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환자의 주권
그리고 3일 뒤 유진천은 태경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환자분 설사는 이제 안 하신다면서요?”
“네, 선생님 덕분이에요.”
태경은 유지천이 며칠 전과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주 싸우던 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오늘 월차여서 엄마랑 같이 있으려고 일찍 왔어요.”
항상 퇴근 무렵에 오던 김진경도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병실에 와 있었다.
“엄마도 내가 일찍 오니까 좋지?”
“그럼, 좋지.”
유지천은 물론이거니와 김진경의 표정이 전과 달리 편안해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 다행이었어요.”
3일 전, 별안간 안 좋았던 유지천의 모습을 떠올리며 태경이 말했다.
“이제 음식도 반드시 익힌 것만 드시고 항암도 잘 맞으셔야 해요. 아셨죠?”
“저,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선생님 저요……. 이제 항암 치료 하지 않을게요.”
“…….”
전혀 예상 못 한 말에 태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지천이 항암을 그만둔다니 사실 좀 놀랐다.
항암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곧 치료를 중단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지금까지 워낙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에 저런 발언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요 며칠 치료도 잘 받고 가족들과 사이도 좋아졌기에 오히려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겠구나 싶었다.
“혹시 어떤 이유 때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너무 비싸요.”
대부분 항암 치료는 국가에서 지원이 된다. 하지만 좀 더 효과적인 항암제를 사용할 경우, 그리고 그중에서도 보험 적용이 안 되는 항암제는 금액이 비싸기에 환자나 보호자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가족들 돈 그만 쓰려고요. 우리 진경이도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해야 하고 진현이 대학도 가야 하는데, 저한테 돈을 다 쓰기에는 미안해서요. 대신 그 돈으로 우리 딸이랑 마지막 여행이나 가게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유지천과 달리 김진경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족분들도 알고 계신가요?”
“네, 가족하고도 이미 얘기 끝냈어요.”
유지천은 치료를 계속 이어 갈지 말지가 아니라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선생님. 제가 아직 우리 딸이랑 둘이 여행 한 번을 못 가 봤어요. 지금 아니면 저 못 갈 것 같아요.”
태경은 지금 유지천이 하는 말이 순간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충분한 이성적인 생각 끝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치료를 더 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없었다.
시한부 환자가 가족과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도 당사자들에게 중요하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환자분 의견 존중합니다.”
염증 수치도 좋아졌고 발열과 설사도 더는 없었기에 유지천이 퇴원하는 데 현재로서 무리는 없었다.
“근데 오늘 퇴원하시려고요?”
“네, 그동안 제가 놓쳤던 병원 밖에 풍경도 좀 보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퇴원 수속하세요. 항상 몸조심하셔야 해요.”
“네, 선생님.”
대화를 마친 태경이 병실을 나오는데 김진경이 곧바로 뒤따라 나와 불렀다.
“선생님?”
“네, 보호자분.”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엄마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아니요. 저 때문이 아니에요. 보호자분과 지금까지 옆에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준 가족분들 때문이에요. 가족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제 말이 환자분에게 닿을 수 있던 거예요. 근데 여행은 어디로 갈지 정했어요?”
“저 곧 회사 그만두거든요.”
김진경은 엄마와 함께 지내려고 다니던 회사도 정리 중이었다.
“그래서 아빠랑 진현이가 있는 지역으로 가려고요. 그리고 그쪽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려고 알아보고 있어요.”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유지천이 내린 결론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가족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요. 잘 아시겠지만, 여행하면서 환자분 무리하지 않게 옆에서 잘 챙겨 드리세요.”
“네. 제가 엄마 잘 돌볼게요.”
“그동안 따님이 고생 많았어요.”
“전 가족이잖아요. 선생님이 늘 고생하셨죠.”
“이따 가기 전에 줄 게 있으니까 저 좀 보고 가요.”
“네. 그럴게요.”
잠시 뒤, 유지천은 딸과 함께 태경의 진료실을 찾았다.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퇴원 수속 벌써 끝났어요?”
“네, 아침이라 그런지 빨리 해 주시네요.”
“아까 내가 줄 거 있다고 한 말 기억해요?”
“네.”
“이거예요. 이거 꼭 가져가요.”
도대체 태경이 줄 게 뭐가 있을까 싶던 김진경과 유지천은 건네받은 A4용지를 보고 꽤 놀랐다.
-OO지역 호스피스 병원.
사랑해 호스피스 병원.
힘찬 하루 소망 병원.
하늘 노을빛 병원.
출력된 종이에는 유지천과 김진경이 여행 갈 주변으로 평이 좋은 호스피스 병원 리스트가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걸 다…….”
그뿐 아니라 주변 응급실과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유지천이 응급실을 갔을 때 의사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부작용이 심한 약과 잘 맞았던 진통제 등 꼼꼼히 자료도 첨부했다.
“선생님, 언제 이걸 다 하셨어요?”
“급하게 출력해서 빠진 목록이 있을 수도 있어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가지고 가세요.”
“무슨 소리세요. 큰 도움이죠.”
“진경이 말이 맞아요. 마지막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처음 본 그때도 마지막인 지금도 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시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네요.”
“그동안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인사말을 전하는 유지천의 표정은 지금까지 태경이 마주한 표정 중 가장 편해 보였다.
“환자분 고생 많으셨어요. 몸 조심히 여행 잘하시고 가족분들하고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여행하다가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유지천과 김진경은 태경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버스 타고 갈까?”
“버스는 무슨 버스야. 엄마 편하게 가야지.”
“대중교통도 편해. 집까지 택시 타고 가려면 비싸잖아.”
“택시 아니야. 데리러 온 사람 있어.”
“데리러? 아빠 왔어?”
“아빠 말고. 저기 왔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진경은 병원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던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동규 씨?”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는 진경 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이동규라고 합니다.”
김진경에게 유지천의 소식을 들은 이동규는 자신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차를 몰고 병원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진경 씨, 가방 이리 주시고 어머님과 함께 뒤에 타세요.”
유지천은 이동규의 표정을 보며 딸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인물이 아주 좋으시네요. 그나저나 출근도 해야 하는 사람이 잠을 더 자야 할 텐데 이렇게 일찍 수고해서 어떡해요.”
“아닙니다. 제가 원래 아침잠이 없습니다. 어서 타세요.”
“그래, 엄마 얼른 타.”
“알았어. 집까지 태워 줘서 고마워요.”
유지천은 딸과 이동규를 쳐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별말씀을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탄 차량은 우리병원과 점점 멀어졌다.
* * *
“괜찮으세요?”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 창가에서 유지천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태경에게 물었다.
“사실 아까 퇴원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내드리는 게 맞나 하고 순간 고민했거든요.”
태경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던 몸을 돌렸다.
“그런데 유지천 환자의 표정을 보니까 잘 결정한 거 같아요.”
“잘하셨어요. 그나저나 선생님, 얼른 준비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요? 아직 팀장님 오시려면 시간 좀 남지 않았나요?”
“팀장님이라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원장님, 그리고 임 선생?”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 팀장이 등장했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전날 쉬는 날이었던 그는 평소와는 다른 복장이었다.
항상 깔끔한 정장과 구두를 신고 있던 최 팀장은 마치 등산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편한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근무할 복장과는 거리가 멀었고, 목에 카메라까지 메고 있었다.
“아니, 팀장님 그 카메라는 어디서 나셨어요?”
거의 전문가 수준의 고급 카메라를 보며 임정숙 간호사가 신기한 듯 물었다.
“제 동생 놈이 사진 찍는 게 취미거든요. 제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빌려왔습니다.”
“그거 너무 과한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임 선생. 우리 원장님의 봉사 현장 사진을 잘 찍으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죠.”
그렇다 오늘은 태경이 최 팀장과 함께 의료 봉사를 가는 날이었다.
몇 주 전, 최 팀장은 태경에게 의료 봉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장님, 이번에 꽤 알려진 의료 봉사가 있는데 저랑 같이 한번 다녀오시면 어떠신지요? 병원을 알리는 데 도움도 되고 제 생각에는 괜찮을 거 같은데요.’
최 팀장만큼 병원 홍보에 진심인 사람도 드물었다.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병원을 알릴까 고민하는 마음이 고마워 태경은 의료 봉사 제안을 수락했다.
의료 봉사는 너튜브 의학 채널의 고정 콘텐츠였다. 형제 의사 두 사람이 운영하는 너튜브는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쉽게 다양한 의사를 초대에 의학 지식을 전하는 채널이다.
워낙 구성이 좋아서 구독자도 많고 의학 채널 중에서는 가장 인기가 많았다. 운영자들은 채널 초기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의료 낙후 지역인 시골로 의료 봉사를 나갔다.
처음에는 주변 동료들과 함께하던 작은 봉사가 채널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봉사를 희망하는 의사들도 규모도 늘어났다.
영상 하단에 참여한 의사들과 병원 이름을 넣었는데 이 부분이 사람들에게 홍보 효과가 제법 쏠쏠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세영이의 일로 매스컴을 탄 태경도 우리병원도 많이 알려졌다.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던 최 팀장은 봉사를 신청했고 많은 신청자 중에서 뽑히게 된 것이다.
“쉬는 날인데 의료 봉사랑 겹쳐서 어떡해요?”
안 그래도 병원 붙박이인 사람이 모처럼 쉬는 날 봉사를 하러 가니 임정숙 간호사는 안타까웠다.
“일부러 봉사 가는 날 오프 잡은 겁니다.”
태경은 병원에 지장이 가지 않기 위해 봉사 가는 날과 오프 날을 맞췄다.
“아니, 근데 선생님이야 직접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가시는 건데 팀장님은 왜 가시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태경 역시 왜 굳이 최 팀장이 함께 가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임 선생 내가 아까 말했잖아요. 원장님 사진 찍으러 간다고. 사진을 잘 찍어서 병원에 붙이려고 합니다. 홍보 효과 때문이죠.”
“우리 팀장님을 누가 말리겠어요. 아무튼 두 분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잘 갔다 올게요.”
“그럼 선생님 봉사 마치고 바로 퇴근하시는 거죠?”
“네, 오늘은 집에 갑니다.”
“그것참 반가운 소리네요.”
안 그래도 태경 역시 오늘은 봉사가 끝난 뒤 집으로 퇴근할 생각이다. 학회 발표를 앞두고 있기에 집에 있는 자료가 필요했다.
“임 선생, 갔다 올게요. 원장님. 제가 차에 시동 걸어 놓을 테니 나오세요.”
“준비하고 나갈게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태경은 이찬희와 최모나에게 중요 환자들을 부탁했다.
“이 선생, 최 선생이 오늘 고생 좀 해 줘. 내가 말한 환자들 체크 하는 거 잊지 말고.”
“병원 걱정일랑 이만큼도 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최모나?”
“네. 선생님.”
“이찬희 흥분하면 덜렁거리니까 옆에서 잘 봐줘.”
“예.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보겠습니다.”
“아, 선생님 저 못 믿으세요?”
“갔다 올게.”
억울해하는 이찬희의 말을 뒤로한 채 태경은 최 팀장과 함께 출발했다.
“오늘 가는 곳이 시골이라 공기가 좋을 겁니다.”
운전하는 최 팀장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해외 의료 봉사보다는 여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원장님은 편하게 진료하면서 주변 경치도 보시고 하루 힐링한다 생각하세요.”
“봉사하러 가는데 힐링하면 안 되죠.”
“겸사겸사죠. 하하하!”
최 팀장은 의료 봉사가 병원 업무보다는 여유롭고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도착 후 봉사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깨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