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50화 (149/472)

150화. 방법이 잘못됐어.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이요?”

“그래. 환자에 대한 진료와 수술 수가의 압박도 없고 원하는 연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전폭적인 지원에 정년 보장까지 확실하지.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의 엄청난 연봉까지 제시한다면 말일세. 그래도 거절하겠나?”

마치 ‘이래도 거절할 건가?’라는 뉘앙스로 질문한 김건형은 태경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태경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개인병원이 아닌 대형병원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건, 현재 대한민국 의료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주겠다니.

이 바닥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은 확실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을 거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경은 아니었다.

“네, 그래도 거절하겠습니다.”

태경의 대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분명 틀림없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정말 힘들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손을 내밀어 준 김철기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병원에 대한 애착도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뭐야! 정말 거절이야?”

“네.”

“이 조건을 거절한다고? 김 원장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웃어? 지금 농담이 나와?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지도 몰라.”

속없이 웃고 있는 태경에게 김건형은 눈을 가늘게 뜨며 타박했다. 설마 했지만, 이 정도까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마저도 거절할 줄은 몰랐다.

“아니, 도대체 왜 거절한 거야? 이유나 좀 말해 봐.”

“딱히 이유는 없는데요?”

“뭐라고? 참나! 하여간 보면 자네도 진짜 특이해.”

김건형은 답답한 듯 맛이 없다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나저나 김 원장은 어떡하다가 지금 병원에서 일하게 된 거야?”

“그게 개인적으로 좀 일이 있어서 그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우리병원 원장님께서 절 도와주셨어요. 그 인연으로 일까지 하게 됐고 저한테는 은인이고 감사한 분이세요.”

“그 원장님이 사람 보는 안목이 보통이 아니네.”

“절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근데 말이야. 그 원장은 그럼 자네한테 우리병원을 완전히 맡긴 건가?”

“네, 병원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전적으로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자네를 엄청나게 신뢰하는 모양이군. 그럼 김 원장 자네는 지금 병원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네?”

“아까 자네가 그랬잖아. 지금 병원을 키우고 싶다고. 그래서 병원을 키우기 위해서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냐는 말이야.”

“…….”

태경은 잠시 침묵했다.

병원을 위한 밑그림?

병원 운영에 관한 일이라면 하루에도 숱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병원을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건형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미래가 명확하지 않았다.

김철기는 항상 내 병원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뜻을 펼치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태경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김건형의 질문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병원이라기보다는 김철기의 병원을 대신 운영한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깔려 있던 것 같았다.

마치 투명한 유리병을 손에 쥐고 꽃을 담을 생각보다는 흠집 나거나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닦고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김철기가 맡긴 병원에 누가 되지 않도록 별 탈 없이 지금처럼 잘 유지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태경은 어쩌면 스스로 갇혀 있던 건 아닌지 생각했다.

“대답을 쉽게 못 하는 거 보니 자네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보군. 김 원장?”

“네, 회장님.”

“자네 원장은 아마도 자네를 그냥 그 병원에 원장으로서만 앉힌 건 아닐 거야. 과연 자네같이 능력 있고 유능한 의사를 오래된 병원에서 단순히 월급 받는 의사로서 데려온 걸까?”

“글쎄요. 솔직히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내가 아마 그 원장이라면 일단 자네가 병원을 잘 운영하는지 지켜봤을 거야. 아마 지금까지 가타부타 병원 일에 대해 말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자네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자네가 병원을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거 같군.”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그러니까.”

“예?”

“내가 의사 김태경을 데려왔다면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말해 봤어. 그 병원이 진짜 내 병원이라면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네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

“네. 알겠습니다.”

이날 김건형과 했던 대화는 태경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 주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병원에 관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눈 뒤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병원 오래 비우면 좀이 쑤시는 사람인데 내가 너무 붙잡았어.”

“아닙니다. 회장님 덕분에 비싼 커피도 마시고 감사합니다.”

“나중에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고.”

“네,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렇게 태경은 우연히 마주친 김건형과 알찬 대화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똑똑-

“들어와.”

태경이 나간 뒤 김건형의 그림자와도 같은 경호실 고 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보면 몰라?”

“기분이 언짢으신 거 보니 김 원장이 안 넘어왔군요.”

“어림도 없어. 온갖 좋은 조건 다 붙여서 떠봤는데 안 넘어와.”

“그거 보세요. 제가 절대 안 될 거라고 했죠?”

“자네는 기분이 좋은가 봐?”

김건형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고 팀장이 못마땅했다.

“회장님이 거절당한 게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거절당하긴 누가? 내가 만약이라고 했지 내가 직접적으로 제안한 건 아니니까 엄밀히 말하면 거절은 아니야.”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럴 때 정신 승리를 했다고 합니다. 하하하! 김태경 그 친구가 그렇게 탐이 나십니까?”

“아까워.”

“뭐가요?”

“내가 우리병원 원장보다 김태경을 먼저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회장님답지 않게 지난 일을 다 후회하십니다.”

“웃긴 게 뭔 줄 아나?”

“뭔데요?”

“김태경이 거절하니까 더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거 있지.”

아까 김건형이 태경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진 않았지만, 전부 진심이었다. 평소에도 의사로서 태경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김건형은 다른 병원 소속인 태경을 늘 아까워했었다.

언젠가 한 번 자리를 만들어서 태경을 슬쩍 떠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오늘 우연히 만남 김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생각을 잘못한 듯싶어.”

고 팀장과 티격태격 유쾌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김건형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걷어 냈다. 그러더니 상당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방법이 잘못됐어.”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태경은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나한테 쉽게 올 위인도 아니고.”

“그건 맞습니다.”

“제안할 상대가 틀렸어.”

“그럼 누구한테……. 설마!”

김건형과 오랫동안 함께한 고 팀장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우리병원 원장. 그 사람한테 제안하면 돼.”

“김 선생을 두고요?”

“아니. 우리병원 주축이 김태경이고 직원들도 믿고 따르는데 그 상황에서 김태경이를 달라고 하면 그 원장이란 사람은 꿈쩍도 안 할 거야.”

“그럼요?”

“병원을 두고 제안해야지. 우리병원을 인수하면 되잖아.”

“예? 김태경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물론이지.”

고 팀장은 지금까지 김건형이 사람 하나를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병원 그 자리가 아주 황금 자리야. 그 원장이란 사람이 그걸 알고 거기에 병원을 차린 건지 모르겠지만, 자금만 충족된다면 어떤 방향으로 병원을 키우든 잘될 거야.”

“결국 회장님은 김 선생과 병원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으신 거군요?”

“그건 아니야.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무조건 김태경이지. 그 친구를 볼 때마다 우리 형님 젊을 때를 보는 거 같거든. 그래서 내가 더 그 친구를 가까이 두고 싶은 것도 있나 봐.”

“그럼 형님분을 먼저 찾아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됐어. 하지 마.”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고 팀장은 김건형이 은연중에 형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내가 이미 한 번 찾아봤어.”

“회장님께서요?”

“그래.”

그동안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김건형은 오래전에 친형을 찾긴 했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 당시 한동안 마음이 씁쓸했던 김건형은 그 뒤로 더 이상 친형을 찾지 않았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우리병원 원장에 대해 알아볼까요?”

“그래,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조용하게 한 번 알아봐. 애들 알면 괜히 시끄러워.”

“알겠습니다.”

의사 김태경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고 진심인 김건형은 갑자기 판을 키우며 우리병원 원장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 * *

신화대학병원.

그 시각 태경에게 말발로 보기 좋게 당한 고계득은 부들부들 떨면서 급히 병원으로 들어왔다.

어떤 놈이 입방아를 놀렸는지 이철후가 태경이 수술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일단 수습해야 했다.

‘분명 그 두 놈들이겠지.’

아마도 아까 한식당 룸에서 함께 자리했던 두 원장 놈 중 한 명일 것이다.

하루 이틀 있다가 분위기를 봐서 이철후에게 다른 의사로 회유하려 했던 고계득의 계획은 소용없게 돼 버렸다.

“오셨습니까. 원장님?”

VVIP 병동에 들어서자 비서가 고계득을 향해 급히 다가왔다.

“지금 이 대표 병실에 있어?”

“네, 사모님도 함께 계세요. 근데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알고 있어. 수술 때문에 그런 거잖아.”

“아니요. 원장님 수술 건이 아니고 다른 문제인데요.”

이 대표가 있는 병실로 향하던 방정맞은 걸음걸이가 별안간 멈췄다.

“다른 문제라니……. 무슨 문제?”

“그게…….”

고계득의 지랄 맞은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비서는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아! 빨리 말해.”

“이 대표님께서 퇴원 수속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뭐! 퇴원 수속? 아니, 왜 갑자기 퇴원 수속을……. 됐어. 내가 만나 볼게.”

드르륵-

“대표님? 따님은 좀 괜찮은가요?”

“어, 고 원장. 우리 딸은 괜찮아. 어제 명치 통증 내려간 뒤로는 아픈 곳도 없고 말한 대로 당분간 음식 조심하려고.”

“대표님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 김태경 원장을 만나고 오는 길인데 아무래도 수술을 맡기에는 힘들다고 하더군요.”

“안 그래도 그 소식 들었어. 그쪽에서 거절한 걸 어쩌겠어. 별수 없지. 고 원장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대표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고 원장 우리 퇴원 수속 좀 해 줘.”

“예? 아니, 대표님 퇴원이라니요.”

생각보다 싫은 내색 없이 이 대표가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고계득은 진짜 퇴원이란 단어가 나오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신경 써 준 건 고마운데 병원을 옮기기로 했어.”

“대표님 우리 병원에 얼마나 좋은 선생님들이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수술 정말 간단한 거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

“이거 보세요. 고계득 원장님?”

고계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철후의 아내가 심기가 불편한 듯 말허리를 잘났다.

“말씀을 참 기분 나쁘게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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