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20화 (119/472)

120화. 간, 대장, 심지어 뇌까지

“아무 일도.”

태경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에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서 큰일이 됐지.”

“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이고 말고 할 거 없이 말 그대로야. 치료를 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

“아주 간단한 수술만 했어도 좋았지. 그랬다면 환자분은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유지했을 거야.”

“아니, 어째서요?”

이찬희는 지금까지 초기에 발견된 암을 치료하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다들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는 환자들이 더 많았다.

“왜 아무 치료도 안 했던 건가요?”

“그게 환자 본인의 뜻이었어. 누군가 치료해 줄 거라고 그랬었거든.”

태경은 아직도 4년 전 그때 기억이 선명하다. 암의 진행 속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느 사람은 진행이 빠르고 어느 사람은 생각보다 느리다. 유지천의 경우 초기에서 말기까지 4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조직 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 예약을 한 유지천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예약이 변경됐나 싶어 간호사에게 물어봤지만, 취소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환자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겼던 태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초기에 발견한 이 케이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환자에게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오지랖이 발동해 전화도 해 보고 문자도 남겼지만, 유지천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일주일 후 연결된 전화에서 유지천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훌륭한 분이 알아서 다 치료해 준다고만 했다.

그러고 보니 유지천은 암을 통보받는 그 날도 다른 환자들과 달랐다.

‘환자분 조직 검사 결과 암입니다.’

‘암이요?’

‘네, 상심이 크시겠지만, 암의 크기도 작고 현재…….’

‘상심이요? 아니요. 선생님. 저 상심 안 했어요. 걱정 하나도 안 해요. 저는 다 치료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아무리 초기라고 해도 암이었다. 암을 진단받은 사람은 병의 진행 여부를 떠나 결과를 들으면 놀라는 모습이 가장 컸다. 그런데 유치천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침착하고 태연하며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누군가에 대한 그 믿음이 참 대단했던 거 같아.”

“누군가요? 다른 병원을 간 거군요?”

“아니. 병원이 아니었어. 다른 병원을 갔다면 저렇게까지는 안 됐겠지.”

태경도 처음에는 그랬다. 이찬희의 말처럼 다른 병원을 간 거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검사 결과를 받고 수술을 다른 병원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서 수술 잘하고 쾌차하라는 응원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다.

유치천 환자가 말했던 훌륭한 분이 말도 안 되는 상대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안 건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그럼 이유가 뭔가요?”

“교주.”

“예!? 교, 교주요?”

“병원 의사가 아닌 교주가 낫게 해 줄 거라면서 본인이 믿고 있는 종교로 꼭꼭 숨어 버렸어.”

“아, 아니 어떻게…….”

“그렇게 지내다가 이렇게 온몸이 암에 의해 박살 나고 찢기고 짓이겨진 다음에야 온 거야.”

“그러니까 사이비 종교에 빠진 거란 말이죠?”

“어. 지독한 사이비에 빠졌지. 교주가 자신을 고쳐 줄 거라고 했대. 그 말에 돈도 다 갖다 바치고 기도하면서 그릇된 믿음을 믿고 또 믿은 거지.”

“세상에. 그럴 수가……. 정말 천하에 나쁜 놈들이네요. 설마 지금도 그 사이비를 믿고 있는 건 아니죠?”

“하!”

답답함이 가득 배인 한숨이 태경의 답변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종교적인 부분은 사실 개인의 자유니까 존중하지만 그때 일이 너무 아쉽지. 여기 영상을 보면 온몸에 암이 다 퍼졌어. 간, 대장, 심지어 뇌까지 전이가 됐지.”

굳이 태경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찬희의 시선은 아까부터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유지천의 사진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항암 치료를 하고 있지만, 현재 유지천 환자분의 상태는 언제든지 위험한 순간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야.”

맞는 말이었다. 사실 이찬희는 아까부터 환자의 자료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한 것이 있었다.

‘호스피스를 알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

선생님 때문에 우리 병원으로 온 거겠지만, 사실 이 환자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게 맞는 환자였다. 그만큼 온몸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유지천은 현재 시한부 환자였다.

“이 선생?”

“네, 선생님.”

“우리는 의사니까 의사로서 끝까지 환자한테 할 수 있는 일을 잘하자.”

“네, 선생님. 그럼 내일 유지천 환자 Lab 처방 낼까요?”

“아니다. 이 환자는 그냥 내가 볼게. 신경 쓰지 마. 그냥 그렇게 해.”

“아, 네. 알겠습니다.”

태경이 직접 환자를 보겠다고 한 것은 특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현재 환자는 암이 퍼질 대로 퍼져서 언제든지 급성으로 사망에 이를 정도로 악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보호자들과 환자는 삶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하다.

환자는 교주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강하고 보호자들은 환자에 대한 애증과 사랑, 아쉬움 때문에 강했다.

태경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유지천을 생각하면 딸인 김진경도 함께 떠올라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일부러 병원을 찾아서 옮겼기에 본인이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 쌤. 11번 환자 검사 결과 올라왔어요.”

“네, 바로 갈게요.”

“선생님 신환입니다.”

이찬희에 이어 태경도 환자를 보기 위해 계속해서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네, 우리병원입니다.

“2층 병동에 입원해 있는 환자 가족인데 병동 간호사 선생님께 여쭤볼 게 있어서요. 통화 가능할까요?”

-바로 연결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유지천의 딸이자 보호자인 김진경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길가에서 전화하고 있었다.

-네, 2층 병동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207호 유지천 환자 딸인데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엄마 괜찮은가 해서요.”

-오늘 컨디션 괜찮으신 것 같아요. 아직 통증으로 호출도 없었어요.

“그리고 혹시 지금 병원 가는 길인데 김태경 선생님 면담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가능한데 환자 진료 있으면 좀 기다리실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진경 씨?”

맞은편 디저트 가게에서 나온 남자가 전화를 끊은 김진경을 부르며 다가왔다.

“죄송해요. 너무 오래 기다렸죠?”

“아니요. 5분도 안 됐는데요.”

“이거 받으세요.”

같은 회사 동료인 남자는 따뜻한 팥빵이 세트로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 왜……?”

“아, 여동생이 퇴근할 때 이 집에서 마카롱을 꼭 사 오라고 어찌나 잔소리하던지. 요즘 별스타에서 유명한 집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동생 거, 사면서 진경 씨 것도 하나 샀어요. 오늘 어머니 보러 가신다고 해서요. 같이 드세요.”

동료는 김진경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그저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동규 씨는 좋은 오빠네요. 보면 가정이 참 화목한 거 같아요.”

“아니에요. 다른 집이랑 비슷해요. 여동생이랑은 서로 놀리기 바쁘고 모른 척 지내다가 용돈 떨어지면 그때 오빠 소리 하면서 친한 척하고 그래요.”

지극히 평범한 집안의 이야기였지만 김진경은 그런 분위기가 부러웠다. 평범한 게 얼마나 감사한 일상인지 모든 게 깨져 버린 상황이 오니 더 절실했다.

“고작 한 시간 일찍 퇴근한 건데요. 기분이 되게 좋네요.”

이른 퇴근에 동료는 기분이 상당히 좋은 듯 싱글벙글하며 들뜬 표정이었다.

“진경 씨,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가실래요?”

함께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던 동료는 거리에 새로 생긴 호프집 행사 문구를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 병원에 가야 해서요.”

“아, 맞다! 깜빡했네요. 어머님 뵈러 가신다고 했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다음에 기회 되면 제가 살게요.”

“진경 씨가 왜요. 그런 소리 마세요. 제가 사야죠.”

김진경과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 들어온 동료는 그녀를 조용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 사람의 뒷말을 듣고 조금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규 씨, 보니까 집에 갈 때 진경 씨랑 같이 가더라.’

‘그냥 지하철 타는 곳까지 같이 가는데요.’

‘진경 씨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

‘예? 왜요?’

‘여기!’

회사 선배는 자기 손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정확한 건 아니고 나도 들은 얘기인데. 여기 큰 상처가 있대.’

‘그게 뭔가요?’

‘뭐겠어. 확 가려고 마음먹었던 거지. 그게 무슨 소리겠어.’

‘글쎄요.’

‘정신 상태가 깨끗하진 않다는 소리잖아. 사람도 어딘가 우울해 보이고. 그러니까 동규 씨도 적당히 거리 두라고. 저런 사람 가까이해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이동규는 딱히 선배의 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동료로서 본 김진경은 말수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회사 주차장에 터를 잡은 길냥이가 몸에 큰 상처가 생겨 돌아온 일이 있었다.

평소 예쁘다고 사진 찍기 바빴던 회사 사람들 누구도 길냥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던 동료는 고민하다 불쌍한 모습의 길냥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주차장에 있어야 할 길냥이는 보이지 않았고, 잠시 뒤 김진경 품에 안겨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어디 갔다 와요?’

‘동물 병원이요. 고양이가 다쳐서 치료 좀 해 줬어요.’

간단하게 설명만 덧붙이고 사무실로 들어갔던 김진경은 그 뒤로도 지속해서 길냥이를 챙겼다.

이동규는 그 일을 계기로 김진경을 다시 봤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게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이 커졌고 어느새 좋아하는 감정까지 생긴 것이다.

“어! 진경 씨, 조심해요.”

급하게 울리는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하던 김진경이 물웅덩이 위를 걸으려 하자 이동규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마워요.”

“빗물이 고였나 봐요. 여기 깨진 도로 많아서 비 온 다음에는 잘 보고 다녀야 해요.”

“네. 제가 잠시 정신이 팔렸네요.”

“진경 씨는 영화 좋아해요?”

“영화요? 좋아했었죠.”

“저기, 두 분 잠시만요.”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김진경의 대답 뒤로 상냥함을 물씬 풍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길 좀 여쭤볼게요. 여기 CZV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아세요?”

마치 모녀처럼 보이는 인상이 좋은 젊은 여자와 중년 여자는 두 사람에게 극장 가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쭉 가면 큰 횡단보도 하나 나오거든요. 거기 지나서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바로 보일 거예요.”

“어머, 친절하셔라. 감사합니다. 여기서 엄청나게 헤매고 있었는데 덕분에 잘 찾을 수 있겠네요.”

중년 여자는 과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동규를 칭찬했다.

“남자분 인상이 참 좋으시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근데 우리 여자분께서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밝지 않으시네.”

“아니요. 아무 고민도 없고 제 표정 밝아요.”

중년 여자의 질문의 김진경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딱 잘라 말을 끊었다.

“저희가 좋은 말씀이 있는데 여자분 한 번 보시…….”

“그 좋은 말씀 두 분이나 많이 들으시고 얼른 극장으로 가세요.”

“아, 바쁘신가 보다. 그래요. 길 알려 줘서 고마웠어요.”

김진경이 또다시 말을 딱 자르자 두 여자는 민망한 듯 빠르게 인사를 하며 등을 돌렸다.

“좀 특이한 분들이네요.”

“저런 사람들은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서 조심해야 해요.”

“뭔가 그런 느낌이긴 했어요. 진경 씨 덕분에 빨리 끝났네요.”

“저, 가 볼게요.”

“2번 출구로 가시죠? 얼른 가 보세요.”

“네. 빵 잘 먹을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진경 씨도요. 내일 봐요.”

김진경은 이동규와 인사를 하며 반대편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기요? 남자분.”

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한데. 5분 정도 시간 괜찮으세요?”

조금 전, 극장 가는 길을 물어봤던 두 여자가 이동규에게 접근하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김진경은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동규에게 들러붙은 저들을 떼어 내기 위함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저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친 것들.’

강남, 건대, 홍대, 신촌, 신림, 노량진 등 지하철역 근처에 자주 출몰하며 어디든 있고 어디든 없는 집단들.

예전에는 ‘기를 아십니까?’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접근했던 그들이다. 지금은 멘트를 바꿔 전급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들이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바로 사이비 종교였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김진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동규 씨?”

눈빛에 짜증 가득한 모습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김진경이 이동규를 불렀다.

“진경 씨? 아직 안 갔어요?”

“이 사람들이랑 말 섞지 말고 얼른 가세요.”

“안 그래도 방금 가려고 했어요.”

“여자분께서 오해가 있으신가 보다. 우리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알았으니까 그만 가 보세요.”

길게 말해 봐야 화만 나고 피곤하기에 김진경은 말로 빨리 보낼 생각이었다.

“동규 씨 그만 가요.”

“예? 아, 네.”

“저기, 잠시만요?”

김진경이 이동규의 팔을 잡고 지하철 출구 쪽으로 등을 돌리려 하자 중년 여자가 별안간 김진경의 손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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