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의료 봉사 현장
“운전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저 원래 운전하는 거 좋아합니다.”
태경은 최 팀장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려 의료 봉사 현장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공기가 아주 끝내주네요.”
“진짜 공기가 다르네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최 팀장을 보며 태경도 이곳의 공기를 음미했다.
두 사람 주변에는 봉사 참가자와 촬영을 담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건강하자 채널 운영자입니다.”
제일 앞쪽에 있던 의료 봉사 주최자 두 사람이 인사와 함께 오늘의 일정을 소개했다.
“병원 일 하시기도 바쁘실 텐데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인근 각 마을로 가셔서 진료를 시작하실 겁니다. 오늘 선생님들을 도와주실 분들은 저희 채널과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는 큰 희망나눔회 팀장이신 김예븐 수녀님과 동료분들이 자리해 주셨습니다.”
주최자가 소개하자 한쪽에 있던 수녀님들이 밝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했다.
“약품과 주사는 저희가 사전에 파악한 뒤 미리 마을에 갖다 놨습니다. 진료 시간은 오후 5시까지고 저희는 진료 중에 따로 인터뷰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한 분을 더 진료하는 게 낫더라고요. 그러니까 촬영은 일체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진료 보시면 됩니다.”
“인터뷰는 추후 전화로 대체하니 그때 소감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따로 뒤풀이가 없습니다.”
너튜브에서 주최한 봉사라고 해서 조금은 보여주기식이 아닐까 했었다. 하지만 막상 와서 설명을 들어 보니 태경은 말 그대로 봉사에만 집중한 주최자의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뒤풀이는 봉사 취지에 맞지 않은 거 같아서요. 끝나면 각자 편하게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주최자들의 자세한 설명이 끝나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봉사하러 갈 마을이 정해졌다.
“안녕하세요, 김태경 선생님. 건강하자 운영자 이국건입니다.”
주최자 한 명이 태경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김태경입니다.”
“김태경 선생님이 신청하셨다고 해서 신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큰일 하셨습니다.”
세영이의 일이 워낙 이슈가 됐던 터라 주최자인 의사도 태경을 알고 있었다.
“인터뷰하시는 거 보니까 말씀도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별말씀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번 봉사 편은 조회수 잘 나올 것 같네요. 선생님께서 담당할 마을은 다른 곳보다 가구 수가 좀 더 됩니다. 능력 좋으신 분이라 그렇게 배치했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이거 살짝 긴장되는데요?”
“대신 봉사 베테랑이신 김예븐 수녀님이 함께 가실 거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태경은 김예븐 수녀와 함께 최 팀장의 차를 타고 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걸어야 해요.”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김예븐 수녀의 안내에 따라 진료 장소로 걸어서 이동했다.
“듣자 하니 유명한 선생님이시던데, 제가 TV를 보지 않아서 몰랐어요.”
“아닙니다. 수녀님께서는 여기 처음 오신 게 아니신가 봐요.”
“네, 저는 봉사하는 일이 주일이다 보니 올해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4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김예븐 수녀는 가녀린 외모에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깔끔한 수녀복 차림의 그녀는 따뜻한 분위기가 풍겼다.
“다른 곳도 비슷하지만 여기는 버스가 잘 안 다녀요.”
“그러면 마을 분들이 외부 일 보기가 쉽지 않겠네요.”
“네, 시골이다 보니까 대부분이 어르신들만 살고 계셔서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아요. 그래서 시내 한 번 나가는 것도 병원 가는 것도 이분들에게 큰일이세요.”
김예븐 수녀의 말을 들으며 태경은 하루뿐이지만 진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수마을 도휵리 의료 봉사.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 장소인 마을 회관 앞에 도착했다. 회관 건물에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마을 이장이 세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수녀님 잘 지내셨죠?”
“네, 저야 늘 같습니다. 이쪽은 오늘 진료를 맡으신 김태경 선생님이세요.”
“아이고, 반갑습니다. 도휵리 이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태경은 이장과 인사를 한 뒤 바로 진료를 시작했다.
“이제 진료하는 거여?”
“저기 선상님 오셨네.”
이미 소식을 듣고 일찍부터 회관을 찾은 어르신들로 준비한 의자는 만석이었다.
“엄청 많이 오셨네요.”
최 팀장은 잔뜩 모인 어르신들을 보며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렇게 하죠. 수녀님께서 간단하게 진료 접수를 해 주시면 제가 진료를 보는 거로 할게요.”
“그럼 제가 진료 수첩에 성함, 나이와 아픈 곳을 적어서 어르신들에게 드릴게요.”
“네, 그러면 좋을 거 같아요.”
간략하게 업무 분담을 나눈 태경은 곧장 진료를 시작했다.
“다음 김고창 할아버님.”
“아고. 드디어 내 차례인가. 내가 오늘 여기 오려고 아침밥도 안 먹고 와서 아주 배가 고파 죽것어.”
“얼른 봐 드릴게요. 우리 할아버님 위가 안 좋으시다고요?”
“맞아. 내가 젊어서부터 위가 약했어. 위가 쓰린 게 저녁에 더 그런 거 같아.”
“할아버님 제가 약 처방해 드릴게요. 다른 곳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위 쓰린 것 말고는 건강해.”
“그래도 위가 계속 쓰리시면 위내시경 한 번 받아 보세요. 아셨죠?”
“그 호수로 목구녕 쑤시면 우웩 하는 내시경?”
좀 과격하긴 했지만 노인은 위내시경을 정확히 표현했다.
“네, 맞아요. 받아 보셨어요?”
“받아 봤지. 작년에 그거 받다가 요단강 건너려다 유턴했잖아. 노인네라고 생으로 하라고 해서 아주 죽다 살았어. 말도 마.”
노인의 유쾌한 말에 태경은 순간 웃음이 날 뻔했다.
“결과는 괜찮으셨어요?”
“괜찮아. 멀쩡하대. 이 나이 먹고 이 정도면 건강한 거래.”
“제가 약 처방해 드릴게요. 위산 억제제가 아까 보였는데……. 수녀님 혹시 위산 억제제 보셨나요?”
“네, 현탁액 옆에 있을 거예요.”
“네, 여기 있네요.”
약통을 집어 든 태경은 약을 먹기 좋게 나눠 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르신 이거 약 잘 챙겨 드세요.”
“고마워요. 이거 내가 텃밭에서 수확한 건데 같이들 나눠 먹어.”
노인은 껍질에 쌓인 옥수수 한 자루를 진료 테이블 아래 내려놨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긴 됐어. 그냥 먹어. 수고해요.”
“아이고, 선생님 나 주사는 언제 놔 주는 겨. 벌써 30분째 기다리고 있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다음 대기자가 의자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우리 할머님은 허리가 아프시다고요?”
“나이 들어 그런지 다 아프지. 근데 허리가 제일 아파. 날 흐리고 비만 오면 아주 쑤셔.”
“제가 허리 진통제 주사 놔 드리고 약 처방해 드릴게요.”
좁은 건물 안에서 태경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진료는 물론이고 약도 포장하고 주사 처치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일손이 부족해서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럼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오시는 분들 자리 안내랑 여기에 아픈 곳 적어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최 팀장도 일손을 거들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이 몰아치고 늦은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선생님 정신없으시죠?”
“엄청나네요. 진료 보러 오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거든요.”
세 사람은 간단하게 김밥을 먹으면서 잠시 숨을 돌렸다.
동네 이장님이 제대로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태경을 비롯한 일행은 한사코 거절했다.
“간호사 선생님 한 분만 와도 좀 수월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간호사랑 의사랑 팀을 맺어 주곤 해요.”
“그럼 이번에만 간호사분이 없던 건가요?”
“아니요. 여기 있잖아요. 저 간호사 출신이에요.”
태경은 김예븐 수녀가 간호사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원래는 제가 선생님 옆에서 도와드리는데 오늘 어르신들이 이렇게 많이 오실 줄 몰랐어요.”
기존에 봉사를 하던 마을보다 사람들이 많았기에 김예븐 수녀가 태경을 도와줄 틈이 없었다.
“그나저나 최 팀장님께서 말씀이 없으시네요. 괜찮으세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여기 마을 분들이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네요.”
“선생님이 보기에도 그러시죠? 연령대는 여기가 가장 높은데 생각보다 다들 건강하세요.”
태경은 아까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크게 아픈 분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우리 마을이 달래 장수마을이 아닙니다. 어르신들이 대체로 다 건강하세요.’
그런데 이장의 말대로 어르신들이 꽤 건강했다.
물론 진료 보러 오는 사람마다 기본적으로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가 나긴 했다. 하지만 2단계를 넘지 않았고 냄새가 강하지도 않았다.
냄새뿐만 아니라 진료를 볼 때도 크게 아픈 환자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고혈압이나 당뇨 등 기저 질환을 앓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에 저 정도의 냄새는 양호한 것이었다.
“자! 선생님, 최 팀장님. 식사 다하셨으면 진료 다시 시작할까요?”
“그러죠.”
잠깐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세 사람은 다시 진료에 몰두했다.
“이거 대상 포진 아녀?”
“네, 어르신 대상 포진은 아니고 알레르기예요. 아프진 않으시죠?”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아.”
“가벼운 알레르기라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약 드릴게요.”
또다시 밀려드는 어르신들을 쉴 틈 없이 진료하며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어찌나 바빴던지 너튜브 촬영 담당자가 와서 촬영하고 간지도 몰랐다.
“우리 선생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드디어 끝났네요. 두 분 다 고생하셨어요.”
진료한 태경도 어르신들의 짐을 들어 주며 운전을 한 최 팀장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힘드셨죠?”
“힘든 것보다 배가 고파서 눈앞이 아찔합니다.”
앉아 있던 최 팀장이 허기진 배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배고프실까 봐 제가 미리 배달시켰어요. 다들 중국집 괜찮으세요?”
“전 좋습니다.”
“근데 여기도 배달이 되나요?”
우리나라의 배달 문화야 워낙 뛰어났지만, 오는 길에 식당은 고사하고 작은 슈퍼 하나 안 보여서 하는 말이었다.
“그럼요. 선생님. 시내에서 차로 배달해 줘요. 여기 중국집이 정말 맛있어요.”
“수녀님은 오늘 안 힘드셨어요?”
태경은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김예븐 수녀가 신기할 정도였다.
“제가 힘든 게 뭐가 있나요. 선생님이 다 하셨는걸요. 저는 사실 어르신들 만나고 대화하는 게 좋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외국에 비하면 여건이 좋잖아요.”
“외국이요?”
“네. 의료 선교로 동남아시아에 8년 있었거든요. 올 초에 입국했어요.”
“어디 계셨는데요?”
“인도네시아요. 제가 있던 곳은 작은 섬인데 정말 여건이 안 좋았어요. 씻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쉬운 게 하나 없었죠.”
“정말 힘드셨겠네요.”
“네. 특히 화장실이 힘들었는데 거기는 화장지를 안 써서 적응하느라 초반에 애 좀 먹었어요.”
“그럼 대변 뒤처리는 어떻게 하나요?”
가만히 듣고 있던 최 팀장이 궁금한 듯 물었다.
“손이요. 왼손으로 뒤처리하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요.”
“위생이 너무 안 좋은데요.”
“처음에는 저도 경악했죠. 그런데 1년 지나고 나니까 완벽히 적응했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 일을 8년이나 하신 거예요?”
“의사 선생님들은 장기간 계시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래서 저 같은 간호사분들이 오래 머물면서 봉사가 유지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거죠. 힘은 들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환자를 위하는 마음은 태경 역시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8년이란 세월 동안 그 어떤 이득도 없이 그런 고생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전혀 다른 차원의 희생인 것이다.
“수녀님 말을 듣다 보니 존경스러운 마음이 저절로 생기네요.”
“아니에요. 선생님은 환자 볼 때 힘들지 않으세요?”
“힘은 들지만 행복하고 뿌듯한 마음이 크죠.”
“저도 똑같아요. 제가 종교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행복해서 한 일이에요. 8년이라는 세월이 좋았고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전혀 대단한 것도, 존경할 만한 것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배달이요!”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배달원의 반가운 소리 들여왔다. 세 사람은 마을 회관 앞 평상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끝내주는 공기에 개울 소리 들려오고 멋진 산을 보며 평상에서 식사라. 이거 신선이 따로 없네요.”
최 팀장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운을 차렸다.
“그런데 우리 말고 누가 더 오나요?”
“아니요. 저희가 다예요.”
짜장면에 짬뽕, 탕수육은 물론 군만두, 난자완스에 라조기까지. 이건 뭐 몇 사람이 더 와서 같이 먹어도 될 양이었다.
“수녀님, 양이 좀 많지 않을까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먹어요.”
“네? 이 많은 걸 다 드세요? 마르셨는데 대식가시네요.”
“놀라셨죠? 제가 사실 음식을 조금만 먹으며 너무 기운이 없고 살도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음식을 많이 먹게 됐어요. 선생님. 면 불겠어요. 얼른 드세요.”
“네, 수녀님도 맛있게 드세요.”
세 사람은 배가 고팠던 만큼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설마 진짜로 다 먹겠나 싶던 김예븐 수녀는 그 많은 음식을 전부 다 먹었다.
그리고 태경이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 즈음, 식사를 끝낸 김예븐 수녀에게서 꽤 진한 암모니아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