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불안감과 공포감
이수정은 집 근처에 있는 24시간 카페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 1층에는 몇 명뿐이었고,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대한 보호자님?”
2층에 올라온 이수정이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네.”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고계득이 이수정 앞에 서 있었다.
“제가 전화 드린 고계득입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다 보니 불쑥 연락드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제일 구석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수정은 의자에 앉으며 고계득의 얼굴을 쳐다봤다. 확실히 외상 중환자실에서 원장이라며 인사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분명했다.
“저희 집에 음식과 이걸 보내신 이유가 뭔지…….”
이수정은 종이봉투에 넣어서 갖고 온 돈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음식은 아이들이 잘 먹었습니다. 음식값은 드릴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아이들이 있다는 소리에 일부러 보냈는데 제가 결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음식값을 지불한다는 이수정에 말에 고계득은 과장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표정이 마치 정말 아이들을 생각해서 한 것처럼 가증스럽게 보였다.
“불편함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돈은 왜 보내셨나요?”
“제가 병원장이다 보니 환자분이며 보호자들의 사정을 두루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차대한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좀 듣게 됐는데 제가 보호자분을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도움이라니요?”
“차대한 환자분이 장기 입원으로 지금 좀 힘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심적으로나…….”
고계득은 이수정의 반응을 자세히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금전적으로나 말이죠. 병원에서 장기 입원을 하면 보호자분들은 자연스럽게 병원비를 걱정하게 됩니다. 특히 외상 중환자실은 그 금액이 상당하죠. 그래서 제가 금전적인 부분을 도와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고계득은 이수정이 올려 둔 테이블 위의 돈을 맞은편으로 서서히 밀었다.
“그러니까 이 돈을 남편의 병원비로 사용하라는 말인가요?”
“병원비와 더불어 차대한 환자가 사고를 당해서 현재 집안이 좀 어려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부분까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환자가 오랜 시간 병원에 입원하다 보면 환자뿐만 아니라 곁에서 지키는 보호자와 가족들도 상당히 지친다.
거기에 금전적인 문제까지 더해지다 보면 가끔 보호자가 환자를 포기하고 도망가는 믿기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한다.
고계득은 이수정이 보호자로서 겪고 있는 그 힘든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절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말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기에 그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일전에 사회복지팀에 병원비 지원으로 문의하셨다가 안 된다는 대답을 들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제가 그 문제도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돈은 차대한 환자 병원비에 대한 제 개인적인 후원금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병원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직책이 병원장입니다. 병원장은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저희한테 왜 이런 걸 해 주시려는 건지…….”
“글쎄요. 뭐랄까……. 제가 보호자분을 돕고 우리 보호자께서도 저를 도와주시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닐까 해서요.”
이수정은 도와 달라는 고계득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가 원장님을 돕는다고요?”
“네, 제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시면 차대한 환자분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부탁이요?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 건지…….”
“그건 부탁을 들어주신다는 결정을 하면 그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고계득이 말한 조건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돈뭉치와 병원비 지원은 이수정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그 뒤 이수정은 아무 말 없이 5분 정도 꽤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참을 고민하던 이수정이 드디어 입을 떼려고 하던 그때였다.
“지금 말고요.”
고계득이 말허리를 급히 자르며 먼저 치고 나왔다.
“네?”
“지금 당장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신 다음에 답을 주시면 어떨까요?”
“…….”
“이런! 병원에서 연락이 왔네. 실례지만 제가 급한 연락이 와서요. 잠시만 통화를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고계득은 오지도 않은 연락을 핑계로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이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일이 생겨서 인사도 못 드리고 먼저 가게 됐습니다.
“돈을 두고 가셨는데요?”
-제 부탁은 딱 한 가지입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돈은 잠시 맡아 주세요. 일주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돈이 없는 상태에서 고민하는 것과 돈을 보면서 하는 고민은 천지 차이라는 걸 고계득은 잘 알고 있었다.
“하!”
전화를 끊은 이수정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동안 돈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
경기도의 한 낚시터-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새벽의 한적한 낚시터는 정말 고요하다. 특히나 오늘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적막함마저 감돌았다.
“젠장! 오늘따라 입질이 하나도 없네. 없어.”
신화대병원 마취과 핵심 인력이었던 이동훈은 물안개가 내린 낚시터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러다 오늘도 한 마리 못 잡고 허탕 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동훈은 요즘 낚시터에 자주 왔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술 일정 때문에 마음 편히 낚시터 오는 게 힘들었는데 요즘은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불과 얼마 전, 고계득이 태경을 설득하라고 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분원 원장으로 갈 생각에 잠시나마 기분이 들떴었다. 하지만 태경을 만난 뒤 설득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생각을 바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태경을 설득하지 못하고 편을 들었다며 고계득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괴롭힘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로 딴죽을 걸더니 급기야 마취과 일까지 제동을 걸었다. 오죽하면 동료 마취과 교수들이 조심스럽게 퇴사를 권유하곤 했었다.
안 그래도 고계득이 가만 있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굴 줄은 몰랐다.
결국 고민하던 이동훈은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더는 고계득의 더러운 꼴을 보며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결정하니 기분이 좀 별로였다. 그래도 손꼽히는 대학병원에서 과장씩이나 했는데 다시 개원가에 취직하기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덜컥 병원을 차리자니 그것 또한 위험부담이 있었다.
“답답하다. 답답해!”
일자리야 금방 구하면 그만이지만, 젊은 시절을 다 바친 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한다는 게 마음이 씁쓸했다.
“됐다! 뭐, 신화대 아니면 일할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뭘.”
가족들에게 이런 사정까지 다 말할 수 없었기에 이동훈은 속이 답답할 때면 이렇게 혼자 낚시터를 찾아 마음을 달랬다.
“크! 여긴 언제 봐도 경치가 예술이야. 그냥 보고 있어도 마음이 치유되네.”
새벽 물안개 속에 파묻혀 있으면 시끄러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만 같았다.
“소주 땅기네. 한 벼……. 에취! 새벽이라 그런가, 공기가 차네.”
시원하게 재채기를 한 이동훈은 코를 훌쩍이며 배를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안 고프네.”
이동훈은 평소에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취과 내에서 유명한 맛집 리스트를 보유할 만큼 삶의 낙 중 하나가 먹는 거였다.
원래 이쯤 되면 낚시터에서 짬뽕 국물을 먹을 차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허기가 전혀 없었다.
“뭐지…….”
아니, 오히려 속이 좀 이상한 거 같았다.
“왜 이렇게 속이 기분 나쁘게 더부룩하지.”
명치 부근을 가볍게 두드리던 그가 잠시 스트레칭이라도 할까 하고 낚시터 의자에서 일어났다.
“으샤. 어!”
있는 힘껏 팔을 위로 쳐들던 그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어졌다.
“어이쿠. 이게 뭔 일이야.”
직업이 의사인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동훈은 곧장 자기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박동 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1, 2, 3, 4……. 95, 96, 97……. 103, 104, 105.”
1분 동안 박동 수가 105회였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확인해서 정확하지 않기에 110회 정도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조금 전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별안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과 빈맥, 배의 더부룩함이 발생했다.
“이거 괜히 내가 너무 예민한가?”
잠깐 긴장했던 이동훈은 애써 무시하며 다시 팔짱을 끼고 낚시터 풍경을 바라봤다.
“사진이나 한번 찍을…….”
그렇게 주변 풍경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순간,
털썩-
이동훈이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고요한 낚시터에 그를 도울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씩 낚시찌가 움직였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짙어지는 물안개 사이로 시간이 흘렀다.
잠시 뒤-
“어! 뭐야!”
눈을 뜬 이동훈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야?”
재빨리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살펴본 결과 다행히 외상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거 안 되겠는데…….”
온몸에서 오한을 느낀 이동훈은 즉시 119에 전화를 걸었다.
-네, 119입니다.
“여기 xx 낚시터인데요. 제가 조금 전에 쓰러졌거든요.”
-지금 전화 주신 분께서 쓰러지셨다고요?
“네. 빨리 좀 와 주세요. 제가 의식을 또 잃을 수도 있어서요.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계신 위치 좀 정확히 알려 주세요.
“xx 낚시터입니다. 오실 때 xx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바로 쭉 오시면 낚시터가 보이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119 신고 전화를 마친 이동훈은 너무나 무서웠다.
쓰러졌다는 그 자체도 무서웠지만, 자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이유를 모르는 변화도 무서웠다.
‘뭐가 문제지?’
그때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원인이 뭘까?
먹는 걸 좋아하긴 해도 같은 나이의 사람들보다 운동을 적게 한 것도 아니고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직업이 의사라 몸 관리에는 남들보다 더 신경 써서 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으며 앓고 있던 지병도 없었고, 그 흔한 고혈압과 당뇨도 없었다.
‘가족력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게 없는데…….’
지금 몸 상태를 봐서는 출혈이거나 그에 따르는 혈량 부족처럼 보이는데,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이러다 또 쓰러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점점 더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