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소름 끼치는 행동
똑똑-
“정 선생, 바빠?”
태경이 노크를 하며 의진의 진료실 문을 열었다.
“아니요, 선배 들어오세요. 어쩐 일이에요?”
“내가 못 올 때 왔나. 어쩐 일은 무슨.”
“그렇긴 한데. 바쁜 선배가 친히 제 진료실까지 오셨으니 하는 말이죠.”
요즘은 세영이 일도 있었고, 여러 가지 병원 일이 많다 보니 수술실이나 식당이 아니면 두 사람이 커피 한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의진은 모처럼 진료실까지 찾은 태경의 방문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뭐, 할 말 있으세요?”
“배달 왔어.”
“배달? 무슨 배달이요.”
“커피 배달.”
태경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를 들어 올려 의진에게 보여 줬다.
“웬 커피예요?”
“변비 환자분이 주고 가셨어.”
“변비 환자라면 아까 응급실에서 어마어마한 냄새를 남겼던 그 환자분이요?”
“응. 맞아.”
응급실에서 열흘 된 변비에서 탈출한 환자는 병원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결국 수액을 다 맞은 그는 근처 뻑다방에 가서 양손 가득 커피를 사 들고 접수처 직원에게 전달했다.
“받아서 감사하긴 한데.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환자분이 많이 미안하셨나 봐요.”
“그런 것 같아. 얼마나 미안해하던지 청소하시는 여사님께 따로 가서 몇 번이나 사과하고 갔대.”
“마음이 많이 쓰이셨나 보다. 아무래도 관장이 아니라 선배가 직접 해서 더 그랬나 봐요.”
“그러게. 환자분의 마음이 담겨서 그런지 커피가 더 맛있네.”
“으음! 그냥 원두 맛인데요?”
“농담 좀 했다. 농담!”
“저도 장난 좀 쳐 봤습니다. 맛있어요. 근데 선배, 유지천 환자분 호스피스로 옮기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유지천은 말기 암 환자였기에 태경뿐만 아니라 통증을 담당하는 의진의 환자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일반 병원보다는 호스피스 병원이 유지천 환자 상황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호스피스 병원은 시한부를 앞둔 환자들에게 맞춰진 병원이었기에 삶을 *정리하는 데에도,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보호자가 일부러 나한테 온 건데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닌 거 같아서.”
“보면 의사로서 선배를 신뢰하는 마음이 참 큰 것 같아요. 맞다! 선배한테 자기가 빚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전에 김진경 씨가 병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을 고맙게 생각하는 거 같아.”
“예전이면 신화대병원 때요?”
“응.”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김진경은 단순히 실력 좋은 의사, 그 이상으로 태경에 대한 믿음이 큰 것 같았다.
‘김태경 선생님 덕분에 제가 살았어요.’
게다가 자신이 태경 덕분에 살았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의진은 묻지 않기로 했다.
환자의 개인적인 일까지 세세하게 묻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의진아?”
“네!?”
“아니, 왜 이렇게 놀라?”
“선배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까 놀랐죠.”
“이름 부르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이름을 부르니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사람이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진이 태경에게 고백을 한터라 느닷없이 튀어나온 본인의 이름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태경은 병원 내에서는 의진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와! 역시 이래서 여자들의 촉은 무서운 건가?”
“중요한 이야기예요?”
“그럼. 중요하고말고.”
“어, 물론 선배가 언제 답을 주시든 그건 선배의 마음이니 제가 존중해요. 그런데 아직 한 달이 안 됐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더 생각한 뒤 그때,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뭔 소리야. 그 얘기 아닌데?”
“아! 그래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건데 의진은 괜히 설레발치며 앞서간 자신이 민망했다.
“그럼 무슨 이야기인데요?”
“일적인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일이요? 어떤 거요?”
“그게…….”
Rrrrrrrrrrr
태경이 막 핵심을 말하려는 찰나 가운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격하게 진동했다.
“잠시만. 여보세요.”
-선생님, 전데요. 이고철 환자분 퇴원 수속 끝나고 지금 진료실로 오셨거든요.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임정숙 간호사의 전화를 받은 태경은 의진과의 이야기를 미루고 밖으로 나갔다.
“콜 와서 가 봐야겠네. 급한 건 아니니까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자. 수고해.”
철컥-
“중요한 말인데 또 급한 건 아닌 일적인 부분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의진은 태경이 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 * *
철컥-
“선생님 왔다.”
태경이 진료실로 들어서자 이고철 옆에 앉아 있던 푸엉이 반색했다.
“환자분 말하는 데 불편하진 않으세요?”
“살짝 답답함이 있긴 하지만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그 부분은 시간 지나면 좋아질 거예요.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수술한 부위도 문제없고요.”
수술받은 이고철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칼슘 제제를 복용하고 드디어 오늘이 퇴원하는 날이었다.
“이게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수술이 잘되고 나니까 마음도 몸도 아주 편합니다.”
태경은 웃는 얼굴로 이고철을 쳐다봤다. 수술 자체가 쉬운 수술이 아니었는데 잘 견뎌 준 환자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여전히 다섯 번째 바이탈이 풍겼지만, 수술 당시처럼 그 냄새가 심각한 4단계는 아니었다.
“활동적인 분이라서 병원에 계시느라 지루하셨죠?”
“말도 마세요. 전 길게 입원한 것도 아닌데 이게 좀이 쑤시더라고요. 그래도 병원 밥도 아주 맛있고 다들 잘해 주셔서 편하게 생활했습니다.”
“남편 말이 맞다. 선생님 특히 병원 밥 정말 맛있다. 계순 할머니 음식 최고다.”
“할머님께서 어찌나 신경을 써 주시던지 와이프랑 깐담이가 아주 잘 먹었습니다. 안 그래도 감사한데 반찬까지 챙겨 주셨어요.”
정이 많은 오계순은 타국에서 친정 식구 하나 없이 임신한 푸엉을 딱하게 생각했다.
아이와 자신 몸만 생각해도 부족한 시기에 아픈 남편까지 돌봐야 하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푸엉과 이고철이 잘 먹은 반찬을 따로 만들어 두 사람에게 선물했다.
“다들 너무 감사해서 제가 받은 마음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우리 이고철 씨가 앞으로 더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그거라면 제가 자신 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깐담이도 잘 크고 있죠?”
“잘 큰다. 아주 건강하다.”
“다행이네요. 퇴원 후 일정에 대해 알려 드릴게요. 이제 항암 치료를 시작할 거예요.”
수술을 잘 끝낸 이고철은 앞으로 항암 치료에 집중할 예정이다.
“3주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치료받을게요. 수술도 잘하셨으니까 앞으로 있을 항암도 잘 해 봐요.”
이고철은 아내와 아이에 대한 사랑이 크고 병을 이겨 내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그렇기에 분명 항암도 잘 해낼 것이다.
“문제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선생님도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이고철은 씩씩하게 답했다. 그동안 태경이 여러 번 꼼꼼하게 설명을 해 줬기에 항암 치료라는 말에 미리 겁을 먹지 않기로 했다.
“집에 가셔서 몸에 좋은 음식 맛있게 잘 드시고 무리한 일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에 오시고요.”
“네, 선생님. 수술도 잘해 주시고 저도 이 사람도 여러 가지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 최고다. 정말 감사하다.”
“별말씀을요. 그럼 몸 관리 잘하시고 또 뵐게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이고철과 푸엉은 밝은 미소로 태경에게 인사를 하며 진료실을 나갔다.
* * *
그사이 병원에 온 김진경은 손에 팥빵을 들고 엄마인 유지천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병동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며 207호 병실로 들어갔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유지천이 사용하는 베드에 쳐진 커튼 밖으로 언제나 들려오는 음성이 김진경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다 부질없는 작은 먼지에 불과합니다. 무소유로 돌아가 오직 내 말에만 집중해야 깨끗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유지천은 병실에서 마치 세상 속에 장벽을 세우듯 24시간 커튼을 치고, 휴대폰으로 사이비 종교 영상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세상 속에 길드는 순간 그것이 바로 타락의 지름길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럼 여러분은 누굴 봐야 하나? 바로 나! 이 진구진만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며 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 깨끗하게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럼요. 진 선생님. 선생님 말씀을 따릅니다.”
“엄마?”
김진경은 일부러 커튼을 열지 않고 소리를 내며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평소 같으면 바로 커튼을 열어 보고 있던 사이비 영상을 삭제한 뒤 베드 위에 펼쳐 놓은 교주의 책도 단번에 뺏어 버렸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병으로 기력이 쇠약해진 엄마였지만, 사이비에 관련된 것을 뺏으려고 할 때면 마치 괴력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온몸을 써서 막아섰다.
그 과정은 늘 작은 몸싸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지하철역에서 사이비들을 만난 김진경은 심적으로 지쳤기에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엄마 딸 왔어.”
“어, 잠깐만. 엄마 모자 좀 찾고.”
모자는 핑계였다. 유지천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끄고 베드 위에 펼쳐 놓은 사이비 종교 책을 빠르게 정리했다.
“나 들어간다.”
“어. 들어와.”
챠륵-
“엄마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책 읽고 뉴스도 보고 그랬지.”
“참, 엄마 팥빵 먹을래? 엄마 예전에 팥빵 좋아했잖아.”
김진경은 이동규가 준 팥빵이 담긴 상자를 베드 옆에 있는 사물함 한쪽에 올려놓았다.
말기 암 환자들은 음식을 조심해서 잘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김진경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좋아했던 음식이나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조금이라도 먹게 해 주고 싶었다.
“회사 동료분이 사 준 건데 무설탕에 쌀가루로 만들어서 속에 부대끼지도 않는대.”
“그래. 나중에 먹을게. 고마워.”
“밥은 잘 먹었고? 오늘 몸은 괜찮아?”
“…….”
김진경의 물음에 유지천은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살짝 이상했다.
“엄마?”
“어? 어. 괜찮아. 밥도 곧잘 먹었어.”
유지천은 이상하리만치 딸을 의식한 듯 눈치를 보며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을 자꾸만 쳐다봤다.
“엄마 무슨 전화 기다려?”
“아니, 내가 무슨 전화를 기다려. 진경이 너 저녁 먹어야지?”
엄마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김진경은 자신이 오늘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나야 집에 가서 천천히 먹어도 돼. 별로 배 안 고파.”
“그러지 말고 이거 빵 좀 챙겨 가. 어차피 엄마 다 먹지도 못해.”
“난 됐어.”
“남으면 버리잖아. 자!”
유지천은 팥빵 한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봉투에 넣어 김진경 가방에 챙겨 줬다.
“많아. 한 개만 줘.”
“너도 엄마 닮아서 팥빵 좋아하잖아.”
이게 뭐라고.
김진경은 방금 유지천이 한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울컥함이 올라왔다.
“많으면 냉동실에 넣어 놨다가 하나씩 먹어.”
가끔 예상 못 한 이런 상황이 찾아오면 사이비에 미쳐서 가정을 버린 엄마가 아닌 가족을 사랑했던 평범한 엄마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계속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
이런 엄마의 모습이 김진경은 늘 사무치게 그리웠다.
“진경아, 엄마 좀 누워야겠다. 더 늦기 전에 너도 얼른 집에 가.”
“그래 알았어. 나 선생님 뵙고 갈게.”
“안 그래도 엄마한테 신경 많이 써 주시는데 선생님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안 그래. 엄마는 몸이나 생각하면서 푹 쉬어. 나 또 올게.”
“그래. 조심해서 가.”
“응. 전화할게.”
챠륵-
김진경은 유지천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면 베드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왜 벌써 가요? 엄마랑 좀 더 있다 가지 않고.”
“엄마가 주무신다고 해서요.”
“하긴. 잠도 올 때 자는 게 좋지. 그래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수고하세요.”
가끔씩 엄마에게 말을 걸어 주는 같은 병실 보호자와 인사를 마친 김진경이 이제 막 병실 문에 다다른 그때였다.
띠띠띠띠- 띠- 띠-
익숙하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 벨소리가 김진경의 귓가에 들려왔다.
“……!”
김진경은 대번에 저 벨소리의 출처가 어딘지 알아챘다. 이미 미친 듯이 듣고 또 들었던 벨소리였다. 바로 엄마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설마 아니겠지…….’
저 벨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소름끼치는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김진경은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아닐 거야. 한동안 잠잠했잖아. 아닐 거야…….’
엄마가 또 그런 미친 짓을 하기 전에 확인해 봐야 했다.
챠륵-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커튼을 빠르게 열었다.
“……!”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유지천은 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분명 자겠다던 사람인 베드 위에 상체를 일으킨 모습이었다.
“진, 진경아 너 아직 안 갔니?”
“엄마 방금 그 벨소리 뭐야?”
김진경이 미간을 좁힌 채 다시 물었다.
“엄마 설마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