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58화 (157/472)

158화. 대한민국 법

“어……!”

진지했던 이찬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더해졌다. 갑자기 박주당이 돌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아니,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베드에 누워 있던 박주당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 검사 안 해!”

“할아버지 일단 앉으세요.”

안 그래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검사 이야기를 꺼내면 박주당은 습관처럼 ‘안 해’를 외치는 인물이었다.

대부분 환자들은 의사들이 하는 말에 잘 따라 주었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환자들도 있었다.

특히 박주당처럼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지낸 고령 환자들은 의사의 말도 가볍게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검사하셔야 한다니까요.”

“뭔 검사?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지 마!”

역시나 이찬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의사의 말을 저렇게 안 들을까 싶겠지만, 실제로 저런 환자들이 꽤 있다.

“할아버지, 이러다 안에서 피 나면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뭔 놈에 피가 나! 시방 나 봐. 이렇게 멀쩡하잖아.”

“하!”

눈으로 보이는 외상이 없으니 설득하는 게 더 힘들었다.

“유난 떨 거 없어. 배만 조금 아픈 거야. 얼른 약이나 줘.”

“할아버지!”

챠륵-

그렇게 이찬희와 할아버지 사이에 실랑이가 점점 더 격해지던 사이 별안간 커튼이 확 열렸다.

“이 선생, 괜찮아?”

“선생님, 제가 오시라고 했어요.”

점점 높아지는 두 사람 목소리에 간호사가 싸움이 날 것 같아 장득칠을 불러온 것이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일단 여기 잠시만 계세요. 선생님, 할아버지 좀 봐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쫄따구 선생? 올 때 약 가져와.”

간호사에게 박주당을 맡긴 이찬희는 잠시 베드를 벗어났다.

“하! 하여간 똥고집이셔.”

이찬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어찌 됐든 이대로 박주당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태경에게 불호령을 맞을 게 뻔했고, 무엇보다 그의 복통 때문에도 그랬다.

비록 자전거긴 했지만, 음주운전 사고 시 복통은 내부 장기의 손상이 동반되므로 검사를 못 하게 하더라도 절대 보내면 안 된다.

의사는 환자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 강압적인 진료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심각한 손상이 우려될 때는 환자가 아무리 원해도 퇴원은 안 된다.

대한민국 법이 그랬다.

“쌤, 박주당 할아버지 보호자 전화번호 등록된 거 있죠?”

“네, 따님 번호 있어요. 알려 드릴까요?”

“네. 알려 주세요.”

번호를 받은 이찬희는 통화를 하기 위해 잠시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여기 우리병원인데요. 혹시 박주당 할아버지 따님이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박주당의 딸은 병원과 통화가 처음이 아닌 듯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 때문에 평소에 고생하신다고 들었어요. 죄송해요. 혹시 아버지 지금 병원에 계시나요?

“네. 술을 드시고 자전거를 타시다 사고가 나서 검사를 해야 하는데 계속 거절하고 계세요. 설득 좀 해 주시겠어요? 지금 바꿔 드릴게요.”

-잠시만요? 사고라면 많이 다치셨나요?

“우선 육안상 외상은 보이지 않는데요. 복부에 손상이 우려되는 상황이라 검사와 입원이 꼭 필요하거든요.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바로 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할게요. 아버지 잘 좀 부탁드려요.

“네, 걱정 마세요.”

이찬희는 전화를 끊고 바로 응급실로 돌아갔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빠 멀쩡해. 괜찮대도 그러네.”

이찬희가 베드에 다가가자 안에서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디 아픈 곳은 없지? 그래,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 가. 괜히 이 서방한테 말하지 말고.”

조금 전까지 쇠심줄보다 질기게 고집을 피우던 박주당이 딸과는 세상 다소곳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알았어. 오긴 뭘 와. 오지 마. 밥 잘 챙겨 먹어. 전화할게.”

챠륵-

5분 뒤 통화가 끝나고 이찬희가 베드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해.”

박주당은 이찬희를 보자마자 대뜸 사과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 다른 게 아니라 응급실에서 검사하면 돈이 많이 나오잖아. 그거 때문에 그래…….”

박주당이 검사 소리에 기겁하며 나가려고 했던 이유는 딸에게 미안해서였다.

안 그래도 혼자 남은 아버지 걱정이 많은 딸인데 거기에 더해 돈 들어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착한 사위가 어쩌다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딸네 사정도 지금 말이 아니었다.

“우리 딸이 지금 좀 힘든 상태거든. 괜시리 딸한테 짐만 되니까…….”

“그래도 하셔야 해요. 그러다 큰일 나실 수도 있어요.”

박주당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병원을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따님 생각하신다면 더 검사받으세요. 네?”

“……알았어. 할게.”

“정말이시죠?”

“근데 이 선생?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부탁이요?”

“입원할 테니까 조금 싸게 해 주면 안 돼? 그 저번에 세탁소 김 씨 보니까 입원 이후에 하는 검사는 조금 더 싸다고 했던 거 같은데…….”

결국 돈이 문제였다.

“그렇게 해 주면 안 될까? 응급실에서 검사받기는 좀 부담스러워.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박주당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응급실에서 검사받지 않으려는 의지는 여전히 뚜렷했다.

이찬희는 참 난감했다.

이런 경우 사실 일분일초가 아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자가 강하게 입원부터 원하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했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이찬희는 베드를 벗어나 보호자인 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보호자분 여기 병원인데요. 아버님께서 검사는 하신다고 하는데 입원 절차를 밟고 하시겠대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입원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연되고 자칫 응급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는 해요. 아버님께서 워낙 완강하셔서요. 죄송하지만 이것도 좀 설득해 주시겠어요?”

-저기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가격 차이가 크게 나나요?

돈 얘기가 나오자 딸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지는 듯했다.

“제가 원무과 직원이 아니라서요. 지금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냥 이번에는 아버지 뜻대로 해 주세요.

“네? 그래도 검사를 바로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사정이 있어서 길게 통화를 못 해요. 응급 상황이 생기더라도 저희가 감안할게요. 그러니까 아버지 뜻대로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검사 전에 전화 드려서 설명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이찬희는 한숨이 나왔다.

“하! 돈이 뭔지…….”

뭐든지 돈이 문제다.

어찌 됐건 병원을 나가겠다고 하던 환자가 입원이라도 한다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찬희는 베드로 돌아와 박주당에게 설명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입원 먼저 하고 검사 진행할게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여기, 선생님께서 안내해 주실 거예요.”

“환자분 제가 병동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박주당은 간호사와 함께 병동으로 가기 위해 응급실을 나갔다.

일단 입원은 시켰지만,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럴 경우 입원 절차를 밟고 검사를 진행하는 데 한두 시간 늦어질 수 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이 쌤, 신환이요?”

“네, 갑니다.”

이찬희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른 환자를 보러 자리를 옮겼다.

* * *

철컥-

응급 수술실을 끝내고 화장실에 갔던 태경이 의국실로 향했다.

“선배? 얼른 와요.”

미리 와 있던 의진이 책상 위에 햄버거 포장을 펼치며 말했다.

“와! 오늘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네.”

오늘따라 예약 환자도 많았고 응급 수술도 연달아 있었기에 태경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게요. 오늘은 진짜 시간 개념 없이 일한 거 같아요.”

“근데 웬 햄버거야?”

“우리 예쁜 이 쌤과 최 쌤이 야식으로 쏜 거래요.”

“안 그래도 살짝 출출했는데 잘됐네. 임 선생님?”

“수 쌤은 저녁에 과식해서 생각이 없으시대요. 으음! 미쳤다. 선배 얼른 먹어 봐요.”

의진은 햄버거를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진실의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맛있어?”

“네, 이 블랙 오징어 버거 먹고 싶었거든요. 진짜 꿀맛이에요.”

“의진이 너 보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거 알아?”

“잘 먹으면 좋죠. 전 먹는 거에 늘 진심이거든요.”

“정 선생? 나 할 말이 있는데…….”

“저, 선배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요.”

의진은 며칠 전부터 계속 할 말이 있다고 했던 태경이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백에 대한 거절의 의사일 거다.

야구장에 갔다 덜컥 마음을 전하면서 한 달 뒤 말해 달라고 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시간을 이렇게 끌면서 말하는 건 아마도 거절이 확실했다.

“선배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요.”

여전히 태경에 대해 좋은 마음이었지만, 부담스럽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태경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뭘 편하게 말해?”

“그 왜 저번에 제가 야구장 갔던 날이요. 그날 제가 했던 말에 대해 답변하시려는 거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거절이네 마네 하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의진은 순간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마취과 한 명 충원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려 한 건데?”

“마취과요?”

“응.”

태경은 진작부터 마취과 의사 충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의진은 외과 쪽 수술은 물론이고 가끔 다른 과 수술까지 전담하고 있었다. 그걸 다 혼자 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마취과 의사가 한 명 더 있다면 긴박한 응급 상황에서 양쪽으로 수술방을 잡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병원의 수익적인 부분도 안정되었기에 의사를 한 명 충원해도 충분한 상태였다.

“저야. 당연히 좋죠.”

월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일이 줄어드는 거였기에 의진의 입장에서 마다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근데 우리 병원에 오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요즘 사람 구하기 쉽지 않잖아요.”

“일단 주변에도 물어보고 의료 구직 사이트에 올려 봐야지.”

“지금보다 더 여유 있게 외래 환자도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OBGY(산부인과) 진료 정식으로 해 보는 거 한번 생각해 볼래?”

지금까지는 의진이 어쩌다 응급실에 오는 산부인과 환자를 가끔 보는 형식이었다.

태경은 마취과뿐만 아니라 산부인과 전문의로서도 능력 있는 후배가 재능을 묻혀 두는 게 아까웠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이라도 진료 위주로 보면 괜찮을 거 같은데.”

“선배, 이 문제는 제가 진지하게 생각해 봐도 될까요?”

뭔가를 생각하던 의진은 신중하게 답했다.

“물론이지. 급한 거 없으니까 충분히 생각해. 사람을 진료하는 일이니까 네가 진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수락하고 아니면 하지 마. 그게 맞아.”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었기에 의진이 등 떠밀려서 진료하는 건 원치 않았다.

“네,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씀드릴게요.”

“근데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의진이 안심하고 있던 사이 태경이 문제의 그 얘기를 꺼내려 하던 그때였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외과 병동.

환자의 다급함을 알리는 원내 방송이 의국실에 울렸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외과 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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