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히포크라테스가 와도
의사는 누구보다 병원과 가깝고 병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다.
이동훈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때는 미처 몰랐다. 평생을 무너지지 않던 긍정적인 멘탈이 무너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금식 시간은 됐고. 보호자는요? 가족에게 연락해야 하지 않아요?”
“가족? 아, 됐어.”
“그래도 사모님께는 알리는 게 낫지 않지 않을까요?”
“아니야. 이 새벽에 그것도 쓰러져서 병원 왔다는 소리 하면 괜히 와이프 놀라기만 할 거야. 아침에 내가 할게.”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요. 여기, 이동훈 환자분 20번 베드로 옮겨 주세요.”
“네, 선생님.”
“입원 처리해 주시고 병동에도 미리 연락해 놓으세요. 그리고 평상시 lab에다가 카디악 마커(cardiac marker, 심근경색 등을 알기 위한 심근효소 확인 검사)도 같이 나갈게요.”
“선생님, 심전도 촬영했습니다.”
태경은 그사이 진행한 심전도 결과지를 건네받고 바로 확인했다.
“심전도는 좋네요. 그래도 카디악 나갈게요. 그리고 아밀라아제와 리파아제(amylase와 lipase, 췌장염증과 관련이 있음)도 나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경이 내린 오더대로 이동훈은 신속하게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잠시 뒤, 태경은 모든 검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동훈에게 향했다.
“힘들진 않으셨어요?”
“검사가 힘든 게 뭐 있어.”
우리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 한 명 한 명이 태경에게 각별하고 신경 쓰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그랬다. 상대가 이동훈이기 때문이다.
신화대병원에서 수많은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늘 함께였고, 앞길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때도 항상 응원하며 힘을 주던 상대이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반드시 잘될 거야. 두고 봐. 나중에 결국 웃는 사람은 우리 김태경 선생일 테니까.’
번번이 교수 임용에서 밀릴 때마다 이동훈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 했지만, 저 말에 꽤 힘을 받았었다.
그만큼 이동훈은 태경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 고마운 마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직원분들이 다들 친절하시더라고. 무슨 VIP가 된 기분이야.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김 선생 참 대단해.”
“제가요?”
“응. 병원을 이끌어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보니까 잘하던데. 뭔가 한 병원을 책임지는 원장 티가 팍팍 난다고나 할까?”
“선생님, 혹시 수술할지도 모를까 봐 칭찬해 주시는 거 아닌가요?”
칭찬에 민망해진 태경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당연하지. 내 목숨 잡고 있는 중요한 사람인데 잘 보여야지. 안 그래?”
“그런 건가요? 참! 교수님들은 다들 잘 지내시죠?”
“뭐,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표면적이요?”
“내가 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지? 왜, 자네 후임으로 온 그 낙하산. 그 인물이 제 몫을 못 하고 있어.”
“교수님들이 걱정이 많으시겠네요.”
“말해 뭐해. 권 씨 때문에 교수들 수술도 많아지고 괜히 이러다 뭔 일 나는 건 아닌지 외줄 타는 거 같다니까.”
신화대병원 이야기가 나오자 이동훈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김 선생이 고 원장 제안 거절한 것도 백번 잘한 일이야. 아무튼 김 선생은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감사합니다.”
“저기, 선생님?”
그렇게 한동안 이동훈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을 살짝 불렀다.
“선생님 잠시만요. 좀 쉬고 계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일 봐.”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가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결과 나왔죠?”
“네, 선생님.”
“지금 바로 볼게요.”
“이동훈 환자분보다 선생님이 더 긴장돼 보이네요.”
“그러게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맞았다.
베드 위에서 편한 얼굴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이동훈보다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태경의 표정이 더 진지했다.
태경은 모니터 앞에 앉아 진지하게 CT 결과를 확인했다.
모니터에 간과 위가 나오고 차례대로 복부대동맥과 신장, 대장과 소장들이 나왔다.
‘배 안은 아직 깨끗하네.’
그리고 소장이 끝날 무렵 복부 내에 액체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후 태경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갔다.
‘아! 이런……. 헤모글로빈이 너무 낮잖아.’
바로 옆 모니터에서 확인한 lab에서는 헤모글로빈(Hgb, 산소운반 관련인자의 수치로 낮을수록 출혈 가능성이 큼)이 정상치의 절반인 6으로 너무 낮았다.
결과를 확인한 태경은 곧장 이동훈에게 향했다.
챠륵-
“선생님?”
“응. 김 선생. 뭐야? 표정이 좀 안 좋은데?”
오랜 시간 동안 태경과 합을 맞췄던 이동훈은 미묘한 표정 하나만으로도 태경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헤모글로빈이 6이고 CT상 안에 피가 잔뜩 고였어요. 정확한 원인은 열고서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음……. 그 정도면 개복해야겠지?”
“네, 열고 하나하나 찾아야죠.”
“CT에서 원인은 안 보이고?”
“아직 정확하지는 않은데 이상한 게 보이긴 해요.”
“이상한 거? 뭔데?”
“소장에 뭐가 있어요.”
“소장? 소장에 있을 게 뭐가 있어? 김 선생, 나 괜찮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줘.”
“그게 명확하지 않아서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수술해서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김 선생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알았어. 잘 부탁해.”
“네. 그럼 수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 동의서 좀 받을게요.”
“그냥 원장님이 다 알아서 작성해 주세요. 나는 우리 김태경 원장님 믿습니다. 괜찮아요.”
걱정하는 태경과 달리 이동훈은 여전히 걱정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선생님? 아시겠지만, 사망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알지. 의사인 내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 그런데 있잖아. 난 우리 김 선생이 모르는 걸 하나 알고 있거든?”
“예?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오랫동안 김 선생의 수술을 봐 와서 잘 아는 사실인데, 김태경 선생이 수술하다가 죽을 정도면 히포크라테스가 와도 죽어. 암 그건 맞지.”
“하! 무슨 말씀이세요.”
어이없는 이동훈의 말에 태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씀은 감사한데 과찬이 너무 지나치신데요.”
“내가 오버하는 거 같지? 근데 오버 아니야.”
이동훈은 진지했다. 그가 방금 한 말은 과장이면서도 과장이 아니었다.
조금 전 병원에 도착 후 태경의 얼굴을 본 이후로 이동훈은 두렵고 불안하던 마음이 없어졌다.
그건 눈앞에 있는 의사를 믿을 수 있다는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화대 병원에서 수많은 의사의 수술을 봐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사들이 하는 수술도 재능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수술방에서 같은 의사들이 보면 더 도드라지게 느낀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머리가 뛰어난 사람도 막상 필드에 나오면 실전에서 활약을 잘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필드에서 더 활약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론적 머리와 수술적 재능을 다 갖춘 의사도 있는데 그게 바로 태경이었다.
쉽게 말해 천재가 노력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경우였다.
게다가 이동훈이 태경을 높게 사는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바로 인간성이었다.
의사가 실력이 좋으면 친절하기가 쉽지 않다. 명성을 듣고 몰리는 환자들과 주변에서 띄워 주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 힘이 들어가고 목이 뻣뻣해진다.
그런데 태경은 인간성까지 진국이니 같은 의사 입장에서 목숨을 맡기고 수술하기에는 최고의 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잘한 동의서의 설명은 굳이 필요가 없었다.
“난 우리 김 선생 믿어.”
“감사합니다. 그래도 절차니까 동의서 빠르게 받고 바로 수술방 올라갈게요.”
“그래요. 수술방에서 보자고.”
베드를 벗어나는 태경의 뒷모습이 어느 때보다 커 보였다. 분명 신화대병원과 비교하면 작은 병원이었는데 이동훈의 마음은 오히려 더 든든했다.
챠륵-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찬희가 수술 동의서를 들고 이동훈에게 인사했다.
“수술 동의서 설명해 드리러 왔습니다.”
“아고.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인가요.”
직장인 신화대병원도 아니고 친한 사이도 아닌 다른 의사가 부른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이동훈은 어쩐지 민망했다.
“환자로 왔으니 편하게 환자처럼 대해 주세요.”
“원장님도 선생님이라고 하시는데 제가 그럴 순 없죠. 일단 수술 안내해 드릴게요.”
빠르게 수술 안내를 마친 이찬희는 동의서에 사인을 받았다.
“그럼 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우리 김 원장이랑 일하긴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하긴 김 선생이 배울 점은 정말 많지. 근데 솔직히 여기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김 선생, 은근히 까다롭죠?”
“아니요. 은근히 아니라 대놓고 까다로우세요.”
이찬희는 이동훈이 한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어찌나 까다로우신지…….”
“하하! 그렇지? 환자 일에는 아무리 작은 것도 그냥 넘어가질 않고 타협이 없는 사람이라 그래요.”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어시로 들어가시나요?”
“네.”
“잘 부탁해요.”
수술을 코앞에 둔 이동훈은 이찬희와 기분 좋게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수술방을 향했다.
* * *
“김태경 선생님 그리고 여기 계신 선생님들,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수술방에 도착한 이동훈은 마취 전 태경을 비롯한 의료진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항상 마취의로서 있었는데, 수술받기 위해 수술방 베드 위에 누우니 기분이 묘했다.
“그럼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숨 푹 주무신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이동훈의 마음을 알아챈 태경은 따뜻한 말로 위로했다.
“그럴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지 뭐.”
“정 선생, 마취 부탁해요.”
“네.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이후, 신속하게 마취가 이뤄졌다.
마취가 끝나고 멸균된 포들이 이동훈의 온몸을 감싼 채 수술 필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럼 이동훈 환자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태경은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이동훈 배꼽 아래에 15cm 정도의 긴 절개선을 넣었다.
“투스포셉(tooth forcep, 끝에 고정할 수 있는 갈퀴가 있는 15cm 정도의 포셉)과 보비(Bovie, 전기로 피부나 조직 등을 자르는 기구로 절개와 지혈에 유효함) 주세요.”
태경은 절개선 한쪽을 포셉으로 들고 이찬희가 나머지 한쪽을 포셉으로 잡아서 양쪽으로 당겼다. 이후 태경은 보비로 가운데를 잘라 나갔다.
전기소작기인 보비를 갖다 대기만 하여도 조직들은 절개된다. 사이사이 피가 나는 부분은 보비를 이용해 전기로 지혈한다.
조직들이 타서 생긴 연기가 수술방 안에 피어오르자 이찬희가 석션으로 빠르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지속해서 조직들을 잘라 내려가다 보면 하얀 막이 보인다.
“이제 파샤(fascia, 근막)네. 손 들어와.”
“네, 선생님.”
태경의 말에 이찬희는 손가락을 파샤(근막) 구멍에 넣어서 배벽과 장의 거리를 벌렸다.
손가락을 넣은 이유는 전기소작기로 배벽을 절개해 나가는 동안 장이 손상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절개선을 모두 넣자 안쪽에 고여 있는 피가 보였다. 그런데 피를 보자마자 이찬희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인 피의 양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 엄청나네요.”
“그러게, 생각보다 꽤 많네.”
소장이 둥둥 떠 있을 만큼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석션에 cap(석션 중에 소장 등이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 씌워서 주세요.”
소장이 떠 있을 만큼 강을 이룬 피로 인해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얼른 찾아야 해.’
우선은 피가 어디서 나는지 출혈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슈욱-
배 속에 있던 피들이 어느 정도 빨려 들어가자 한쪽에서 피가 흘러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여긴가 본데.”
소장에 연결된 장간막 사이로 피가 쪼르륵 흐르고 있던 거였다.
“맞네. 여기야.”
태경이 소장을 한 움큼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리던 그때였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