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중요한 실험
여울 소방서-
“아으. 잘 먹었다.”
“이상하게 오전에 출동하고 오면 배가 더 고픈 것 같아요.”
소방대원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장님은 안 그러세요?”
“긴장해서 그래. 안 그러냐 승원아?”
막내의 질문에 호탕하게 웃으며 답한 부장이 건너편에 앉은 소방사 도승원에게 물었다.
“1년 차 때는 그럴 수 있어요. 저도 막내 때는 무조건 출동하고 오면 점심에 그렇게 배가 고프더라고요.”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건 선배님뿐입니다.”
“저저, 맞선임이 편들어 주시니까 아주 신났네. 신났어.”
“그나저나 오늘따라 점심 후에 아아가 먹고 싶네. 안 그래요. 팀장님?”
“아아가 뭐야?”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임말이라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대요.”
“됐어. 그냥 하던 대로 해. 40대 아저씨가 아아가 뭐냐.”
“팀장님도 참. 요즘 40대면 아직 청년입니다.”
“그건 부장님 말이 맞죠.”
“다들 아아 한 잔 어때?”
“좋죠. 부장님이 쏘시는 거예요?”
“야, 요즘 커피값 장난 아니야. 공평하게 사다리 게임을 해야지.”
“제가 쏠게요.”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도승원이 멋진 표정으로 커피 충전 카드를 들어 올렸다.
“오! 이건 비싼 별다방 카드. 선배가 샀어요?”
“아니. 승희가 팀원이랑 커피 마실 때 쓰라고 선물해 줬어.”
“이야! 승원이는 다 가졌어. 얼굴 좋아. 키도 커. 게다가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까지 있잖아.”
“부장님도 참. 그만하시고 얼른 드시고 싶은 거나 말씀하세요.”
“저것 봐. 눈치까지 빨라. 역시 우리 팀의 보배야. 그럼 나는 자바칩 프라푸치노에 휘핑크림 가득.”
“그럼 저는 녹차 프라푸치노요.”
“프라 뭐? 됐고 다들 아아로 통일해. 얻어먹는 사람들이 뭔 말이 많아. 승원아 다들 아아다.”
“네, 팀장님. 그럼 커피…….”
똑똑-
“네.”
도승원이 커피를 사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사무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다들 안녕하세요.”
“승희야?”
“아이고. 이거 승희 씨가 웬일이야.”
사무실을 찾은 여자는 소방사인 도승원의 여자 친구 이승희였다.
“근처 지나가다 전해드릴 게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보조개가 매력적인 그녀는 밝은 미소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를 흔들었다.
“팀장님과 오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부장님과 재원 씨는 자바칩, 녹차 프라푸치노 그리고 다른 분들 것까지 전부 있습니다.”
대원들의 커피 취향까지 정확히 알고 있을 정도로 이승희는 대원들과 친분이 좋았다.
“승희 씨 고마워.”
“감사히 잘 마실게요.”
“별말씀을요. 오늘도 다들 안전한 하루 보내세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철컥-
“커피는 뭐 하러 사 왔어.”
사무실을 나가는 이승희를 따라나선 도승원은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가끔인데 어때. 오늘부터 오빠 주간이지?”
“응. 이따 끝나고 데리러 갈게. 오늘 고기 먹으러 가자.”
“고기 좋지. 가 볼게. 나오지 마.”
“승희야?”
진짜 가려는 이승희를 불러 세운 도승원은 복도를 살핀 뒤 재빨리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오늘 실험 있지? 조심해.”
“나야 안전제일이지. 우리 오빠도 조심해.”
손을 흔들며 가는 이승희를 쳐다보는 도승원에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철컥-
“승희 씨 갔어?”
“네, 팀장님.”
“덕분에 커피 잘 마실게. 꼭 고맙다고 전해 줘.”
“나도.”
“저도요. 근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막내는 모르겠구나.”
“두 사람 현장 나갔다가 만났어.”
도승원은 몇 년 전, 원룸에 번진 화재 현장을 나갔었다. 당시 그 건물에 살고 있던 이승희를 구해 주면서 만난 두 사람은 계속 사랑을 키우는 중이었다.
“대박이네요. 무슨 라디오 사연 같아요. 이런 거 보면 역시 인연은 따로 있나 봅니다.”
“승희 씨가 사람이 아주 좋아. 싹싹하고 성격도 밝고 그냥 최고야.”
“팀장님 말이 맞지. 사람은 많아도 저렇게 좋은 사람 흔치 않아.”
여자 친구를 칭찬하는 팀장과 부장의 말에 도승원은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도승원에게 이승희는 자신의 심장이자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20kg이 넘는 장비를 메고 매번 목숨을 걸고 화마 속으로 들어갈 때도 두렵지 않은 건,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여자 친구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방대원이 꿈이었던 도승원은 요즘 두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꿈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였다.
도승원은 그 꿈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선배 꼭 결혼까지 골인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고맙다.”
“승희 씨 부모님 뵌 적은 있어?”
“안 그래도 조만간 승희 부모님과 식사할 거 같아요.”
“뭐야! 결혼 승낙받으러 가는 거야?”
“아니에요.”
결혼이란 말에 도승원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희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서 진짜 인사드리러 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지. 빨리 국수 먹여 줘.”
“네, 노력하겠습니다.”
-여울동 주택가 화재 신고. oo번지 4층 빌라 1층.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출동 사인이 떨어졌다.
방금까지 즐거운 대화를 하던 도승원과 팀원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며 출동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 점심시간이 남았지만, 그들에게는 출동 신호가 더 중요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소방서를 벗어났다.
잠시 후, 현장을 나갔던 소방차는 상당히 빠른 시간 만에 소방서로 다시 복귀했다.
“장난 전화였다며?”
사무실에서 나온 팀장이 차에서 내리는 팀원들에게 물었다.
“네, 어째 요즘에 장난 전화가 없다 싶더니만 또 시작이네요.”
“그래도 진짜로 화재 발생한 게 아니라 다행이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무튼 장난 전화는 제발 그만 좀 왔으면 좋겠다.”
“승원아?”
팀장이 장비 정리하는 도승원에게 다가갔다.
“너 손님이 왔어. 식당에 한 번 가 봐.”
“손님이요? 올 사람이 없는데…….”
가족들은 전부 제주도에서 살고 있었기에 딱히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승희 씨 아버님이시래.”
여자 친구의 아버님이란 소리의 도승원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출동 알림 오면 즉각 출동하면 되니까 일단 가 봐.”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도승원은 재빨리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 * *
“아버님 안녕하세요.”
“승원 씨도 잘 지냈나요?”
수더분한 인상의 안경을 착용한 이용현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도승원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바쁜 사람인데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버님.”
항상 데이트가 끝나면 이승희를 집에 바래다주었기에 이미 이용현과는 안면이 있는 상태였다.
교사 퇴직 후 아내와 함께 편의점을 운영하는 그는 성실하고 예의 바르며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이승희가 존경하는 인물로 망설임 없이 본인의 아버지를 뽑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용현은 외동딸인 이승희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이거 이따 팀원분들과 함께 들어요.”
이현승은 챙겨 온 음료수 상자를 도승원에게 건넸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사실 승원 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네, 아버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승희가 조만간 승원 씨가 집에 인사드리러 오려고 하는데 언제가 괜찮은지 묻더라고요. 혹시 집에 인사 오는 건 안 왔으면 해서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승원 씨, 우리 승희랑 결혼 생각하고 있나요?”
“네, 아버님. 승희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용현은 마주 앉은 도승원을 향해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 결혼 신중하게 한 번 생각해 봐 줬으면 좋겠어요.”
도승원은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며 듬직하고 좋은 사람이다. 이용현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의 직업이었다.
화재 진압을 하는 소방대원인 딸의 남자 친구 직업이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이 얼마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일하는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그 직업의 위험함 또한 알고 있었기에 딸의 결혼을 쉽게 허락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승희가 매일 밤 자기 전 기도를 하고 쉬는 날에도 수시로 승원 씨의 안부를 확인하는 걸 알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랑 와이프의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아요.”
도승원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방대원의 가족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도승원이 가장 잘 알았다.
팀장님의 어머니와 아내분은 지금까지도 새벽에 교회로 나가 남편의 안녕을 기도했다.
부장님의 가족들도 나머지 대원들의 가족들도 모두 상황은 비슷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승원 씨가 미안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꺼낸 내가 미안하죠.”
“아버님, 제가 승희를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진부하고 뻔한 대답 같았지만, 저 말보다 솔직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 직업이 위험하지 않다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승희를 정말 행복하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이용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는 말을 생각한 도승원은 약속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반대로 하면 승원 씨가 없다면 승희는 행복할 수가 없다는 소리와도 같아요.”
“…….”
“만에 하나라도 승원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날부터 승희는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머리가 멍하고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꽉 들어찬 기분이었다.
“미안합니다.”
이용현은 고개를 숙인 도승원에게 짧은 사과를 남기고 식당을 나갔다.
“하!”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묵직한 한숨을 내뱉으며 식당을 나서는 도승원 앞에 팀장이 서 있었다.
“팀장님?”
“표정 보니까 승희 씨 아버님께서 반대하셨네. 맞지?”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나도 다 겪었던 일이니까 알지. 딸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러실 수 있어.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그럼요. 서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 포기할 거야?”
“아니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은 어떻게 승낙받으셨어요?”
“대단한 이유가 있나? 그냥 꾸준히 우직함으로 마음이 풀어지길 나란 사람을 봐주시길 기다렸지.”
“저도 우직하게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래, 우리 승원이만큼 우직한 사람도 없잖아. 기운 내.”
“네, 팀장님.”
팀장에게 기운을 받은 도승원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뭐냐?”
“이거요. 승희 씨 아버님께서 주신 음료수요. 팀장님 하나 드실래요?”
“아니야. 배불러.”
팀장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간 도승원은 작은 화재 현장으로 두 번 정도 출동을 나갔다 왔다.
“한 시간만 지나면 교대입니다.”
막내의 말에 시계를 본 도승원이 이승희에게 카톡을 하려고 한 그때였다.
-딩동
-여울 소방서 출동 준비.
알림 소리와 함께 출동 사인이 떨어졌다.
-출동 준비.
대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전력 질주를 하며 소방차가 있는 곳에 단숨에 도착했다.
-oo 대학교 oo 연구실 화재 발생.
그런데 빠르게 복장을 갖추고 펌프차에 올라타려던 도승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탁-
“뭐해! 빨리 타.”
먼저 차에 탄 팀장이 차창 너머로 재촉했다.
“탑니다.”
“실험실 폭발 사고로 인한 화재면 인명 피해가 클 수도 있을 텐데…….”
걱정하는 팀장의 말과 함께 도승원이 핸드폰을 꺼내 들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출동 신고가 온 oo 대학교 oo 연구실은 여자 친구인 이승희가 연구원으로 일하는 곳이었다.
‘오늘 중요한 실험이 있는데 잘 끝났으면 좋겠다.’
아침에 이승희가 한 말이 뇌리를 스친 도승원은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