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보석 같은 존재
철컥-
진료실로 들어간 순간,
“선생님!”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밝은 목소리로 태경에게 다가와 안겼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태경에게 다가와 안긴 사람은 바로 세영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오늘은 학대로 인해 수술을 받고 입원했던 세영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원래는 더 일찍 퇴원할 예정이었지만, 장염 증세로 입원이 더 연장됐었다.
“세영이 오늘 퇴원하는 날인 거 알아?”
태경의 얼굴 위로 저도 모르게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옷도 갈아입었어요.”
늘 환자복을 입고 있던 세영이는 편한 바지와 귀여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세영이는 입원해 있는 동안 몰라보게 달라졌다.
처음 대기실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도한연의 눈을 피해 불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던 안쓰러운 모습은 더는 없었다.
또래 아이처럼 밝고 씩씩했으며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세영이가 퇴원한다고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몰라요.”
맞은편에 앉은 고영철이 말했다. 딸이 당한 일로 심적 고통이 상당했던 그 역시 이제는 전보다 웃는 얼굴이 많아졌다.
“왜? 세영이 아쉬워?”
“네. 이제 선생님들 못 보잖아요.”
“아니야. 볼 수 있어. 세영이가 선생님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놀러 오면 돼.”
“정말요? 근데 선생님들 바쁘잖아요.”
“바빠도 세영이가 오면 선생님이 시간 내서 꼭 볼게. 그럼 됐지?”
“네.”
“세영이 이제 어디 가는 줄 알아?”
“네, 해바라기 센터요.”
퇴원한 세영이는 고영철과 함께 센터로 들어가 심리 치료를 이어 갈 예정이다.
“거기에도 세영이를 도와줄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실 거야.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지?”
“네,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잘 지낼 수 있어요.”
“세영아, 선생님께 선물 드려야지.”
“아! 맞다.”
고영철은 커다란 봉투에서 액자를 꺼내 태경에게 전달했다.
“선생님 선물이에요.”
“세영이가 이거 준비한다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몰라요.”
액자 안에는 우리병원 직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태경을 비롯한 의진과 이찬희, 최모나, 임정숙 간호사 등 세영이가 입원 기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다.
“우와! 이걸 세영이가 다 그린 거야?”
“네, 전부 제가 다 했어요.”
“진짜 잘 그렸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 제일 멋진 선물이네.”
태경은 진료실 중앙에 걸려 있던 달력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액자를 걸었다.
“선생님이 이거 볼 때마다 세영이 생각할게. 고마워.”
그 뒤 세영이는 병원을 돌며 자신을 보살펴 준 의료진과 차례로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태경이와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 저 치료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빠랑 놀러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정문에 서서 인사하는 세영이의 눈동자에 반사된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잘 가. 세영아.”
세영이는 처음 병원을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병원을 나갔다.
아직 몸에는 학대의 흔적으로 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세영이가 만들어 갈 꿈과 행복이 그 흉터를 덮을 것이다.
“어휴! 주책이다. 세영이가 저렇게 밝은 모습으로 퇴원하니까 눈물이 나네요.”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임정숙 간호사는 코를 살짝 훌쩍거렸다.
“저도 울컥하네요.”
“다시는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어른들이 더 신경 쓰고 잘해야죠.”
이 땅의 모든 아이는 다 보석 같은 존재들이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반짝거리는 진짜 보석이었다.
부디 그 보석들이 사람 같지 않은 어른들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작은 상처도 흠집도 나지 않고 계속 반짝이길 태경은 간절히 바랐다.
* * *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이수정이 일을 하러 간 사이, 집에서는 아이들끼리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남편의 사고 이후 이수정은 저녁 시간 때 집에 있는 날이 드물었다.
오전에는 전단지를 돌리고 면회도 가야 했다. 오후에는 학교에서 오는 아이들을 잠시 보고 일을 나갔다.
그러다 보니 저녁은 늘 아이들끼리 먹을 때가 많았다.
탁-
“왜? 현웅이 배 안 고파?”
이수정의 딸인 둘째 현미는 식탁 위에 수저를 내려놓는 막내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게 아니라. 또 카레잖아…….”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한 막내는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보며 소심하게 심통을 부렸다.
계란 프라이가 올려진 카레밥과 장조림, 멸치볶음과 김치. 물론 하나같이 맛있는 반찬인 건 분명했다.
문제는 아무리 맛있는 반찬도 계속 먹으면 물린다는 거였다.
예전처럼 여러 가지 반찬을 자주 할 수 없던 이수정은 며칠에 한 번씩 아이들이 먹을 반찬을 미리 만들어 놨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첫째와 둘째는 반찬 투정이 없었지만, 아직 어린 초등학생 막내는 반복된 반찬들이 지겨웠다.
“카레 먹기 싫어?”
“어제도 오늘도 계속 카레만 먹었잖아. 누나 우리 치킨 시켜 먹으면 안 돼?”
“치킨? 현웅아, 치킨은 안 될 것 같은데…….”
“아~ 왜. 나 치킨 먹고 싶단 말이야.”
“야! 됐어.”
밥을 먹기 위해 방에서 나온 첫째 아들 현준이 막내의 밥투정을 보며 밥그릇을 멀찍이 옮기며 식탁에 앉았다.
“반찬 투정할 거면 먹지 마. 형이 먹을 거야.”
“아, 안 먹는다고 한 적 없어.”
막내는 고등학생 형이 무서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레 먹기 싫다며? 그리고 치킨 못 시켜 먹어. 저번 주말에 먹었잖아. 형이 말했지? 아빠 사고 나시고 엄마가 지금 힘드시니까 우리가 말 잘 듣고 엄마 도와드려야 한다고. 근데 너 자꾸 이렇게 매일 반찬 투정하면 돼? 안 돼?”
“…….”
“형이 한 번만 더 반찬 투정하면 혼난다고 했지? 차현웅 대답 안 해?”
“바, 반찬…… 투정한 거 아니란 말이야.”
“어휴! 오빠 그만해. 그러다 또 울겠다.”
서러움과 무서움을 느낌 막내가 울려고 하자 둘째가 중재하고 나섰다.
“네가 자꾸 받아 주니까 더 그러잖아.”
“아직 애잖아. 현웅아, 울지 마.”
“차현웅 너 울어?”
“아, 아니야. 안 울어.”
“밥 먹을 거지?”
“먹을게. 형아 반찬 투정해서 미안해.”
막내는 눈물을 닦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알면 됐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응.”
첫째는 아빠의 병원비를 비롯해 집안의 나가는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쓸데없이 나가는 돈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아빠가 사고 나기 전에는 먹고 싶은 대로 생각 없이 먹었던 간식들이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시킬 때마다 2, 3만 원씩 드는 비용도 생각보다 꽤 큰 돈이었다.
아직 어린 막내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딩동- 딩동-
막내의 반찬 투정이 일단락되고 밥을 먹는데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밥을 먹던 첫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했다.
-배달인데요.
지은 지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라 공동 현관 비밀번호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오늘처럼 배달 기사가 벨을 누르기도 했다.
“잘못 오신 거 같아요. 배달시킨 적 없어요.”
-차대한 씨 댁 아닌가요?
잘못 온 배달이라고 생각한 첫째가 돌아서는데 배달 기사가 아빠의 이름을 말했다.
“오빠. 엄마가 시킨 거 아니야? 저번에도 한 번 엄마가 우리 먹으라고 배달해 주셨잖아.”
“누나 말이 맞는 거 같아. 형아, 얼른 문 열어 봐.”
철컥-
문이 열리자 배달 기사가 현관으로 들어와 배달 음식을 내려놨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저씨. 이게 전부 우리 집으로 배달 온 거예요?”
치킨에 피자, 떡볶이. 게다가 디저트까지 너무 많은 음식이 왔다. 뭔가 딱 봐도 엄마가 시킨 음식은 아닌 거 같았다.
“다 이 집으로 온 거 맞아.”
“혹시 누가 시켰는지 알 수 있어요?”
“부모님 성함이 차대한, 이수정 씨 맞지?”
“네, 맞아요.”
“난 퀵 기사인데 너희 부모님과 잘 아는 분이라면서 음식이랑 이거 같이 배달해 달라고 했어.”
퀵 기사는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데요?”
“나야 모르지. 어머니께 전달해 달라고 하던데.”
퀵 기사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갔다.
“형아 우리 이거 먹어도 되지?”
막내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첫째는 곧장 이수정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오빠, 엄마한테 전화한 거야?”
“응. 안 받으시네.”
“원래 이 시간에 바빠서 전화 못 받으시잖아.”
“형아? 누나? 우리 이거 먹으면 안 돼?”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배달 된 음식을 빤히 쳐다보던 막내가 첫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래, 오빠. 엄마, 아빠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잖아.”
“형아. 현웅이 진짜 먹고 싶어.”
“……그래. 알았어.”
어차피 받은 음식이고 막내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첫째는 일단 먹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 앞으로 온 작은 상자는 뜯지 않고 안방에 갖다 뒀다.
몇 시간 뒤-
“그러니까 음식이랑 이 상자가 퀵으로 배달됐다는 거야?”
“응.”
마트 일을 마치고 퇴근한 이수정은 아이들의 설명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음식을 보낸 적도 없고, 주변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동생들이랑 일단 먹었어.”
“혹시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받지 말고 돌려보내. 알았지?”
“네.”
“알았어요.”
아이들을 주의시키고 주고 방에 들어온 이수정은 도대체 이걸 누가 보냈는지 생각하면서 상자를 열어 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작은 상자 안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돈뭉치라는 말이 맞았다.
‘누가 이걸……?’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잠시 당황한 사이 화장대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렸다.
Rrrrrrrrr
“여보세요?”
-이수정 씨, 핸드폰인가요?
생소한 번호에 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제가 배달을 보내드렸는데 혹시 받으셨나요?
“그쪽이 우리 집에 음식이랑 상자, 아니 돈을 보낸 사람인가요?”
-네, 맞습니다. 제가 차대한 환자분과 그 가족들에게 도움이 드리고 싶어서 보냈습니다.
“도움이라고요? 누구신데요?”
-전, 신화대학병원 원장 고계득이라고 합니다.
“원장님이시라고요?”
그러고 보니 오늘 남편을 면회 갔을 때 봤던 남자와 가운 위 고계득이란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차대한 환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남편에 대해서요?”
-네, 제가 지금 보호자님 집 근처인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시죠?”
-방금 말씀드린 대로 차대한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화상으로는 좀 힘들어서요.
이수정은 병원 원장의 연락이 상당히 의아했지만, 자꾸만 남편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을 강조한 탓에 만나 보기로 했다. 그리고 집으로 보낸 돈도 돌려줘야 했기에 나가기로 했다.
“어디로 가면 되죠? 네, 거기 알아요.”
이수정은 상자 속에서 돈을 꺼내 고계득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