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유혹
“일자리라면……. 설마! 나한테 병원 소개해 주려고?”
“네, 누가 선배님을 좀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해서요.”
“스, 스카우트 제의? 나한테?”
그 소리에 놀란 이동훈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제가 아는 곳인데 어떻게 소개시켜 드릴까요?”
“나야 감사 땡큐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 원장이 소개해 주는 곳이면 믿을 수 있잖아. 어딘데?”
얼굴에 화색을 보이며 반응한 이동훈은 태경의 다음 대답에 집중했다.
“근데 거기가 약간의 좀 문제가 있어요.”
“문제! 병원에 문제 될 게 뭐 있어?”
“근무시간이 좀 길 수도 있어요.”
“에이! 길면 어때. 월급만 나오면 돼. 돈은 제대로 준대?”
“제가 알기로는 급여는 만족하실 정도는 되실 것 같아요.”
“그럼 됐지. 일한 만큼만 주면 그런 건 문제도 아니야.”
“근데 신화대병원이랑 비교하면 유명한 병원도 아니고 규모가 그렇게 큰 병원도 아니에요.”
“태경이 너나 나나, 우리 둘 다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병원에서 일해 봐서 알잖아. 규모? 유명? 그딴 거 전혀 필요 없어. 막말로 난 교수까지 하고 나왔는데 뭘 더 미련이 있겠어.”
“마지막으로 원장이 좀 문젠데…….”
“원장은 또 왜!”
“뭐랄까요. 그게 가끔 환자들에게 너무 집중하다 보니까 직원들이 좀 피곤해하고, 또 퇴근을 잘 안 해서 눈치가 좀 보이기도 하나 봐요.”
“환자 생각하는 거, 그거는 뭐라고 할 게 아니지. 근데 원장이 퇴근 안 하는 게 조금 걸리긴 하네.”
두 눈을 크게 뜨고 대화에 집중하던 이동훈은 퇴근이란 단어가 나오자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안 내키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설마 퇴근을 못 하게 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뭐 괜찮아. 원장님이 아주 열정이 가득하신 분인가 보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고말고. 그래서 거기가 어느 병원이야?”
“여기요.”
잔뜩 궁금해하는 이동훈을 보며 태경이 간단하게 답했다.
“어! 여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지금 여기 우리병원이요. 제가 우리 이동훈 선생님 스카우트 제안하는 거예요.”
“……!”
“저랑 같이 일하는 거 어떠세요. 선배님.”
드르륵- 탁-
“여기!”
태경의 말에 너무 놀란 이동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낙 급하게 일어나다 보니 의자가 뒤로 넘어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여기서 우리병원에서 함께 일하자는 거야? 맞아?”
“네, 맞습니다!”
“근데 여기 마취과 선생님 있잖아. 그만둬? 결혼하나?”
“결혼은 무슨 결혼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진정하시고 좀 앉으세요.”
드르륵-
놀란 이동훈이 여전히 책상 앞에 서 있자 태경이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며 그를 앉혔다.
“마취과 한 명 충원하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그만두셨다는 소식 듣고 제안해 드린 거예요.”
“……!”
“앞으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논의하겠지만, 다 들어 보시고 안 맞으면 당연히 거절…….”
“할게! 해!”
태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동훈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태경 아니, 김 선…. 아니지. 원장님 저 우리병원에서 무조건 일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야 같이 일하면 좋지. 그보다 우리 원장님이야말로 괜찮겠어?”
“당연하죠.”
“혹시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라면 나 마음만 받을게.”
이동훈은 고계득으로부터 태경이 교수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을 부탁받았지만, 설득하지 않았고 결국 그 일의 여파로 병원에서 잘리게 됐다.
그 때문에 이동훈은 혹시라도 태경이 미안한 마음 때문에 함께 일하자고 한 건 아닌지 싶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았어요. 전혀 아니에요. 선배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의사로서 순수한 마음으로 제안해 드린 겁니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동훈은 사실 태경을 만나러 왔을 당시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는 말이 상당히 뇌리에 남았었다.
그래서인지 시설이 화려하고 좋은 병원보다는 사람 냄새 풍기는 괜찮은 병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태경에게 직접적으로 일자리 부탁할까도 싶었지만, 괜히 부담스럽게 하는 거 같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일하자고 하니 정말 진심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정말 열심히 일할게.”
“열심히도 좋지만, 무리하지 말고 즐겁게 일해 주세요.”
“당연히 즐겁게 일하지. 근데 나 언제부터 일해? 다음 주? 지금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번 주부터 일해도 상관없어.”
이미 마음만은 벌써 출근한 이동훈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나 컨디션도 아주 좋아.”
“출근 날짜는 일단 4주 뒤로 생각하고 있어요.”
“4주? 4일이 아니라 4주라고?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선배님 지금 컨디션이 좋은 거, 알죠. 그런데 오늘 퇴원하셨잖아요. 한동안 푹 쉬고 3주 뒤에 첫 항암 시작한 다음에 그때 컨디션이 괜찮으면 다음 주부터 일하는 걸로 해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둔 거예요.”
항암 치료를 하면서 일을 하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병에 종류와 진행 단계 그리고 주치의와의 상담과 개인 컨디션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이긴 했다.
이동훈의 경우 항암이 크게 무리 없이 잘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약이라는 게 개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에 일단 첫 항암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다 선배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그래, 좋아! 주치의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
“환자로서 자세가 아주 좋은데요?”
“당연하지. 아무튼 김태경 원장님, 앞으로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계속 잘 부탁드려요.”
이동훈은 태경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다시 한번 태경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한빛이가 했던 말이 단순히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천사 같은 아이의 말대로 오늘 하루에 감사하니 이렇게 좋은 일이 행복으로 찾아온 것 같았다.
한빛이를 만난 건 이동훈의 남은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였고, 그는 두고두고 어린 천사에게 마음으로 감사했다.
* * *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이수정은 전단지를 돌리고 뺑소니 사고를 당한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나처럼 남편을 면회하고 올 때면 외상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남편의 얼굴이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 과일 들여가세요.”
“생선이 싱싱합니다.”
“아낌없이 재료를 듬뿍 넣은 생 모차렐라 피자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 들어선 작은 시장 사이로 들려오는 상인들의 힘찬 소리에 힘없이 걸어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지친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피자 트럭이었다.
‘엄마 나 피자 먹고 싶어.’
전날 온종일 피자 타령을 하던 막내의 외침이 떠올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다음에 사 준다고 했겠지만, 어제따라 간절한 아이의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생 모차렐라 피자 단돈 9,900원.
트럭 간판에 쓰인 가격을 보며 이수정은 주머니 사정을 잠시 떠올렸다.
남들이 들으면 그깟 9,900원짜리 피자 한 판에 궁상을 떨고 있다고 한소리를 하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들어오던 고정 수입은 확연히 줄고 고정 지출은 똑같으니 자연스레 돈에 눈치를 보게 됐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가장 기본으로 한 판 주세요.”
“네, 음료 필요하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9,900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백 원짜리 동전을 더해 돈을 낸 이수정은 피자가 조리될 동안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시니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신 것 같네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세요.
고계득을 만나고 일주일 뒤 연락이 온 날,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문자를 보내왔다.
부탁을 들어주면 남편의 치료비와 후원을 해 준다는 그의 말에 이수정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두 가지 답변이 머릿속을 저울질했지만, 어떤 게 정답인지 판단이 서실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탁 한 번만 들어주면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싶었다.
무엇보다 곧 있으면 전셋집 재계약 논의를 다시 해야 하는 시기라 돈이 필요했다. 일단 집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겠지만, 인상을 피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반대로 부탁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미치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걱정만 쌓여 가는 이 현실이 답답했다.
“손님, 피자 나왔습니다.”
“수고하세요.”
역시나 오늘도 아무 소득 없는 고민을 하던 이수정은 피자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철컥-
“엄마!”
“다녀오셨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둘째와 막내가 사랑스러운 얼굴로 지친 그녀를 반겼다.
“어! 피자다~!”
막내는 엄마를 보던 눈빛을 피자로 돌리며 좋아했다.
“엄마 이거 피자 맞지?”
“응. 엄마가 사 왔어.”
“와! 우리 엄마 최고.”
피자 한 판에 세상을 다 기진 듯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이 이수정은 어쩐지 마음이 아렸다.
“현미야. 오빠 거 남기고 현웅이랑 둘이 먹어.”
“엄마는 안 먹어?”
“엄마 속이 답답해서 별로야.”
“그럼 약 먹어야지. 여기 소화제. 얼른 먹어.”
언제나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는 둘째 딸이 물약 소화제를 찾아 내밀었다.
“이미 먹었어. 현미 너 또 설거지했어?”
아직 어린 중학생 둘째 딸은 틈남 나면 설거지를 하며 엄마를 도왔다. 딸아이의 예쁜 손이 거칠어지는 게 싫었던 이수정은 아이의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설거지를 하는 게 못마땅했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피부에 안 좋다니까.”
“현웅이랑 내가 먹은 것만 했어.”
“다음부터는 하지 마.”
“네.”
철컥-
방에 들어온 이수정의 시선이 화장대 위에 쌓인 각종 고지서를 맴돌다 바로 옆에 있는 종이봉투로 향했다.
고계득이 두고 간 돈뭉치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넘게 자석이 달린 것처럼 저도 모르게 시선이 돈을 향했다. 아니, 돈을 좇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저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겠지? 얼마일까……?’
이수정은 오늘도 비슷한 생각을 반복했다. 그렇게 천천히 돈이 든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상자가 배달된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 돈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힘없는 손길이 봉투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Rrrrrrrrrrrrrrrr
마치 유혹의 손길을 끊어 내려는 듯 휴대폰 벨 소리가 이수정의 손길을 멈췄다.
“여보세요?”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저 현준이 담임 김소이입니다.
전화를 건 상대는 고등학생 첫째 아들의 담임이었다.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놀라셨죠?
“네. 무슨 일이신지……?”
공부도 잘하고 주변에 친구도 많은 첫째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다 잘하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는 문제 아이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에 이수정은 갑작스러운 담임의 전화가 의아스러웠다.
-다름이 아니라 현준이 일 때문에 연락을 드렸어요. 안 그래도 아버님 일로 힘드실 것 같아 계속 고민했는데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혹시 우리 현준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점점 목소리가 커진 이수정이 다급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