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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43화 (142/472)

143화. 불행은 작게 행복은 크게

“초진이시면 여기 성함이랑 생년월일 적으시고 잠시만 앉아 계세요.”

접수를 마친 이용현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병원 벽을 응시한 채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용현 님?”

“네.”

접수처 직원이 부르자 이용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어디 진료 보시려고 오셨어요?”

“……허리요. 허리가 좀 안 좋아서 왔습니다.”

예상 못 한 직원의 질문에 이용현은 대충 둘러댔다.

“예, 알겠습니다. 금방 들어가실 거예요.”

“아. 예.”

“이용현 님?”

곧이어 임정숙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며 이용현을 진료실로 안내했다.

“네.”

“진료실 들어가세요. 선생님, 이용현 환자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태경은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이용현에게 밝은 얼굴로 자리를 안내했다.

“우리 환자분 오늘 허리가 안 좋으셔서 오셨다고요. 허리가 어떻게 안 좋으시죠?”

“저기……. 선생님?”

“네, 환자분.”

“저는 허리가 아파서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어디 다른 곳이 불편하신가요?”

“아니요. 다른 곳도 아픈 곳이 없습니다. 실은…….”

이용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수술받고 우리병원에 입원에 있는 도승원 씨의 보호자인 이승희의 아비입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이용현이 정체를 밝히자 태경은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어디 아파서 오신 건 아니신 거죠?”

근심 섞인 표정을 빼면 이용현의 얼굴은 건강한 혈색을 자랑했다. 다섯 번째 바이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태경은 아픈 곳이 없나 확인했다.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임 선생님?”

“네, 선생님.”

“지금 진료 기다리는 외래 환자분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없습니다.”

태경이 외래 진료에 관해 물은 건 환자가 있다면 환자를 먼저 보려 했기 때문이다.

이용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쨌든 이곳은 병원이기에 항상 환자가 우선이어야 했다.

“환자 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철컥-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하네요.”

“지금 외래가 없어서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도승원 씨 같은 경우에는 다시 걸을 수가 있습니까?”

“의족을 사용하면 걸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재활 운동도 하고 의족과 익숙해지는 훈련도 해야겠지만, 의족이 있다면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죄송하지만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편하게 질문하세요.”

“제가 잠깐 찾아보니까 실제로 이런 비슷한 사고를 당한 환자들이 이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사회생활도 힘들어할 정도로 많이 괴로워한다는 글도 봤습니다. 혹시 도승원 씨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용현은 도승원이 앞으로 괜찮을지가 궁금했다. 그가 힘들어하면 옆에 있는 딸도 힘들어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에게는 꽤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 답변은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각자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죠.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분이 앞으로 이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 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까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그럼 주변 사람들이 힘을 주며 응원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경은 이용현이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건지 알고 있기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시고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별말씀을요.”

“안녕히 계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진료실 문으로 걸어가던 이용현은 다시 태경을 향해 돌아섰다.

“선생님, 그 친구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철컥-

진료실을 나온 이용현은 접수처로 향했다.

“진료비 계산하려고 하는데요?”

“이용현 님 진료비 없습니다.”

“네? 진료비가 없다고요?”

“원장님께서 진료비 없다고 하셔서요. 그냥 가시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혹시 입원 환자 지금 면회 가능한가요?”

“네, 가능하세요.”

“도승원 환자 병실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이용현은 병실을 확인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승원의 이름이 찍힌 1인 병실 앞에 멈춰 노크했다.

똑똑-

“네.”

드르륵-

“……!”

대답을 하며 문을 열고 나온 이승희는 이용현을 보자마자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승희야, 누가 왔어?”

“어, 어. 그게…….”

당황한 딸 대신 이용현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승원 씨?”

“아, 아버님!”

이용현을 본 도승원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몸은 좀…….”

“아빠 나가서 저랑 얘기해요.”

“승희야. 미안한데 음료수 좀 사다 줄 수 있어?”

얼른 정신을 차린 도승원은 눈치 빠르게 이승희에게 음료수를 부탁하며 이용현과 둘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알았어. 갔다 올게.”

두 사람만 두고 병실을 나가기 걱정스러웠던 이승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도승원을 보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인사를 제대로 드려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몸은 좀 어떤가요?”

“수술도 잘 끝났고 괜찮습니다.”

“승원 씨?”

“네, 아버님.”

“예전에 우리 승희 살려 줬다고 들었어요. 그때도 지금도 고마워요.”

“아닙니다. 아버님.”

“오늘 막 수술하고 나온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실례인 줄 알지만 그래도 물어볼게요. 우리 딸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요?”

“네, 승희는 제 목숨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도승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목숨보다 귀하다는 저 말이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걸 이용현도 이제 알 수 있었다.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습니다.”

“그 자신이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

“있습니다. 앞으로 현장직이 아닌 내근직 일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현장에서 근무하면 팀원들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일하면서 공부를 한 뒤 대학원에 진학하려 합니다.”

당연히 형식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을까 싶던 이용현의 예상과 달리 도승원은 준비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죄송하지만, 허락해 주시면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나랑 약속하나 할 수 있겠어요? 앞으로 어떤 일에도 좌절하지 말고 씩씩하게 재활하겠다고요.”

“그 약속은 승희와도 한 약속이고 저 자신도 한 약속이기에 열심히 재활하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재활해서 결혼식장에는 목발 없이 두 발로 걸어서 들어와서 우리 승희 손잡아요.”

“……!”

너무 놀란 나머지 도승원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말이 없는 거 보니 싫은가 보군요. 싫은가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래서 대답은요?”

“물론……. 물론입니다. 아버님께 약속드리겠습니다.”

뜻밖에 들려온 결혼 허락 소식에 도승원은 말까지 더듬으며 약속을 자신했다.

“꼭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래요. 앞으로 계속 지켜볼게요. 몸 잘 추스르고 좋은 모습으로 그때 자세한 이야기 나눠요.”

“곧 찾아뵙겠습니다.”

이용현은 결국 도승원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아직도 마음이 백 퍼센트 전부 열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딸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미래가 뭔지 생각한 결과,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예의 바르고 인성도 좋은 건실한 청년을 직업이나 사고로 딸과 찢어 놓으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난 이만 가 볼게요. 몸조리 잘해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승원은 이용현이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걸 알고 한없이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드르륵-

“아빠…….”

두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던 이승희가 병실을 나오는 이용현과 마주했다.

이승희는 병원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온 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이용현은 눈물을 보이는 이승희를 별다른 말 없이 꼭 한 번 안아 줬다.

“힘들게 결정해 주신 거 알아요. 앞으로 저희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릴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러면 마음 바꿀 거야.”

“그러실 일 없게 잘할게요.”

“네가 선택한 일이고 아빠와 엄마는 널 믿기에 네 선택을 존중한 거야. 그러니 그 선택에 책임지고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네, 아빠. 약속할게요.”

“그래. 이만 들어가 봐. 아빠 가 볼게.”

이승희는 이용현을 배웅한 뒤 병실로 돌아와 도승원과 함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빠?”

“아버님 가셨어?”

“응. 방금 가셨어. 난 사실 아빠가 허락하실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거든. 그래서 그런지 지금 가슴이 막 벅찬 거 있지?”

“난 지금 이게 꿈은 아닌가 싶다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줬던 책이 생각나네.”

“책?”

“우리 아버지 독서광이잖아. 제주도에서 서울 오기 전에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는데, 첫 장에 이렇게 직접 쓰셨더라고. 그 문장이 마치 지금 우리 상황을 말하는 거 같아서.”

“뭐라고 쓰셨는데?”

“가장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스스로 큰 고민 속에 빠진다. 라 로슈푸코라는 작가가 한 말인데 너무 인상 깊어서 좌우명처럼 외우고 다녔거든.”

“그 말 되게 좋다. 우리는 그럼 현명한 사람이네.”

“당연하지. 우리 아버지 지론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반드시 찾아온다.’라는 말이거든. 승희야. 우리도 불행은 작게 행복은 크게 생각하며 현명하게 살자.”

“응. 양가 부모님이 보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만큼 그렇게 살자.”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슬기롭게 이겨 낸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 * *

다음 날 아침.

태경은 호출이 있던 3층 병실 환자를 보고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1층에서 올라오는 김예븐 수녀가 손에 책을 든 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수녀님.”

의료 봉사에서 만났던 김예븐 수녀는 소장에서 기생충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입원 중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어디 갔다 오세요?”

“병원 앞마당이 아담하니 예쁘고 조용해서 거기서 혼자 아침 미사 드리고 왔어요.”

“수녀님 부지런하시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부지런한 걸로 따지면 제가 지금 선생님 앞에서 주름잡는 건데요?”

“예?”

“밤낮없이 환자 돌보시는 분 앞에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아! 그렇군요. 참, 수녀님 먹는 양은 좀 줄었죠?”

“네. 그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제가 좀 많이 먹었잖아요. 그런데 수술하고 나서부터는 예전처럼은 이제 못 먹어요. 배 아픈 것도 당연히 없어졌고요.”

“뭐든지 적당한 게 좋죠. 오늘 오후에 퇴원이시죠?”

“선생님께 신세만 지고 가네요.”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따 뵐게요.”

“네, 수고하세요.”

김예븐 수녀와 대화하고 1층으로 내려온 태경은 응급실로 향하고 있었다.

Rrrrrrrrrr

가운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자연스럽게 꺼내 확인하던 순간, 태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응급실로 향하던 발길은 진료실로 유턴했고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인은 고계득. 신화대학병원 원장이었다.

철컥-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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