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13화 (112/472)

113화. 나왔습니까? 가스?

“선생님께 드릴게 있어서 기다렸어요.”

“저한테요?”

“네.”

피곤에 찌든 김진경은 청바지 주머니에 있던 꼬깃꼬깃한 흰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요. 치료비에 보태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

“그 지금 3층에 입원해 있는 피해 아동이요. 고세영 양 치료비에 보태 주세요.”

태경이 못 알아들었는지 답이 없자 김진경은 치료비에 대해 더 상세하게 말했다.

“보호자분.”

하지만 태경은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제대로 알아들었지만 선뜻 답을 할 수 없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간병하는 김진경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자분 정말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태경은 김진경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정중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거절 의사를 전했다.

“감사하면 받아 주세요. 저 선생님께서 왜 거절하시는지 잘 알아요. 제 코가 석자인데 무슨 일인가 싶죠?”

“그런 게 아닙니다.”

“죄송해요.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꼬이다 보니 말이 날카로워지네요.”

김진경은 본인이 던진 말에 민망한 듯 재빨리 사과를 전했다.

“실은 오늘 병원 오는 내내 버스 안에서 이걸 드릴까 말깔 한참을 고민했었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시선을 내린 채 꼬깃꼬깃한 봉투 끝자락을 계속 쳐다보는 눈빛에는 꽤 고민한 흔적이 가득했다.

“이거 보이시죠?”

김진경은 봉투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펼쳐 보였다.

“후원이라고 말하기도 쪽팔리고 약소한 금액이라서 그래서 그냥 치료비에 보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하나도 안 쪽팔리고 전혀 약소하지도 않은 금액이에요.”

태경은 민망해하는 김진경의 말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형의 빚을 대신 갚아 본 사람으로서 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였다.

“선생님이라면 왠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치료비를 드리는 나름 이유도 있어요.”

“이유요?”

“네. 실은 제 꿈이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어요. 딱 세영 양 나이또래 아이들이요. 더군다나 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니까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돈 받아 주세요.”

“그럴게요. 제가 세영 양 치료비로 감사하게 사용할게요.”

태경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돈을 받기로 했다.

“고마워요. 보호자분.”

“제가 더 고맙죠. 선생님한테는 제가 몇 번을 인사드려도 모자라요. 그럼 올라가 볼게요.”

“네.”

축 쳐진 김진경의 어깨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태경은 접수처로 향했다.

“이거 세영이 후원금으로 받은 건데 따로 보관해 줘요.”

“안 그래도 원장님께 말씀드리려고 기다렸는데 후원금이 더 있어요.”

“더요?”

“네. 이것 좀 보세요.”

접수처 직원이 작은 박스를 열어 보여 주자 그 안에는 태경이 방금 받은 것과 같은 흰 봉투가 한 뭉치나 있었다.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이에요.”

“이게 다 후원금이란 말이죠?”

“네, 오늘 진료 보신 환자분들이나 현재 입원 중이신 보호자분들은 물론이고 일부러 후원 주려고 왔다면서 봉투만 놓고 가신 분들도 꽤 되세요.”

정말 하루 종일 새벽이 된 지금까지도 후원을 하겠다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병원 운영에 써 달라며 병원에 후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참 감사한 분들이 많네요. 일단 잘 모아 둬요.”

세영이 수술이 끝나고 바빴던 태경은 세영이와 병원에 몰린 사람들의 관심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건 시작해 불과했으니 잠시 뒤 병원에 엄청난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후원금은 세영이 아버님이 도착하면 그때 전달해 드리죠.”

“네, 알겠습니다.”

태경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진료실로 향했다.

* * *

응급실에 살짝 숨 돌릴 틈이 생긴 최모나는 의국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3층 병동으로 향했다.

“최 쌤?”

3층으로 올라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며 VVIP 병실을 쳐다보는 최모나를 임정숙 간호사가 불렀다.

“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오늘도 회진하러 오신 거예요?”

“예?”

“회진이요.”

“아, 예. 맞습니다. 회진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회진을 깜빡하고 있었다. 세영이 수술이 끝나고 다른 환자를 보면서도 온통 신경을 세영이에게 쓰고 있다 보니 태경이 시킨 야간 회진을 깜빡한 것이다.

“근데 표정은 아니 것 같은데요?”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 쌤 회진하러 온 거 아니죠?”

“아닙니다. 회진하러 온 것 맞습니다.”

“에이, 아닌데.”

임정숙 간호사는 최모나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 쳤다.

“딱 봐도 다른 것 때문에 온 것 같은데요?”

“다른 거, 뭐 말입니까?”

“세영이 때문에 온 거죠? 세영이 괜찮나 해서.”

“예? 아니, 수 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난 또 세영이 가스 나왔는지 궁금해서 온 건가 했지.”

“나왔습니까? 가스?”

“아, 우리 최 쌤이 또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으셨네. 이거 봐. 누가 봐도 세영이 때문에 왔구만.”

“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왜 벌써 가요. 회진 안 하고 그냥 가시게요?”

“별일 없는 거 같고 오늘은 수 쌤이 계시니까 괜찮을 거 같습니다.”

임정숙 간호사에게 속마음을 들킨 최모나는 민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서 가스는 나온 거야 안 나온 거야?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의사가 수술한 환자 가스 나왔는지 물어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최모나였다.

지금까지 치료받았던 환자에 대해 이렇다 할 궁금증도, 결과도 알려 하지 않았기에 의사로서 저런 사소한 질문조차 고민이 됐던 것이다.

‘별일도 아닌데 괜히 오버했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던 최모나는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지?”

손끝에 걸린 무언가는 우진이가 레모나와 함께 준 편지였다.

레모나는 의국실 책상에 두고 편지는 가운 주머니에 그대로 둔 걸 깜빡한 것이다.

“아주 반듯하게 각을 딱 맞게 접었네. 아니 근데 우진 어린이는 무슨 편지를 다…….”

그냥 적당히 고맙다는 표현이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최모나는 종이를 펼친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개모나 선생님을 칭찬합니다.

개모나 선생님은 화장실 가는 게 무서운 나와 화장실을 가 주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마시려고 했던 음료수도 우진이에게 양보해 주었어요.

엄마랑 아빠한테 말하니까 환자를 생각하는 멋진 의사라고 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개모나 선생님은 정말 멋진 의사입니다. 그래서 개모나 선생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그리고 우진이는 개모나 선생님이 참 좋습니다. 우리 엄마랑 닮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개모나 선생님이 좋아요.♥ –이우진-

우진이가 편지라고 준 종이는 일종의 감사 카드였다.

‘환자에게 불만 카드가 아닌 감사 카드 받는 것. 어때? 꽤 쉽지?’

편지를 다 읽고 난 최모나의 머릿속에 태경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회진을 안 하는 방법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때 쉽냐고 묻는 태경에게 정확히 자신이 했던 말도 연달아 떠올랐다.

‘전혀 쉽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감사 카드를 받는 일은 전혀 쉽지 않고 앞으로도 절대 일어날 것만 같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받아 버렸다.

모든 환자에게 인정받고 신뢰를 받는 김태경 선생님도 아니고 환자를 보며 허허실실 웃는 이찬희도 아니었다. 또한 환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의진도 아니었으며, 환자를 잘 케어하는 임정숙도, 그 밖에 다른 선생님들도 아니었다.

우리병원에서 가장 싸가지가 없고 무뚝뚝하며 환자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은 사람.

환자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한 사람.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

바로 병능제 최모나 자신이었다.

제일 감사 카드와 어울리지 않은 자신이 감사 카드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가장 귀찮고 성가시고 불편하다고 느낀 어린 환자에게서 말이다.

아이는 어른과 다르다.

어른들과 달리 그 어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

마치 티 없이 깨끗한 눈밭처럼 순수한 마음 그 자체로 사람을 보며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어린 우진이의 눈에 비친 최모나는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는 의사가 아닌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의사였다.

“…….”

편지를 읽은 최모나는 멍했다. 마치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얼음처럼 계단 중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난 아닌데…….”

가만히 서 있던 최모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가운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최 선생?”

그때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내려가는 최모나를 누가 불러 세웠다. 진료실로 나와 응급실로 향하던 태경이었다.

“회진 갔다 와?”

“아, 그게 병동에 좀 잠시 들렀습니다.”

“그래, 알았어.”

“저기, 선생님?”

“어, 왜?”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뭐든 물어봐.”

“저번에 회진을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그거 아직도 유효합니까?”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감사 카드, 칭찬 카드 받는 거?”

“예, 맞습니다.”

“당연히 유효하지. 어째 이걸 물어보는 거 보니까 방법을 찾은 거 같은데. 왜? 혹시 환자의 마음이 이해됐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감사 카드 받았어?”

태경은 최모나가 우진에게 편지를 받은 사실을 알고 일부러 물어봤다. 하지만 최모나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회진을 그만둘 수 있는 기회를 망설임 없이 날려 버렸다.

“못 받았습니다.”

최모나는 정확히 자신이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감사 카드를 받았다는 말을 아직은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못 받았어?”

“그게…….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진 계속해야 합니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럼 당연히 계속해야지. 얼른 올라가 회진 마무리하고 와.”

“네, 알겠습니다.”

최모나는 가운 속 우진이의 편지를 손에 쥔 채 내려왔던 병동으로 다시 올라갔다.

“우진이랑 세영이 덕분인가? 까칠이 점점 진화하네.”

태경은 최모나의 뒷모습을 뿌듯하게 보며 응급실로 향했다.

* * *

“저기 병원 직원분이세요?”

“네, 맞습니다. 제가 이 병원 직원입니다.”

세라에게 희망의 포스트잇을 붙이러 온 사람이 최 팀장에게 물었다.

“이거 여기 붙여도 괜찮죠?”

“그럼요. 벌써 많은 분들이 붙이고 가셨습니다. 청소는 제가 할 테니까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어디든지 붙이셔도 됩니다.”

담벼락 반 이상을 채운 노란 포스트잇 종이를 보며 최 팀장은 기분 좋게 응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라인에 병원 기사가 한 시간마다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홍보에 진심인 최 팀장은 병원이 관심을 받는 게 기분 좋았다.

대형 병원이야 이렇다 할 홍보가 없어도 환자들이 꾸준히 많이 오지만, 우리병원은 대형 병원이 아니었기에 예기치 못한 관심이 반가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장 요원은 어디를 갔길래 아까부터 안 보이지?”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장득칠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3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보세요?”

-네, 팀장님.

정문 안쪽 마당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던 최 팀장은 결국 장득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장 요원이 안 보이길래 전화 걸었는데 지금 어디 있나요?”

-팀장님, 저 코너에 있습니다.

“코너요?”

-병원 담벼락 코너 쪽이요. 편의점 방향 쪽인데 아무래도 팀장님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와 달라고요? 일단 알았어요.”

최 팀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 왜 오라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앉았다.

“장 요원?”

몇 미터 즈음 걸어가자 우람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장득칠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서서히 돌아서는 장득칠이 완전히 돌아서자 최 팀장은 깜짝 놀라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 깜짝아! 지금 근무시간에 뭐하는 짓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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