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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25화 (124/472)

125화. 체온이 39.8도

유지천의 딸인 김진경이 면담을 한 다음 날, 태경은 오전 회진을 돌고 있었다.

“선생님?”

3층 회진을 마치고 계단으로 향하려던 태경을 세영이가 불렀다.

“어. 세영아. 왜?”

세영이는 하루가 다르게 표정도 좋아지고 염증 수치도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빠가 곁에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회복 속도가 빨랐다.

“이거 선생님 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못 드렸어요. 선물이에요.”

“선물? 저번에 선물 줬는데 또 줘?”

“이건 다른 선물이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종이를 펼친 세영이는 태경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요즘 그림 그리는 데 흥미가 생긴 세영이는 만나는 병원 직원들마다 얼굴을 그려 주고 있었다.

“우와, 이거 선생님 그린 거야?”

“네. 마음에 드세요?”

“그럼, 마음에 들지. 선생님이 잘 간직할게.”

“네. 그리고 저 이제 음식 먹을 수 있어요. 아빠가 그러는데 이따 밥 먹을 거래요.”

“그래 맞아. 이따가 밥 나오면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

“네, 선생님.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최모나 선생님 그려 주기로 했거든요.”

최모나는 회진 시간이 아닐 때도 가끔 세영이와 우진이를 보러 왔다. 그 때문인지 아이들은 최모나를 좋아했다.

“최모나 선생님 얼굴을 그려 주기로 했어?”

“네, 잘 그려서 이따 저녁에 줄 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그래, 또 보자.”

씩씩하게 인사하는 세영이를 기특하게 쳐다본 태경은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번에는 세영이의 아빠인 고영철이 큰 종이상자를 들고 올라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회진 때 안 보이셔서 어디 가셨나 했는데 또 작업하러 갔다 오셨나 봐요.”

“저런! 제가 정신없이 하다 보니까 회진 시간 지난 것도 몰랐네요.”

요즘 고영철은 세영이가 낮잠을 자거나 밤에 잘 때,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기 전 하는 작업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이 세영이를 응원하며 붙였던 희망의 메시지를 보러 가는 거였다.

고영철은 병원 정문 담벼락에 붙어 있는 수많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전부 떼어서 수거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양에 장득칠과 최 팀장이 도와준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고영철은 그때마다 한사코 거절했다.

“양이 제법 되는데 혼자 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요. 이게 전부 다 우리 세영이를 향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라 그런지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혼자 하는 게 맞아요. 앞으로 파일에 넣고 세영이 보여 주려고요. 살면서 우리 딸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선생님 수고하세요.”

고영철은 큰 상자를 들고 꾸벅 인사를 하며 3층으로 올라갔고, 태경은 계단을 내려와 유지천이 있는 207호로 향했다.

조금 전 회진 때 유지천이 자리를 비워 못 봤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에 한 번 더 들른 것이다.

“또 그런다, 또.”

병실 안에 들어서자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와 함께 커튼 안에서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태경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엄마가 어제 그랬잖아 이제 그런 거 안 먹는다고.”

-진짜지? 엄마 이제 몸이 많이 약해져서 그런 거 절대 먹으면 안 돼.

김진경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침부터 전화로 유지천에게 문제의 생명수에 대해 따져 묻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김진경이 면담을 보고 나간 뒤, 병원에 전화를 걸어 태경에게 한 부탁이 있었다.

‘선생님, 제가 왠지 좀 기분이 찜찜해서요.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혹시 생명수 때문에 그런가요?’

‘네, 엄마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시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예전에도 저렇게 말씀하시다가 가족들한테 숨겼던 거 걸린 적이 있어서요. 그래도 엄마가 선생님 말씀을 신뢰하시니까 주의 주시면 좀 들을 거 같아요.’

‘그래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태경이 굳이 유지천을 다시 보러 온 이유도 바로 저 생명수 때문이었다.

김진경으로부터 저 생명수의 정체가 뭔지 들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 생명수라는 게 사이비 교주가 씻은 물이래요.’

김진경은 차마 말하기 창피했지만, 현재 엄마의 주치의였기에 태경에게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태경은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균에 취약한 말기 암 환자가 온갖 세균이 득실거리는 그런 물을 먹는다니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김진경은 어제 집에 가던 중 동네에서 유지천과 함께 사이비에 빠진 이웃 아줌마를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아줌마는 그래도 건강하잖아요. 그 쓰레기가 뭔지 제발 알려 주세요. 네? 아줌마!’

가족들에게 끌려온 아줌마를 붙잡고 애원하며 물어본 결과 간신히 생명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진경아, 그거 쓰레기 아니야. 그 생명수 먹으면 병이 낫고 영생을 살 수 있어. 우리 교주님께서 친히 하사하신 물이야. 그러니까 우리 유지천 협력자님도 꼭 병이 사라질 거야.’

지금까지 단순히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돈을 주고 산 물이라고 생각했던 김진경은 이웃 아줌마의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걸어 태경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다.

“진경아, 엄마 걱정하지 말고 얼른 출근이나 해. 끊을게.”

“환자분?”

유지천이 전화를 끊자 태경이 인기척을 하며 커튼을 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까 제가 화장실에 가느라 못 뵀어요.”

“네, 그래서 다시 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구토가 나오거나 팔다리가 저리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아니요. 저 몸에 좋은 것도 먹고 우리 교주님 말대로 병원 치료도 잘 받고 있어서 그런지 점점 좋아지는 거 같아요. 정말 좋아요.”

쇠약해진 얼굴 위로 미소를 띠며 말하는 유지천의 말을 태경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다. 전혀 좋아지고 있지 않았다.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었다. 게다가 검사 결과도 모두 좋지 않았다.

“환자분, 혹시 그 생명수인가 하는 그 물 마시고 계신 건 아니죠?”

태경은 물어보면서 베드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문제의 페트병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선,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유지천은 살짝 당황함을 내비쳤다.

“진경이가 말했죠? 걔는 참, 선생님한테 별소리를 다 했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환자분 절대 그 물 마시면 안 돼요.”

태경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와 심각한 표정으로 조목조목 주의 깊게 말했다.

“제 말 명심하세요. 그거 절대 마시면 안 됩니다.”

사이비에 깊게 빠져 맹신하는 유지천이 부디 자기 말을 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강조한 뒤 병실을 나왔다.

“유지천 환자분 Lab 결과 나왔습니다.”

병실을 나온 태경이 병동 스테이션에 다다르자 이찬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ANC(absolute neutrophil count, 절대 호중구 수, 항암 부작용 중 백혈구 감소증을 확인하는 지표)가 100입니다.”

“하! 너무 낮다. 지금 바로 환자 1인실로 빼서 역 격리하고 식이도 모두 익힌 음식만 주고 G-CSF 제품들 중 하나 피하 주사로 우선 주고 체온 지속적으로 측정해서 not i줘.”

“네.”

“그리고 항생제 그람 양성과 음성을 모두 cover하게 아목시실린(amoxicillin)과 시프로플록사신(ciprofloxacin)을 같이 주고. 지금 바로 해”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오더를 들은 이찬희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지천 환자를 만날 때마다 태경은 측은한 마음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든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회진을 오게 된다.

“유지천 환자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바로 콜해 줘요.”

“네, 원장님.”

태경은 스테이션 간호사 당부하며 진료실로 내려갔다.

* * *

그날 저녁, 마지막 외래 진료를 마친 태경은 저녁을 먹고 응급실로 향하다 로비에서 발길을 멈췄다.

“할머님, 곧 택시가 도착할 것 같습니다.”

1층 로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옆에 함께 앉아 있는 최모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잉. 뭐라고? 누가 도착했다고?”

머리가 흰 노인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택시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할머님, 병원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아! 택시. 그래요. 고마워요. 자! 아니 아니,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보다 이거 받아요.”

노인은 최모나 손에 알사탕 한 개를 쥐여 줬다.

“내가 목이 자주 잠겨서 사탕을 가끔 먹는데 보기보다 맛있다우. 한 번 먹어 봐요.”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서. 그럼 수고해요.”

“네, 안녕히 가십시오.”

노인에게 인사를 한 최모나는 알사탕을 가운 주머니에 넣다 태경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응, 응급실이 잠깐 여유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저 할머니께서 발에 살짝 깁스하셔서 그래서 제가 잠시 택시…….”

최모나는 태경과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기승전결까지 아주 세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

“……예?”

“나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지금 최 선생 혼자 나한테 설명하고 있잖아.”

그제야 최모나는 자신이 묻지도 않은 말에 열변을 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전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최모나는 상당히 민망해하며 응급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인데요. 가랑비가 아니라 소낙비에 젖겠어요.”

접수처에서 일을 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요.”

확실히 장족의 발전이 맞았다. 물론 최모나가 엄청나게 친절하거나 과하게 행동하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처음의 최모나와 지금의 최모나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앞뒤 꽉 막혀 벽창호 같던 모습이 더는 아니었다.

“제가 최 쌤에게 우산을 가지고 다니라고 할까 봐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Rrrrrrrrrrr

그렇게 임정숙 간호사와 대화하고 있던 와중에 태경이 손에 들린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선생님. 유지천 환자요.

병동 콜이었다. 유지천이란 말이 나오자 태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체온이 39.8도고 온몸이 몸살처럼 쑤신다고 해요. 기침도 간헐적으로 하고 복통도 호소하세요.

“환자 BP(혈압)와 HR(심박동 수)은 어때요?”

-30분 전에 BP는 90/50이고 HR은 115입니다.

“우선 vital full monitoring(활력징후 실시간 측정)하고 항생제 메로페넴(meropenem, 광범위 항생제)으로 올려 주세요. 스퓨텀(sputum, 가래) 블러드(blood, 혈액) 유린(urine, 소변) 모든 컬쳐(culture, 미생물 배양 검사) 다 나가 줘요.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태경은 말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병동으로 올라갔다. 거짓말이 아니라 가운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큰 보폭으로 뛰어 올라온 태경은 환자가 있는 병동 앞에서 급히 멈췄다.

환자가 호중구 감소증(항암제 등에 의해 면역에 필요한 백혈구의 한 종류가 감소하는 병적 상태로, 감염이 호발할 수 있음)이 동반되었으므로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냥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손 소독을 철저하게 한 뒤 일회용 파란색 가운을 입고 일회용 장갑을 끼고서 유지천 환자가 있는 1인실 병동으로 들어갔다.

“……!”

그런데 순간 태경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확실히 이상하다.

‘이게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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