, 세포탁심: 항생제 중 복강내 감염에 쓰일 수 있는 항생제) 주고요. 수액도 줄게요. 소아니까 제가 남겨 놓은 용량과 간격 반드시 꼭 준수해 주세요.”
“네, 선생님.”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소아는 작은 성인이 절대 아니다. 그 말은 성인의 연장선에서 처방을 하면 안 된다는 소리다.
다른 크기와 다른 생리적 특징과 다른 정상수치들과 다른 구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냥 또 하나의 생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세영이 응급수술 할 겁니다. 마취과 정 선생에 연락하고 수술방 잡으세요.”
“네, 원장님.”
“마지막으로 각 병동과 응급실에 이상한 사람들 출입하지 않게 각별히 신경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경의 진지한 눈빛에 의료진과 직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오더를 이행했다.
“선생님?”
다급하게 돌아서는 태경에게 최모나가 따라붙었다.
“뭐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던 태경은 최모나의 할 말을 듣지도 않고 한 마디를 남긴 뒤 세영이에게로 향했다.
“어시 들어와.”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수술에 꼭 참여하고 싶은 최모나의 마음을 태경이 읽은 것이다.
* * *
“세영아, 괜찮아? 무섭지 않아?”
“네.”
의진이 묻는 말에 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상 소아들은 수술방과 마취에 겁을 먹기 때문에 협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환자 대기실까지 보호자가 동행하고 수면 마취 후에 수술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우리 세영이 진짜 씩씩하고 대단하다.”
“선생님이랑 있으면 안 무서워요.”
무섭다는 말 한 마디 할 법도 하건만 세영이는 울기는커녕 태경과 의진을 향해 살짝 미소까지 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었을 텐데. 위로를 해 줘야 할 어른들이 도리어 담담한 아이의 모습에 위로를 받고 있었다.
“천사가 따로 없네요.”
“그러니까요. 진짜 천사네요.”
임정숙 간호사가 살짝 목이 멘 채 말했다.
“으흠.”
수간호사로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그 강한 사람이 살짝 눈물을 보인 것이다. 그녀 또한 두 아이의 엄마였기에 이 상황이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
“이제 수술방으로 이동할게요.”
* * *
꼼꼼하게 스크럼을 마친 태경과 의료진이 수술방에 모였다.
“세영아. 조금 춥지?”
“아니요. 하나도 안 추워요. 지하실이 더 추웠거든요.”
“그랬구나. 이제 지하실은 생각하지 마. 그리고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다 수술 끝나 있을 거야.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우리 이따 보자.”
“네, 선생님.”
짧은 대답과 함께 세영이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혈압 맥박 다 정상이고 마취 잘됐습니다.”
의진이 전신마취를 마무리하자 태경이 아이의 배를 소독한다. 포비돈 특유의 검붉은 색이 아이의 배 위로 크게 퍼져 나갔다.
“다들 지금 마음이 무겁고 힘들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 태경은 평소와는 다른 부탁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든 건 우리가 아니라 여기 베드에 누워 있는 세영입니다. 오늘은 특히 더 수술에 집중하세요. 도한연을 결코 용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여자를 직접적으로 벌을 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분하고 화가 났지만 그건 태경의 말이 맞았다. 법의 심판은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경찰에게 맡기고 지금부터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세영이를 치료하는 일, 아이의 아픈 곳을 낫게 만드는 일. 그게 이 아이를 도와주는 거예요. 오늘 다들 수술 잘 부탁드립니다.”
의료진들은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수술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럼 수술 시작…….”
그렇게 수술의 시작을 알리려는 찰나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그 소리에 태경의 눈동자가 좌우로 급히 움직이고 덩달아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 서로를 확인했다.
의진도, 임정숙도, 보조간호사도 아니었다.
“크흠!”
마스크 안으로 살짝 코까지 들이마시며 흐느끼던 사람은 놀랍게도 병능제 최모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