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51화 (150/472)

151화. 다른 환자가 또 있나요?

“이거 보세요. 고계득 원장님?”

고계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철후의 아내가 심기가 불편한 듯 말허리를 잘났다.

“말씀을 참 기분 나쁘게 하시네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

이철후 부인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고계득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또 그러시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방금 그러셨죠? 그 수술 정말 간단한 거라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요.”

이철후의 부인은 환자를 대하는 고계득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아. 아니, 사모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네요. 제 말뜻은…….”

“아니요. 오해 아니에요. 처음이라면 실수고 오해였겠지만, 원장님 벌써 두 번째잖아요. 그리고 담낭염 수술이 간단하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나온 거죠? 설령 의사들 기준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환자와 보호자가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철후의 부인은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 고계득이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외국에서 그 수술 받다가 의료 사고로 재수술한 사례도 있었던 거 아셨나요? 모든 수술이 어느 정도 위험성이 따르는 걸로 알고 있는데 큰 병원 원장이라는 분이 불안해할 환자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여보. 이 사람아 그만해.”

“어차피 할 말 다 해서 그만하려고 했어요. 전 해리랑 먼저 나가서 퇴원 수속하고 있을게요.”

“그래, 먼저 나가 있어.”

이철후의 아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고계득을 쳐다보지도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제 말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사모님께서 마음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나야 고 원장 자네 마음을 잘 알지. 나도 그렇지만 우리 집사람이 원래 애들 일이라면 끔찍해. 뭐, 이번 일은 아쉽지만 다른 곳에서 수술해야겠어.”

“대표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병원 외과 선생님들이 그 수술에서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이미 집사람이 마음을 굳혀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대표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저한테 믿고 맡겨 주시면 우리병원 최고의 써전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이 대표를 잡고 싶은 고계득은 서서히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고 원장, 그만하자고. 다음에 건강 검진이나 받으러 오겠네.”

“대표님, 저 고계득입니다. 절 못 믿으십니까?”

“이봐! 고 원장?”

고계득이 자꾸만 옆에서 알짱거리며 질척거리자 문을 향하던 이철후가 귀찮은 듯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내가 자네 쪽팔릴까 봐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고 원장은 내가 우스웠나 봐? 거짓말까지 한 걸 보니까.”

“거, 거짓말이요?”

“그래. 김태경 그 친구 신화대병원 소속도 아니라면서. 게다가 병원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도 있던데 말이야. 그게 사실이야?”

“아니, 그건……. 사실 김태경 그 친구가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철후가 저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수습이 먼저였다.

“인성! 그게 뭔 상관이야. 솔직히 의사는 환자만 잘 고치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나도 인성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네도 인성은 안 좋잖아. 안 그래?”

“아, 아니. 대표님…….”

고계득은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사람이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기에 자신보다 힘 있는 이철후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김태경 하나 설득 못 한 건 좀 실망스럽네. 그럼 나중에 보자고.”

“대표님?”

“아! 맞다. 고 원장?”

병실 문 바로 앞까지 갔던 이철후가 다시 뒤를 돌아 고계득을 불렀다.

“네, 대표님.”

“자네 사외이사는 올해까지만 하는 걸로 하지.”

“네?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잘하고 있던 사외이사를 그만두라니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고계득은 어이가 없었다. 김태경 일로 분풀이를 하는 게 분명했다.

“고 원장,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VVIP 대접을 이렇게 해 놓고 갑자기라니. 그리고 그동안 먹을 만큼 많이 먹었잖아. 그러니까 아쉽게 생각하지 마.”

“……!”

드르륵-

태경에 이어 이철후에게까지 망신당한 고계득은 살면서 이렇게까지 수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김태경! 김태경! 그놈의 김태경! 하, 시x!”

분을 못 이긴 그는 결국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전부터 태경에게 품고 있던 악감정이 터진 것이다.

“눈엣가시 같은 새끼! 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감히 날 건드려?”

모든 탓을 태경에게 돌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고계득 눈에는 광기가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두고 봐. 주제도 모르는 놈이 설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병실 창문에 서서 뭔가를 생각하던 고계득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병실을 나갔다.

“저기, 원장님?”

VVIP 병실을 나와 어딘가로 향하던 고계득을 기획실장이 부르며 달려왔다.

“이철후 대표 딸이 다른 곳에서 수술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여간 이 병원만큼 소문이 빠른 곳도 없다니까. 이철후 딸이 우리 병원에서 수술 안 받는다고 난리 나는 것도 아니까 그 얘기라면 그만합시다. 근데 무슨 일로 불렀나요?”

“그 왜? 어제 회의에서 나온 안건에서 말씀하신 환자들의 안전 사항 있잖습니까?”

“아……. 그거! 그냥 넘겨요. 교수들 기분 좋으라고 말한 겁니다. 미쳤습니까? 돈이 먼저지 무슨 환자를 생각해요.”

“그렇죠? 전 원장님이 하신 말씀이 진심인 줄 알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기획실장씩이나 된 양반이 왜 그래? 병원도 결국 철저한 비즈니스입니다. 돈을 버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제가 요즘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다 보니 아직도 이렇게 부족합니다.”

기획실장은 고계득 라인으로 그 역시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사람 고치는 자질구레한 일은 보통 의사들 시키고 우리같이 높은 사람은 이 커다란 병원을 고쳐야지, 안 그런가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원장님 어디 가십니까? 이 길로 가시면 TICU(trauma intensive care unit, 외상 중환자실)인데요?”

“네. 거기 가는 길이지요.”

“거긴 어쩐 일로 가시는데요?”

“뭐, 겸사겸사 환자들 보러 가는 겁니다.”

고계득이 TICU에 다다르자 뒤따라오던 기획실장이 출입 카드로 문을 열었다.

“바쁘실 텐데 실장님은 이만 가 보시죠?”

“아, 예. 알겠습니다.”

기획실장을 보낸 고계득은 뒷짐을 진 채 첫 번째 문을 지나 두 번째로 열린 자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200평 규모의 탁 트인 공간에 자리한 중환자실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성인 가슴높이 정도 되는 담들이 큰 중환자실의 구획을 나눴다. 그리고 그 담을 경계로 양쪽에 중환자들의 베드가 줄지어 있었다.

각 담의 한쪽 면에는 8개 정도의 베드가 있으며 베드와 베드 사이 간격은 3m 정도였다.

그 3m 정도 되는 공간에 모니터만 다섯 개가 있고,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기둥에 모니터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걸려 있었다.

그중 두 개의 모니터에는 키보드와 마우스가 연결되어 각각의 환자마다 차팅이나 오더를 빠르게 내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나머지 세 개에는 바이탈 사인(vital sign, 혈압이나 맥박 수 등의 활력징후)이나 기계호흡을 설정해 놓은 것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삐- 삐-

심장 박동 수에 따라 혹은 호흡 주기에 따라 일정하면서고 잔잔하게 시끄러운 기계음들이 사방 곳곳에서 울린다.

“으! 으!”

“하아…….”

“아악!”

물론 그 사이사이에 환자들의 신음 소리와 섬망에 걸린 환자들의 괴상한 소리가 어우러져 있다. 간호사들은 그런 환자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바삐 움직였다.

한 환자당 일반병동 환자 다섯 명 이상의 오더가 있는 곳이 바로 중환자실이다. 그만큼 할 일이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곳이었다.

“그거 양 조절 확실히 지켜야 해.”

“네, 파트장님.”

다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중환자실을 담당하는 파트장이 눈에 띄었다.

파트장의 눈빛은 흡사 전투적이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고 간호사 세계에서 군림하는 한 명으로 그 카리스마와 업무 능력은 이미 경지에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윗사람을 대하는 자세 또한 갖추어져 있었다.

“어머, 원장님?”

파트장은 15m가 넘는 거리에서 고계득을 발견하고는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원장님께서 중환자실에는 어쩐 일이세요?”

“우리 김 파트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작년 술자리 때 뵙고는 처음인 것 같네요.”

“그랬나? 아, 맞다. 그때 이사장님하고 다 같이 봤었지?”

“네. 원장님. 그리고 늦었지만, 연임도 축하드려요.”

“참 빨리도 말하네요. 아무튼 고마워요.”

“여긴 볼일 있으셔서 오신 건가요?”

“뭐, 꼭 일이 있어야 오나요. 중환자실이 워낙 중요하지 않습니까. 다들 고생하시는 데 자극 좀 받고 그러려고 왔습니다.”

“역시 원장님은 다르시네요.”

바쁜 간호사들 사이로 시답지 않은 농담과 영혼 없는 아부들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렸다.

“그나저나 이 환자는 뭔가요?”

“아, 그 환자요? 잠시만요. 여기 어사인 있나요?”

파트장이 고계득이 말한 환자의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네. 안녕하십니까.”

“네, 반가워요. 이 환자는 좀 어떤가요?”

“네, 38세 남자로 낙상 환자입니다. 내원 시 바이탈 사인 100에 65여서 응급실 내원 당시…….”

“아니. 그렇게 상세한 거는 됐어요. 파트장님 여기서 혹시 그 어려운 환자들이 좀 있나요?”

“어려운 분들이라 하시면……. 아! 네, 있습니다.”

“저기 A섹션 8번 베드 환자는 15세 남아고요. 놀이공원 기계에 몸이 끼어서 응급실로 온 환자입니다. 보호자들이 오면 아이 걱정이 아니라 돈 걱정부터 하곤 합니다.”

“쯧쯧! 저런, 부모들이 너무하는군요.”

“다른 환자가 또 있나요?”

고계득은 마치 쇼핑하는 사람처럼 환자들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C섹션의 20번 베드 환자는 55세 여자로 공장에서 일하다가 절단 사고를 당했고 현재 연고자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고계득은 뭔가 성에 차지 않은 듯 환자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지나다녔다.

그러다 문득 한 남자 환자 곁에서 눈물을 훔치며 그의 이마를 닦아 주는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보호자분과 함께 있는 저 환자는 뭡니까?”

“아! 저 환자요. 에효! 여기 계신 분들이 다 딱하지만, 저 환자는 정말 안됐어요.”

‘저 환자다.’

고계득은 벌써 촉이 왔다. 인기 영화의 예고편처럼 파트장의 말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43세 남자 환자로 TA(교통사고)입니다. 정확히는 뺑소니 사고를 당했는데 아직 범인은 못 잡은 상태라고 해요.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의식이 잘 돌아오지 않아서 신경외과에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뺑소니라니……. 그거 정말 안됐군요.”

“네. 그리고 환자분의 사고로 가세가 기울어서 힘든 걸로 알고 있어요.”

“저런. 저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차대한이요.”

“저 보호자분은 아내인가요?”

“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오고 계세요.”

파트장의 말을 듣고 있는 고계득의 입술 끝자락이 교묘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찾았다! 저 환자가 딱이겠어.’

“환자분들이 하루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파트장님 수고했어요. 이만 가 볼게요.”

“네, 원장님.”

중환자실을 나온 고계득은 곧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원장님.

“난데. TICU(외상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차대한 환자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고계득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조용히 혼잣말을 속삭이며 웃었다.

‘김태경. 내가 큰 선물 하나 보내 줄 테니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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