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찬희의 오프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인은 고계득. 신화대학병원 원장이었다.
철컥-
“여보세요.”
태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김 선생. 고 원장이에요.
어찌 된 영문인지 고계득의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친절함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 태경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사람을 평가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인간 고계득에게 이런 모습은 상당히 낯설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갑자기 전화를 왜 한 거지?’
특히나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있지도 않았기에 고계득의 갑작스러운 전화가 태경은 상당히 의아스러웠다.
“네, 알고 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죠. 우리 김 선생도 잘 지내고 있나요?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저한테 왜 전화하셨는지…….”
-다른 게 아니라 김 선생 요번에 하는 학회에 참석하죠?
“참석합니다.”
고계득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태경의 학회 일정에 관해 물었다.
-학회 장소가 셜튼 호텔 맞죠?
“네, 맞습니다.”
-실은 나도 같은 날 병원장들 모임이 그 호텔에서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날 김 선생을 좀 만났으면 해서 이렇게 연락했어요.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신가요?”
-김 선생 센스가 참 좋아요. 내가 할 말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하하!
“그러면 지금 하셔도 됩니다.”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어색한 웃음소리에도 태경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게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래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라서 말이죠.
태경은 혹시라도 일전에 거절했던 교수직 제안 때문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계득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이미 거절로 인해 충분히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를 느꼈을 텐데 굳이 다시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게 분명했다. 설사 그 이야기가 또 나오더라도 태경의 대답과 선택은 변함없었다.
-김 선생,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 그날 잠깐만 좀 보자고요.
고계득은 답변을 기다리는 그 찰나를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강조했다. 말투는 여유가 넘치는 듯했지만, 그의 속은 그러지 못한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날 뵙죠.”
-그래요. 김 선생 수고해요.
전화를 끊은 태경은 고계득이 전화한 이유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응급실로 향했다.
* * *
의국실-
태경과 교대 후 이찬희와 최모나는 의국실에서 쉬던 중이었다.
“준비됐어?”
그런데 쉬고 있던 두 사람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됐어.”
숙제를 하거나 논물을 보거나 혹은 게임 영상을 보거나 젤리로 당을 보충하던 익숙한 그림이 아니었다.
“어이, 최모나. 나 봐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표정에서는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누가 할 소리.”
“하나, 둘 셋.”
휴대폰 타임워치가 시작되자 실을 잡은 두 사람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핏 멀리서 스치듯 본다면 실뜨기를 하는 건가 싶지만, 수술용 실로 타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요즘 틈만 나면 타이를 갖고 소소한 내기를 했다.
얼마 전 태경으로부터 타이 연습을 하라는 소리를 들은 이찬희와 최모나는 그때부터 상당히 열심히 연습했다. 전에도 본인들이 알아서 연습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외과 의사에게 타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고, 타이의 중요성은 수백 번 넘게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평생 외과의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타이는 연습할수록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걸 알기에 두 사람은 군말 없이 태경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타이에 열중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끝!”
타임워치가 끝나기 전 최모나는 간발의 차로 이찬희보다 먼저 타이로 매듭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그럼 한 번씩 이겼으니까 동률이네.”
“한 번 더 할까?”
“뭐, 마음대로. 근데 퇴근 안 해?”
“오호! 최모나 쫄았나 봐?”
“시끄럽고 얼른 해.”
철컥-
“이찬희 너 퇴근 안 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승부를 내려던 그때 아주 나이스한 타이밍으로 태경이 들어왔다.
“뭐야! 두 사람 타이 연습 중이었나 보네?”
“예?”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가 봐도 타이 연습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격하게 부정했다.
“잘됐네. 요즘 내가 시킨 거 연습하고 있지? 그거 한번 해 봐. 잘하고 있는지 좀 보자.”
이찬희와 최모나가 타이 연습에 열중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태경이 가끔가다 이렇게 무작위로 타이를 시켰는데, 문제는 진 사람은 다음 날까지 100개의 실로 타이를 연습해 가져와야 했다.
물론 강제적이긴 해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퇴근하고 격하게 쉬고 싶은 마음을 뚫고 타이 연습을 하는 게 솔직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걸 어쩌죠? 제가 정말 요즘 연습한 타이를 보여 드리고 싶은데…….”
“퇴근 시간이 지나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앉아.”
이찬희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간파한 태경이 이어 말하자 이찬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누가 퇴근 시간에 남아서 타이 연습하래? 시간 맞춰 퇴근했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좋아! 이찬희 당첨.”
“아, 선생님 진짜 너무하십니다.”
“불만이 많은가 봐? 최모나? 너도 불만이야?”
“아닙니다. 전혀 불만이 없습니다.”
“야! 최 쌤?”
이찬희의 격한 외침에도 태경은 역시나 두 사람의 타이 실력을 평가하려 했다.
“얼른 실 잡아. 준비. 시작!”
얼마 안 가 두 사람이 빠른 스피드로 매듭을 완성하자 태경이 유심히 살폈다.
“최 쌤. 어떻게 이번 판 이긴 사람이 내기 이기는 거까지 할래?”
“나야 콜이지.”
“선생님께서 말씀이 없으신 거 보니 이번에도 무승부인가 보네.”
“최모나 승.”
이찬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경은 최모나의 매듭을 선택했다.
“예? 왜요?”
“여기 중간 부분 보여? 매듭이 일정하지 못하고 풀어지고 있잖아.”
말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실 중간 부분이 풀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수술 부위가 제대로 붙지도 않고 벌어지는 대참사가 생기겠지? 게다가 출혈이 생길 수도 있어. 내 말 맞지?”
“예…….”
“실 하나 줘 봐.”
순식간에 타이를 완성한 태경은 두 사람의 타이 옆에 내려놓았다.
“내가 한 거랑 한 번 비교해서 봐 봐.”
“차이가 확 납니다.”
정말이었다. 세 개의 타이를 나란히 놓고 보니 절로 비교가 될 정도였다.
“최모나도 더 신경 써야 하지만 그래도 이찬희 것보단 조금 낫네.”
“보완하겠습니다.”
“그럼 우리 이 선생은 잘 쉬고 출근할 때 연습한 거 100개 가져와.”
“존경하는 선생님. 송구하지만, 혹시 50개로 감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오프라서요.”
“근데?”
“그게 정말 모처럼 친구 놈을 만나 소주 한잔할지도 몰라서……. 그리고 이거 말고 저 숙제도 있는데……. 하! 제대로 해 오겠습니다.”
결국 이찬희는 오늘도 역시나 본전도 못 찾을 소리를 멈추며 결과에 승복했다.
“이 쌤 오프 잘 보내.”
“그래, 틈틈이 타이 연습하고.”
“네, 아주 열심히 해 오겠습니다.”
“그렇지. 외과의로서 아주 건설적인 자세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찬희는 병원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 * *
집에 도착 후 밀린 잠을 원 없이 자고 일어난 이찬희는 숙제를 한 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쉬는 날 외출이 얼마 만이냐? 바깥 공기가 이렇게 상쾌한 거였구나.”
이찬희가 이렇게 신난 이유는 한동안 못 봤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안부 통화를 하다 별안간 성사된 만남이었다.
-찬희 너, 다음 주 오프라고 했지?
‘맞아.’
-야, 그러지 말고 그날 우리 볼래?
‘뭔 소리야. 동균이 너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일하지.
‘너 근데 인턴 아니냐? 인턴이 이렇게 한가로이 전화할 시간이 있어? 빠졌네.’
-찬희야 나 이제 인턴 아니다.
‘뭐? 너 혹시 그만뒀냐?’
-응. 때려쳤다.
‘미친 새끼. 왜?’
-그냥. 그러니까 내 일터로 놀러 오라고. 나 일하는 데 oo이야. 멀지도 않아.
‘oo이면 집 근처랑은 완전 반대쪽인데? 나 차도 없어.’
-에헤. 지하철 있잖아. 우리나라 지하철이 여기저기 다 뚫려 있는데 뭔 소리 하고 있어. 애들 모일 때도 너랑 나만 못 봤잖아.
‘아, 새끼. 나 할 것도 많은데…….’
-오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친구야. 내가 사 먹으면 된다.’
-좋아. 그럼 나중에 소개팅해 줄게.
‘콜. 바로 갈게. 주소 찍어라.’
그렇게 친구와 통화하던 이찬희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요청에 모처럼 외출을 하게 됐다.
정확히는 소개팅을 시켜 준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친구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40분 넘게 지하철을 탄 뒤 역에서 택시를 타고 친구가 일하는 곳에 도착했다.
“찬희야? 이게 얼마 만이냐?”
구동균은 택시에서 내리는 이찬희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이다. 인턴 그만뒀다더니만 얼굴이 폈다 폈어.”
“솔직히 그건 인정. 나 인턴일 때 얼굴 진짜 썩었었거든.”
제약회사에 다니던 구동균은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과 함께 다니던 회사를 미련 없이 때려치웠다.
1년 동안 준비한 그는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한 뒤 의사 면허를 땄다. 하지만 늦깎이 인턴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욕이었고 결국 그만두고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야, 병원 좋다. 신축인가 봐.”
“요양병원이 다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인턴은 왜 그만둔 거냐?”
“그냥 존심 상하기도 하고 고작 인턴 수료인데 존x 힘들어서 못 해 먹겠더라고.”
“그 고작 인턴 수료가 원래 그렇게 빡센 거야. 사람 생명 다루는 직업인데 안 빡세면 되겠냐?”
“아, 몰라.”
“역시 인턴은 대가리가 커서 하면 힘들다니까.”
“그러게. 너처럼 바로 의대 갔으면 어리니까 뭣도 모르고 견디면서 했을 텐데 머리가 크고 나서 하려니까 매 순간이 자존심 상하고 속도 상하고 그렇더라고.”
“그럴 수 있지. 인턴 생활이 워낙 힘들잖아. 오죽하면 도망가는 애들도 더러 있고. 그래서 앞으로는 어떡하게.”
“그냥 지금처럼 일하다 돈 좀 모으면 미용 배워서 그쪽으로 해야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이탈과(생명과 직결되는 과들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을 지칭함) 한다고 난리 치더니 그새 바뀌었네.”
“어쩌겠어. 이미 대가리는 컸고 돈은 벌어야겠으니 내 살길 찾은 거지 뭐.”
“말은 참 잘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올라가자.”
이찬희는 구동균과 함께 병원 내부로 들어갔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근무자가 구동균을 보며 인사하자 이찬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
“응. 여기서는 그렇게 불러 줘. 그냥 존중해 주는 차원에서 직함 주는 거지 뭐.”
“진짜 개뿔 무슨 인턴 도망간 놈이 얼어 죽을 과장이야.”
“내 말이. 들을 때마다 나도 놀란다.”
두 사람은 당직실로 향해 오래간만에 밀린 대화를 나눴다.
“일은 좀 어때 할 만해?”
“솔직히 아직까지는 괜찮아. 원장님이랑 다른 선생님들 퇴근하면 나는 그때 출근해서 당직만 하니까 딱히 힘든 일은 없지 뭐. 밤낮 바뀐 게 힘들었는데 그거야 뭐 페이가 좋으니까 저절로 적응되더라.”
“이 자식. 너 돈 날로 버는구나?”
“그건 또 아니지. 밤사이 환자들 콜 오면 바로 가서 확인하고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나름 할 거 많다.”
“알아. 농담이야.”
“뭐 좀 먹을래? 나 너랑 먹으려고 저녁 소식했다.”
“간단하게 맥주 할까?”
“미친놈아. 여기 병원이잖아.”
“이것도 농담. 병원 내 술 금지는 내가 더 잘 아네요. 그리고 나 막차 타고 간다.”
“아, 왜? 첫차 타고 가지.”
“왜긴. 인마 나도 일하러 가야지. 내일 오후에 출근이야.”
“맞다. 넌 좀 어때? 힘들지 않아?”
“힘이야 들지. 근데 재미있어. 우리 선생님 술기만 봐도 속에서 막 아드레날린이 분출하거든.”
“지랄하네. 무슨 또 아드레날린씩이나…….”
“우리 병원 원장님이 자그마치 보드가 세 개. 트리플보드다.”
“켁! 미친 그게 가능하냐?”
커피를 마시던 구동균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사레까지 들렸다.
“아니 나이가 많으셔? 나이가 많아도 대단한 건데.”
“아니. 생각보다 젊어. 우리 선생님이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거든.”
“누구는 인턴 도망이나 쳤는데 누구는 때려죽여도 두 번은 안 하다는 보드를 세 번이나 땄네. 진짜 대단하다.”
“대단하지. 그래서 많이 배우고 있어. 내가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그 선생님은 막 수술할 때도 뭔가…….”
Rrrrrrrrrr
그렇게 한참 재미있는 대화를 이어 가던 그때 책상 위에 있던 구동균의 핸드폰이 두 사람을 방해하듯 격하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