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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23화 (122/472)

123화. 베인 상처 2cm

“진, 진경아 너 아직 안 갔니?”

“엄마 방금 그 벨소리 뭐야?”

김진경이 미간을 좁힌 채 다시 물었다.

“엄마 설마 아니지? 휴대폰 좀 줘 봐.”

“휴대폰은 왜? 가다 말고 와서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띠띠띠띠- 띠- 띠-

유지천은 여전히 울리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쥐며 김진경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지금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뭐냐고?”

“뭐긴. 그냥 벨소리지.”

“그러니까 무슨 벨소리인지 묻는 거잖아?”

“어제 약 먹는 시간 깜빡할까 봐 해 놓은 건데 내가 만지다가 또 켜졌나 봐.”

“한번 봐 봐.”

“보긴 뭘 봐.”

띠띠띠띠- 띠- 띠-

“진짜 이건 왜 이렇게 울린다니…….”

유지천이 눈치 없이 격하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 소리를 끄려 화면을 막 터치하려던 찰나였다.

“……!”

김진경이 빠른 동작으로 유지천의 손에 있던 휴대폰을 낚아챘다.

“얘? 진경아?”

당황한 손길이 다시 휴대폰을 찾으려 했지만, 허공에 닿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휴대폰을 확인한 김진경의 눈빛에는 허무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생명수 먹을 시간.

“하!”

어이없는 한숨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엄마!”

“…….”

김진경이 유지천을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알람을 설정한 생명수는 사이비 종교 교수가 준 페트병에 담긴 물이었다.

솔직히 저 물의 정체가 뭔지는 유지천을 빼고는 가족들은 알 수 없었다.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을 물어도 유지천은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저, 우리 진 선생님이 주신 거야. 나를 낫게 해 줄 수 있는 귀한 약이라고.’

유지천은 병에 걸린 뒤부터 종교 시설에서 받은 이상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몸이 악화돼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됐다.

그때마다 버리고 또 버려도 며칠이 지나면 문제의 생명수라는 그 물은 유지천 손에 또 들려 있었다.

김진경은 아빠와 함께 사이비 단체에 전화하고 찾아도 가서 한 번만 더 그딴 걸 보내면 가만두지 않았다고 경고도 여러 번 했었다.

문제는 유지천이 자꾸만 돈을 보내 가족들 몰래 저런 쓰레기를 퀵 서비스로 받고 택배로 받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가족들은 새로운 휴대폰으로 바꾸고 유지천이 온라인 결제를 못 하게 막았다.

병원을 옮긴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생명수 때문이었다.

‘환자분, 자꾸 이런 거 드시면 안 돼요.’

‘이런 거라니요.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요.’

의료진이 문제의 생명수를 버리려고 하자 유지천이 그때마다 난리를 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됐다.

주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계속된 불편 접수에 김진경은 또다시 병원을 옮겼지만 똑같았다.

고민 끝에 어렵게 태경에게 연락을 취해 병원을 옮기게 된 것이다. 유지천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나서는 생명수를 보지도 못했고, 더 이상 찾지도 않는 듯해서 이제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다.

여전히 사이비에 빠져 있었지만, 문제의 생명수만 찾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엄마?”

그런데……. 그런데 또다시 그 문제의 생명수에 손을 대다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김진경은 유지천이 남은 삶을 스스로 단축하는 행동은 적어도 하지 말았으면 싶었다.

“엄마 또 생명순지 뭔지 그딴 쓰레기 먹은 거야? 그래?”

“왜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는 김진경은 유지천이 누워 있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엄마가 숨겼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엄마 또 나 몰래 어디에다가 숨긴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러네.”

베드 밑에도 이불 속에도 개인 사물함과 서랍 안도 샅샅이 뒤졌지만, 문제의 생명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 봐. 아무것도 없잖아.”

여전히 유지천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아니라는 말을 믿기에는 유지천의 행동과 눈빛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급기야 김진경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는 사물함까지 열어 그 안을 확인했다.

유지천은 늘 딸과 아들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사용했기에 쉽게 열 수 있었다.

띠리릭-

“거기 별거 없어.”

“…….”

그런데 정말 말 그대로 별것이 없었다. 옷가지와 가방 등 평범한 물건이 전부였다.

“엄마 정말 아닌 거지?”

주변을 다 확인한 김진경은 이쯤 되니 본인이 괜히 엄마의 말을 믿지 못한 건 아닌지 싶었다. 그동안에 있던 일로 인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 아니라니까. 네가 방금 확인 다 했잖아.”

“엄마. 미안. 내가 심했어.”

“됐어. 네가 왜 미안해.”

“근데 그럼 알람은 정말 왜 울린 거야?”

“이거 진짜 약 먹으려고 한 건데 내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적은 건가 봐. 나도 알람 울리고 나서 알았어.”

“그렇구나.”

“진경아, 엄마 진짜 이제 누워야겠다. 너 때문에 정신이 쏙 빠졌어.”

“어, 알았어. 엄마 누워. 나 진짜 갈게.”

“그래 잘 들어가. 도착하면 문자 보내.”

김진경은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병실을 나왔다. 괜히 엄마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래도 생명수가 없다는 걸 확인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없는 게 맞아.’

김진경은 병실에서 나와 태경의 진료실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잠시만요.”

임정숙 간호사가 김진경을 반기며 태경에게 알렸다.

“선생님, 유지천 환자 보호자분 오셨는데요.”

“지금 괜찮으니까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보호자분 들어가 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와요.”

태경은 꾸벅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김진경을 웃는 얼굴로 반겼다.

김진경을 볼 때마다 태경은 마음이 안 좋았다. 엄마의 일로 마음고생이 워낙 심한 탓에 아직 20대 중반인 그녀의 얼굴은 늘 근심과 그늘이 느껴졌다.

“퇴근하고 바로 오는 길인가 봐요.”

“네, 오늘은 회사가 조금 일찍 끝나서 바로 왔어요.”

“보호자분 힘들지 않아요?”

“아빠가 출장 중이라서 당분간은 제가 더 자주 오기로 했어요. 사실 버티고 있다는 말이 더 맡는 것 같아요.”

김진경이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사람이 딱 세 사람이 있었다. 첫 번째는 아빠였고 두 번째는 한 달에 한 번씩 상담을 하러 가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태경이었다.

김진경은 집안의 가정사와 자신의 과거 일을 모두 알고 있는 태경 앞에서는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저도 엄마도 아빠도……. 사실 이쯤 되니 가족들 모두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아요.”

왜 아니겠는가.

긴 병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사이비에 빠진 엄마가 말기 암 환자가 된 그 과정을 전부 옆에서 지켜본 김진경도 가족들도 상당히 힘들 것이다.

“선생님, 엄마는 좀 어떠신가요?”

“먼저 말씀드린 상태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항암 치료를 하고 있지만, 이미 아시다시피 온몸에 퍼진 상태에요. 또 현재 항암에 의한 부작용도 점점 심해지시고 지금은 현재 상태에서 악화하지 않으시면 다행인 거라고 보시면 돼요.”

“…….”

김진경도 알고 있는 내용에 잠시 침묵했다.

이미 이러한 면담을 몇 번이고 했다. 태경도 반복되는 설명을 하고 또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면담 요청을 계속 받아 주는 것은 김진경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지만 현재 환자의 몸은 그러지 못했다.

그 점이 태경도 안타까웠다.

“아까 병실에 갔다 나오는데 엄마 휴대폰이 울리더라고요. 저는 또 생명수를 마시는 건 아닌가 하고 좀 화를 냈거든요.”

태경 또한 김진경이 알려 줬기에 문제의 생명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냥 단순히 알람이 울린 거였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지금 환자분은 특히나 더 그런 걸 마시면 안 돼요.”

“네, 그래서 저도 더 꼼꼼히 확인하고 엄마한테 말했어요. 선생님 항상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제가 해 드린 것도 없는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왜 해 드린 게 없어요. 선생님이 저나 엄마에게 이미 많은 걸 해 주셨어요.”

이후 김진경은 답답한 속내를 하소연하듯 털어놨다. 다행히 외래 환자도 응급실 급한 콜도 없었기에 태경은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네, 다음에 뵐게요.”

김진경은 적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갔다.

태경은 힘을 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무지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그 말이 너무 성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환자도 보호자도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태경이 유지천 만큼이나 보호자인 김진경을 신경 쓰는 이유는 예전 신화대병원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 * *

몇 년 전, 신화대학병원-

“쌤, 저희 간식 먹는데 같이 좀 드세요.”

평소 친분이 있는 병동 수간호사가 스테이션 앞을 지나는 태경을 불렀다.

“괜찮아요. 드세요.”

“어디 가세요?”

“저, 지금 ER 내려갑니다.”

“예? 조금 전에 수술방에서 나오셨는데 ER은 왜요?”

“도와주려고요.”

“그거 도 쌤이 가기로 한 거 아니에요?”

응급실의 핵심 인력인 의사 한 명이 오프 때 등산을 갔다 넘어져 입원 중이었다. 그 때문에 GS에서 한 명이 주말에 도와주기로 했고 태경의 후배가 가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대로 라면 도현이가 가는 게 맞죠.”

“그런데요?”

“지금 엔테라이티스(Enteritis, 장염)가 급성으로 와서 화장실에 있어요.”

“아이고. 도 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장염이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이 고생하시겠네요.”

“어차피 주말에는 ER에서 GS에 콜 자주 오는데 미리 내려가 있다고 생각하죠. 갈게요.”

“수고하세요.”

태경은 수간호사와 대화를 마친 뒤 바로 ER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 김 선생님이 내려왔네? 도 선생이 내려오기로 한 거 아냐?”

“엔테라이티스로 대신 왔습니다.”

“저런. 엔테라이티스가 만만히 볼 게 아니라고. 김 선생님이 와서 내가 마음이 편해.”

응급실 과장은 태경이 등장하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아무튼 김 선생님 오늘 좀 잘 부탁합니다.”

“네.”

그 뒤 태경은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또 봤다. 주말의 응급실. 그것도 대학병원 응급실은 거의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5분 뒤 TA(traffic accident, 교통사고) 환자 들어옵니다.”

“빨리 CS(흉부외과) 콜해.”

“9번 베드 안티(antibiotics, 항생제)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한 환자들이 계속해서 응급실로 들어왔다.

태경은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면서 환자를 보고 응급실에 온 환자 중 GS의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함께 수술방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폭풍 같은 바쁨이 몰아치고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스테이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선생님?”

잠시 휴대폰으로 논문 자료를 찾아보던 태경을 간호사가 불렀다.

“환자요?”

“네. 2x세 여자로 왼쪽 손목에 라서레이션(laceration, 베인 상처) 2cm 정도 있습니다.”

“원인은요?”

“……입니다. 음주 상태로 소주 반 병 마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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