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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66화 (165/472)

166화. 꿀렁거리고 둔탁한

낚시터 의자에 앉은 이동훈은 별안간 주변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쓰러지고 난 뒤라 그런지 마음을 차분하게 하던 적막감이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의사라기보다는 그저 질병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평범한 환자 그 자체였다.

119대원이 빨리 오길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 순간,

툭- 바스락-

뒤쪽에서 별안간 소리가 들려왔다.

-멧돼지 출몰 지역.

순간 낚시터로 들어오는 마을 초입에 있던 멧돼지 주의 문구가 불현듯 떠올랐다.

‘뭐야? 진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진짜 멧돼지면 어쩌나 하는 그때 낚시터를 배회하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옆을 지나갔다.

-야옹

“어휴, 젠장! 놀랐네. 야, 이놈아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잖아.”

-야옹

“미안한데 오늘은 고기가 안 잡혀서 줄 게 없어.”

고양이 기척에 긴장한 이동훈은 자동차로 이동해 히터를 튼 뒤 다리를 들고 누웠다. 그 뒤 119대원이 잘 볼 수 있도록 라이트를 켰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혹시, 119에 신고하신 분이신가요?”

그토록 기다리던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네, 맞아요. 대원님. 접니다.”

구급대원을 본 이동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병원에서 지겹도록 구급대원들을 봤지만, 오늘처럼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일단 빨리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우선 걸으실 수 있겠어요?”

“네. 지금은 괜찮……!”

차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딘 이동훈은 또 한 번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어이쿠. 환자분 안 되겠네요.”

그 모습에 옆에 있던 구급대원들도 놀라 얼른 그를 챙겼다.

“그냥 여기 누우세요. 저희가 옮게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진 않았다. 구급대원들이 놀란 이동훈을 빠르게 들것을 이용해 구급차에 태웠다.

“저 대원님? 우선 혈압부터 측정해 주세요.”

또 한 번 몸이 보낸 이상 신호에 놀란 이동훈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수액이 뭐 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저 환자분? 우선 저희가 알아서 처치할게요.”

이동훈이 의사인지 모르는 구급대원은 그를 진정시키며 달랬다.

“수액을 말씀드려도 모르잖아요. 걱정하지 마시고…….”

“말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저 의사입니다. 신화대학병원 마취과 교수에요. 그러니까 혈압 측정부터 해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소 이동훈이라면 부탁한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구급대원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기에 애써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있는 수액은 노멀 샐라인(Normal saline, 식염수)이 있습니다.”

“그럼 승압제는요? 승압제는 뭐가 있나요?”

“현재 에피네프린(epinephrine, 승압제의 한 종류로 혈압을 상승시키는 데 강력함) 있고요.”

구급대원은 말을 하면서 혈압을 측정할 준비를 했다.

“선생님, 잠시 혈압 측정하겠습니다.”

“몇이죠?”

혈압 측정이 끝나자마자 이동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재차 물었다.

“몇인가요?”

“100/75으로 보이는데요.”

“지금 노멀 샐라인 1L 우선 주세요. 그거 조절 장치 다 열어 주시고 조절하지 마세요.”

“네.”

“병원은 신화대학병원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15분마다 혈압 계속 측정 부탁드릴게요. 제가 아까 낚시터에서 의식을 잃었거든요. 혹시 이송 중에 제가 의식을 또 잃으면 그땐 신화대병원까지 안 가셔도 돼요.”

“네?”

“우리병원이라고 가는 길에 있을 거예요. 거기라도 가 주세요.”

이동훈은 순간 태경이 있는 우리병원이 생각났다.

“우리병원이요?”

“네. 그러니까 제가 의식이 잃으면 우리병원으로 가 주시고요. 의식이 있으면 신화대학으로 가 주세요. 그리고 혈압 계속 측정하는데 수축기가 80까지 내려가면 그땐 에피네프린 투여해 주세요.”

“저기 선생님?”

옆에서 휴대폰으로 보며 확인하던 또 다른 구급대원이 말했다.

“여기서 신화대병원은 정 반대라서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요? 잠시만요? 거기 제 가방에 휴대폰 좀 꺼내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건네받은 이동훈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나, 마취과 이동훈인데?”

-네, 선생님.

“오늘 외과 당직 교수님 누구야?”

-권수현 선생님이십니다.

“뭐! 권수현?”

구급차 베드에 누워서 차분하게 전화하던 이동훈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권 선생이라면…….”

-그 왜 있잖아요. 김태경 선생님 후임으로 오신 분이요.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아니야. 수고해.”

‘권수현이라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태경의 후임으로 들어온 권수현은 빽은 화려했지만, 실력은 초라했다. 실력이 아닌 낙하산으로 들어온 인물이니 오죽할까 싶었다.

“여보세요. 거기 우리병원이죠?”

이동훈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김태경 선생님 진료 보시나요? 네. 감사합니다. 대원님, 우리병원으로 가 주세요.”

전화를 끊은 이동훈은 구급대원에게 우리병원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현재 근무하는 신화대병원이고 좋은 병원이라 할지라도, 실력이 없는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태경이라면 믿을 수 있으므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시동을 켠 구급 차량은 새벽어둠을 뚫고 빠른 속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우리병원 응급실.

챠륵-

“선생님! 뼈 부러졌나요?”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태경이 커튼을 열자 베드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반응했다.

“아니요.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네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오른쪽 정강이뼈에 금이 가서 2주 정도 깁스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깁스? 엄마 나 깁스하면 학교 안 가도 돼?”

베드 위에서 형이랑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던 초등학생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묻자 엄마가 얼른 정색했다.

“학교에 안 가긴 왜 안 가? 너희 그리고 한 번만 더 새벽까지 게임하면 컴퓨터 갖다 팔 거야? 알았어?”

“아, 안 돼요. 신작 게임 해야 한단 말이야.”

부모님 몰래 하려던 컴퓨터를 급히 끄다가 책상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친 아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엄마 괜히 하는 말이야. 컴퓨터 비싸서 절대 못 팔아.”

“너는 형이 돼서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동생이 게임하면 못 하게 해야지 그걸 같이해?”

“신작 게임 조금만 하려다 그런 거야.”

“형 말이 맞아.”

“시끄러워. 하여간 너희 아빠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땐 혼날 줄 알아.”

“보호자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휴, 말도 마세요. 얘들 말고 집에 큰아들이 또 있거든요. 아들 셋 키우는 게 매일 전쟁이에요.”

응급실에서 워낙 아이들도 많이 진료해 봤기에 태경은 남자아이들만 키우는 부모들의 수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사 와서 근처에 병원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늦게까지 진료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심한 것도 아니고 2주 동안 깁스하면 잘 아물 거예요. 그럼 깁스해 드릴게요. 여기, 깁스해 주세요.”

“네, 선생님.”

챠륵-

“원장님?”

그렇게 아이의 진료를 끝내고 스테이션으로 향하는데 장득칠의 외침과 함께 구급차의 사이렌이 들려왔다.

“구급차 들어오는데요?”

“연락받은 거 있어요?”

위급한 환자면 보통 오기 전에 연락을 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단 위급한 환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없어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경은 구급차가 주차한 곳으로 먼저 나갔다.

“환자 상태 부ㅌ……!”

“김 선생?”

구급차에서 이동 베드를 내리는 구급대원에게 질문하던 태경은 순간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첫째는 난데없는 이동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둘째는 포르말린 냄새가 그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이 선생님한테 4단계 냄새가 나는 거지?’

그 냄새에 집중하던 태경은 일단 이동훈부터 살폈다.

“아니,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야, 이거 원장님이 직접 에스코트를 다 나오고 여기 병원 서비스 좋네.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어.”

태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동훈은 마음 한가득 들어찼던 불안감이 줄어들고 내심 안심이 됐다.

“내가 김 선생 보고 싶어서 못 기다리고 그냥 왔어.”

안 그래도 태경은 이동훈과 다음 주에 보려고 약속을 해 둔 상태였다.

간만에 얼굴도 보고 주변에 괜찮은 마취과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농담하시는 거 보니까 아직 살 만하신가 봅니다.”

다섯 번째 바이탈이 4단계로 심각한 것과 달리, 이동훈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김 선생 보니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서 그렇지.”

“증상은 어떠신데요?”

“12시간 전부터 복부 불편감이 있었고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는데 허기가 전혀 없더라고.”

구급대원들이 베드를 미는 와중에 이동훈이 증상을 설명하자 태경이 집중했다.

“그러다가 2시간 전에 앉았다 일어나는데 별안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낚시터에 쓰러졌어. 깨 보니까 한 시간이 지났더라고. 그래서 얼른 119에 신고했지.”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이동훈의 복부를 만진 태경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선생님 지병은요?”

“알잖아. 나 깨끗해. 그런 거 전혀 없어.”

“그럼 빠르게 lab이랑 CT 먼저 찍을게요. 신장 좋죠? 조영제 바로 씁니다.”

“문제없어. 우리 원장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나 좀 잘 부탁해.”

“그럼요. 당연하죠.”

지잉-

“53세 남자 환자예요.”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며 태경의 지시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full monitoring 해주시고 하트만 솔루션(Hartmann solution, 수액의 한 종류로 인체의 전해질 등이 포함되어 있음) 500bolus로 준 다음 100cc/hr로 주세요.”

“네, 선생님.”

“바로 lab해 주시고 CT 갈게요. CT실 전화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수술방에도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어! 수술방? 김 선생 나 수술해야 할 것 같아?”

“물론 CT를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방금 선생님 배 만져 보니까 헤모페리(hemoperitoneum, 출혈로 인해 복강 내 혈액이 고이는 것) 같아요.”

조금 전, 이동훈의 배를 촉진했을 때 배가 꿀렁거리고 둔탁한 음인 것으로 보아 액체가 고인 것으로 판단했다.

게다가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살짝 불러 있었으며, 혈압이 떨어지고 박동 수가 빨라지는 걸로 보아 복강 내 출혈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헤모페리! 내가? 왜?”

“이유는 검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지만 다행인 건 복막염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튼 뭐, 난 우리 김 선생님만 믿을게.”

“지금은 좀 어떠세요?”

“설명을 들어서 그런가? 배가 좀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프네. 그리고 좀 추워.”

이동훈은 추운 듯 몸을 살짝 움츠렸다.

“선생님, 식사는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어요?”

결과에 따라 수술이 바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태경은 금식 시간을 물어봤다.

“나 바로 수술해도 괜찮아. NPO time(수술을 위해 필요한 금식 시간) 다 충족돼.”

의사는 누구보다 병원과 가깝고 병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다.

이동훈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때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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