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손가락이요?
“이찬희?”
“네, 선생님.”
“내가 집도했던 수술 중에 15시간짜리 LT(Liver transplantation, 간이식 수술)가 있었거든.”
“열, 열다섯 시간짜리 LT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찬희는 저도 모르게 말을 살짝 더듬었다.
‘뭐지? 왠지 x된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순간 기분이 싸한 게 등줄기에 땀이 흐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수술을 다섯 권으로 복기한 노트가 있어.”
15시간짜리 LT에 다섯 권짜리 복기 노트라니. 이찬희는 뭔가를 예상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바른대로 말할래 아니면 그 다섯 권짜리 두 권으로 요약해서 제출할래?”
“윗집 화장실 배수관이 터져서 집 천장에 물이 새는데 주인집 아저씨가 모텔비를 입금하시며 오늘은 밖에서 자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태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찬희는 숨도 쉬지 않고 이실직고했다.
15시간짜리 LT수술. 그것도 태경이 직접 복기한 노트라니.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이유로 오늘 자체 당직을 선택했고요. 그래서 최 쌤과 제가 있을 테니 선생님은 좀 쉬고 오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그래? 그럼 나 좀 쉬고 있을 테니까 급하면 콜 해.”
“알겠습니다.”
태경이 지렁이 인형을 들고 응급실을 나간 뒤 이찬희와 최모나는 응급실 환자들을 진료했다.
넘어져 정강이뼈에 금 간 사람, 심한 감기 몸살에 걸린 사람, 벌에 쏘인 사람, 119 구급차를 타고 온 환자 등.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환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응급실을 찾는다.
“3번 베드 환자분 검사 결과 나오면 알려 주세요.”
“네, 이 쌤.”
“최 쌤 13번 환자 영상 올라왔습니다.”
“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환자 진료에 집중했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 저기요…….”
키가 180cm 정도 되는 중년 남자가 허리를 숙인 채 외부와 이어진 응급실 전용 출입구로 급하게 들어왔다.
“배가…….”
“환자분 괜찮으세요?”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을 호소하자 응급실 간호사가 남자에게 바로 다가가 응대했다.
“배가 너무 아파요.”
“환자분 우선 이쪽에 앉으셔서 혈압부터 확인해 볼게요. 여기 앉으세요.”
“네…….”
자동 혈압 측정기에 오른손을 넣으면서도 남자는 반대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인상을 썼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그게 제가 평소에도 복통은 자주 있었거든요. 근데 오늘은 아침부터 너무 아팠어요. 이제 참기 힘들 정도로 아파서 일하다 말고 응급실로 바로 왔습니다.”
“우선 환자분 기본적인 피 검사부터 할게요.”
“아니요. 선생님.”
멀리서 환자 처치를 마치고 다가오던 이찬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CT부터 찍을게요.”
“네?!”
“환자분이 저렇게 아파하시는데 피 검사 하면서 바로 CT 검사도 함께 해 볼게요.”
“이 쌤, 그래도 피 검사 보시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임정숙 간호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차가 꽤 있는 간호사가 부드러운 말로 달래듯이 말했다.
“네, 평소라면 그럴 텐데 환자분이 많이 아파하니 바로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아, 예……. 선생님 알겠습니다.”
이찬희는 뭔가 자신의 오더에 만족한 듯 당당하게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 * *
“환자분, 오늘 검사 수고하셨고요. 수납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다음 검진 때 또 뵐게요.”
“그럼 6개월 뒤에 오면 될까요?”
“네, 환자분. 아까 설명해 드린 대로 선생님께서 6개월 뒤에 한 번 더 보자고 하셔서 그때 확인해 볼게요. 검진 날은 잊지 않게 문자 발송 보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외래 환자에게 안내 사항 전달을 마친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다 피식 웃음이 났다.
“선생님, 그게 무슨 화분인 줄 아세요?”
태경이 세영이한테 선물 받은 지렁이 인형을 들고 햇볕이 드는 창가 쪽에 서서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왠지 햇볕 있는 곳에 놔 줘야 할 것만 같아서요. 세영이가 준 거니까 더 따뜻한 곳에 두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이해가 되네요.”
“혹시 예약 환자 더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그럼 2층 병동에 좀 들렸다가 응급실 갈게요.”
“또 유지천 환자 보러 가시는 거죠?”
“네, 자주 보려고요.”
태경은 세영이가 준 인형을 쓰다듬으며 진료실을 나갔다.
“참, 대단하셔. 저러니까 환자들이 수소문까지 해서 오지.”
임정숙 간호사는 2층 병동으로 향하는 태경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 * *
태경이 2층 병동으로 발을 내딛자 포르말린과 유황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인 양 다른 병실에서 나오는 냄새를 포르말린과 유황이 전부 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전과 비교해서 더 나빠지진 않았네. 그래도 다행이다…….’
포르말린과 유황.
다섯 번째 바이탈 중 4단계로, 유황 냄새가 강할수록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발걸음이 독한 냄새를 따라 207호로 향했다. 병실 옆에 걸린 유지천이란 환자의 이름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태경이 안으로 들어갔다.
“유지천 님?”
병실 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유지천 환자를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환자가 낮은 목소리로 힘없이 답하며 커튼을 살짝 젖혔다.
“좀 어떠세요? 아침이랑 비교했을 때 컨디션은 괜찮은가 해서요.”
“괜찮아요.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도 좋네요.”
55세 여자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했다.
목소리에 힘도 없고 기운이 없는지 유지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게다가 눈빛에도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어…….”
옅은 웃음으로 태경을 바라보던 유지천이 무언가를 찾았다.
“뭐, 찾으세요?”
“모자요.”
“괜찮아요. 답답하실 텐데 안 쓰셔도 돼요.”
“찾았네요.”
유지천은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더듬더니 이내 항암 모자를 꺼내 들었다.
“머리가 이렇게 되고서는 누구 만날 때는 항상 모자를 써요.”
50대 여자의 머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머리카락은 몇 가닥이 채 남지도 않은 상태였다.
“우리 병원에서 맞은 이번 항암이 12차세요. 지금까지 참 잘하셨어요. 많이 힘드셨죠?”
“먼저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래도 견딜 만하니 괜찮았어요. 저번에는 막 양다리가 아프고 칼에 베이는 것 같고 아주 죽다 살아났어요.”
“항암제 관련 부작용이라 약에는 한계가 있어요. 조금이라도 힘들거나 심해지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네, 선생님. 그럴게요.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세심하시네요.”
“아닙니다. 더 불편한 건 없고요?”
“네, 괜찮아요.”
“그럼 이따 또 뵐게요. 쉬고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태경은 환자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유지천은 며칠 전 우리병원으로 급히 전원을 온 캔서 터미널 패이션트(cancer terminal patient, 말기 암환자)였다. 전원 왔을 당시 너무나 변해 버린 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경은 더 많이 신경 쓰이고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환자들을 진료할 때면 아무래도 그 마음이 평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게 유지천 환자라 좀 더 마음이 쓰였다.
“후!”
태경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 내듯 짧은 숨을 내뱉으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탁- 탁-
“이 선생?”
스테이션에서 모니터로 환자의 결과를 보던 태경이 이찬희를 불렀다.
“네, 선생님.”
“여기 이 환자 말이야. X-ray 안 찍고 바로 CT 찍었던데 왜 그런 거야?”
태경이 보고 있던 화면은 조금 전 극심한 복통을 느끼며 들어온 남자 환자의 차트였다.
“환자가 너무 아파해서 다른 질환도 감별할 수 있는 CT를 바로 찍었습니다.”
“그래, 이 선생. 그 방법이 틀린 거는 아닌데 그래도 우리는 의사잖아.”
“예……?”
“내 말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피지컬 이그젬(physicla exam, 신체 검진) 없이 이런 검사를 먼저 하면 안 돼. CT를 먼저 찍으면 원인을 파악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너처럼 이렇게 하다 보면 검사에 의존하게 돼. 일단 모든 검사 이전에 피지컬 이그젬을 더 우선시해야 해. 환자가 왔을 때 가장 먼저 강력하게 볼 수 있는 피지컬 이그젬을 무시하지 마.”
“하지만 선생님. 이 환자는 통증을 호소해서요. 이런 경우 빠르게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않나요?”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래?”
“네?”
태경은 화를 내는 것도 혼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이찬희처럼 환자를 더 생각한답시고 저런 행동을 하는 후배들이 간혹 있었다.
어찌 보면 의욕이 앞선 것이다. 하지만 환자는 의욕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점이 우선인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설명을 하고 바로잡아 줘야 한다.
“너 소 한 마리 사냥하려고 폭격기로 들판을 초토화하지는 않잖아. 이건 검사의 난사야. 검사가 무슨 AK소총도 아니고 왜 이렇게 난사를 해.”
“아…….”
“진찰해 보고 피 검사도 해 보고 어떠한 병인지 의심해서 검사해야지. 이찬희 선생님아! 어?”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찬희도 태경의 뜻을 이해했는지 대번에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이 환자 봐 봐. CT 봤어?”
“선생님께서 부르실 때 막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혼날까 봐 급조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딱 결과를 보려던 그 찰나에 태경이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알았으니까 여기 봐. 원인이 뭐인 거 같아?”
이찬희는 모니터를 뚫어질 기세로 집중해서 쳐다봤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봤던 곳을 또 살폈다.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여기 봐 봐. 이거 뭐야?”
모니터 속 환자의 대장 안쪽에 무언가가 아주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변입니다.”
“그래, 맞아. 이 환자는 변비라서 아픈 거야. 환자 마지막 변 언제 봤대?”
“그게……. 묻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환자분 10일 전에 마지막 변 봤대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재빨리 환자에게 묻고 와 답했다.
“그래, 이거야. 임 선생님 말 들었지? 문진 없이 그냥 검사하면 이렇게 된다고. 문진, 신체 검진, 혈액 검사들은 굉장히 막강한 절차들이야. 결코 등한시하지 마. 알았지? 명심해.”
“기본이라 생각하고 제가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든 기본이 가장 중요한 거야. 우선 빨리 이 환자 치료부터 하자. 장갑 가져와.”
“네, 관장 준비하겠습니다.”
“이찬희?”
평소같이 변비 환자에게 하는 관장을 준비하려는 이찬희를 태경이 불러 세웠다.
“네?”
“너 10일 된 변 만져 본 적 있니?”
“아니요.”
그러고 보니 이찬희는 며칠 된 변비 환자는 많이 봤지만, 10일 동안 변을 못 본 환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관장? 어림없어. 그게 단단해서 들어가지도 않아. 저렇게 가득 있는데 관장약 넣으면 바울 퍼포레이션(Bowel perforation, 장천공) 위험도 있고 우선은 입구 막고 있는 단단한 녀석들부터 빼내야 해.”
“단단한 녀석들이요? 그러면 어떤 기구를 준비해 올까요?”
“기구는 무슨 기구야? 기구도 위험해. 더 좋은 게 있잖아.”
“더 좋은 거요?”
“바로 이거.”
태경은 허공 위로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 있게 답했다.
“손가락이요?”
“그렇지. 최고의 기구지.”
놀란 이찬희를 뒤로하고 태경은 환자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