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75화 (174/472)

175화. 발단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혹시 우리 현준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점점 목소리가 커진 이수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행여 아들이 다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생님! 현준이 다쳤나요?”

-아니요. 어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게 아니라 현준이가 수학여행 신청도 안 했는데 그것보다 야자를 안 한 지 좀 됐어요.

“야자요?”

-네.

담임의 말에 이수정은 크게 놀랐다. 수학여행 신청을 안 했다는 말보다 야자를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학교 자체가 학구열이 뛰어난 학교였기에 예체능 전공이 아닌 아이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전체적으로 야자를 했다.

“현준이가 야자를 안 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의 사고 이후 이수정은 주로 저녁 시간에 파트 타임으로 마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감 시간까지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야자를 하는 아들보다 좀 더 늦을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애들은 자?’

둘째와 막내가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날에는 야자를 끝내고 온 첫째 아들이 반기기 일쑤였다.

‘야자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먼저 자도 되는데 뭐 하러 엄마 기다리고 있어.’

‘하나도 안 피곤해. 어차피 숙제하고 있었어,’

‘그랬어? 아들, 내일은 엄마 조금 일찍 나올 수 있는데, 야자 끝나고 같이 올까?’

‘아니야. 엄마 일찍 끝나면 집에 와서 쉬어. 내일 오다가 철이네서 문제집 빌려오기로 했어.’

‘그래? 알았어. 무리하지 말고.’

가끔 야자 끝나고 같이 오자고 해도 친구들과 함께 온다는 말에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담임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선생님. 혹시 뭐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제가 며칠 전에도 물어봤을 때 잘하고 있다고 했거든요.”

-현준이가 한 달 전인가 그때, 저한테 당분간 야자를 못 할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님 일로 동생들을 봐야 해서 집에 일찍 가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담임은 현준이가 꾀를 부리는 아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반대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솔직히 다른 아이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준이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학습 태도와 성적이 좋았기에 혼자서도 공부를 잘할 거라 생각하고 허락한 것이다.

-그래서 현준이를 믿고 당분간 야자를 안 하는 걸로 했어요.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고요. 현준이가 성적이 조금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성적이요?”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던 이수정은 현준이가 시험을 본 것도 깜빡하고 있었다. 또한 워낙 스스로 잘하는 첫째였기에 동생들과 달리 잘 살펴보지 못했다.

-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생전 안 그러더니 졸기 시작하면서 집중을 못 하더라고요.

담임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현준이가 걱정돼 따로 불러서 물어봤지만, 집에서 공부하느라 잠을 못 잤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현준이의 다른 모습에 담임은 결국 친한 친구에게 물어봤고, 그 내막을 알게 됐다.

-철이가 그러는데 현준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현준이가 아르바이트를요?”

-네, 어머니.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알바를 하고 있었어요.

“잠시만요. 선생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배달……을 하고 있다고요?”

오토바이 배달이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에 이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우리 현준이가요? 오토바이를? 어떻게 이런 일이…….”

-철이 말로는 배달 알바비가 좀 괜찮으니까 오토바이 면허까지 땄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혼자서 해결할까 하다가 그래도 어머니께서 아시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하! 네, 선생님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전 현준이가 한창 공부에 집중할 때이기도 하고, 오토바이는 위험하니까 아르바이트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저기, 선생님. 우리 애가 일하고 있는 곳 어딘지 아시죠?”

-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아들이랑 얘기해 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이수정은 머리가 답답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전화를 끊었다.

“여보세요? 점장님. 저 이수정이에요.”

잠시 생각하던 이수정은 마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병가를 신청했다.

“네, 아니요. 몸살기가 좀 심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착실하게 나왔기에 점장은 싫은 소리 없이 그녀의 병가를 수락했다.

사실 하루 마트를 쉬면 아쉬운 건 이수정이었다. 급여에서 오늘 일당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가끔 주말까지 나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오늘은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아들이 오토바이로 배달 일을 한다는 소식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Rrrrrrrr

-oo 치킨집. 위치: 학교 뒷문에서 500미터 직진 후 삼거리에서 우회전 후 바로 있어요. 가게 번호는 xxx-xxxx입니다.

담임의 문자를 받은 이수정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현미야? 엄마 나갔다 올게. 밥 차려 놨으니까 이따 현웅이랑 밥 먹어.”

“응. 걱정하지 마.”

“엄마 일 나가?”

“아니, 엄마 지금 형아 데리러 가는 거야.”

“형아네, 치킨집 가는……읍!”

“야! 차현웅!”

막내가 남매끼리의 비밀을 발설하자 깜짝 놀란 둘째가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빠 알바하는 거 너희 다 알고 있던 거야?”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문단속 잘하고 있어.”

어린 두 아이와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수정은 서둘러 치킨집으로 향했다.

* * *

oo 치킨집

딸랑-

“다녀왔습니다.”

“어, 현준이 배달 갔다 온 거야?”

“네.”

배달을 다녀온 현준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남자 사장이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요즘 알바들보다 늦게 나온다고 마나님이 잔소리해서 일찍 나왔어. 커피 한잔할래?”

가게 사장은 캐리어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현준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너 커피 맛은 알고 마시는 거야?”

“그럼요. 집에서 공부할 때는 졸음 쫓느라고 종종 마셨어요.”

“그건 그렇고 현준이 너 여기 잠깐 앉아 볼래?”

사장은 테이블 의자를 하나 빼며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너 일 시작한 지 한 달 좀 넘었지?”

“네.”

“힘든 건 없어?”

“처음에는 주소 외우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 외워서 괜찮아요.”

“내가 사실 고등학생들 배달 알바는 가능하면 안 쓰거든. 배달 일이 쉬워 보여도 이게 막상 해 보면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두는데, 현준이 넌 참 열심히 하더라.”

치킨집 사장은 처음 현준이가 일을 구한다고 찾아왔을 때도 거절했었다. 그런데 간절한 표정과 딱한 사정 때문에 알바생으로 고용한 것이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냥……. 비슷하세요.”

“꼭 일어나실 거야.”

“감사합니다.”

“저기 현준아?”

“네?”

“나도 자영업을 꽤 하면서 사람을 하도 보다 보니까 그 대충 그 사람에 대해 보이거든. 너 학교에서 공부도 아주 잘한다며?”

“네? 그걸 사장님이 어떻게…….”

“네 친구 철이가 며칠 전에 치킨 사 가면서 그러더라.”

같은 반 친구이자 단짝인 철이는 사장에게 공부 잘하는 현준이가 배달을 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었다.

“그래요?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바른 소리지. 현준아 너 배달 일 계속할 거니?”

“당분간은요. 엄마 혼자 마트 일 하시느라 좀 힘드시거든요. 집에 이거저거 들어갈 돈도 많고 저 밑으로 동생도 둘이나 있어요. 솔직히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제가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요.”

사장님이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현준이는 배달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너, 엄마도 알바하는 거 알고 계신 거지?”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처음에 동의서도 드렸잖아요. 엄마도 성적 떨어지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신 거예요.”

“그래, 알았다.”

“사장님, 저 상자 접을게요.”

사장이 혹시라도 또 질문을 할까 싶었던 현준이는 서둘러 창고로 치킨 상자를 가지러 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식어도 맛있는 oo 치킨입니다.”

현관에 달린 벨 소리와 함께 사장의 고개가 입구를 향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작은 손가방을 손에 쥔 여자가 상당히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저기……. 실례합니다.”

“네, 고객님. 포장하시게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일하는 알바생 중에 차현준이라고 있죠?”

“누구시죠?”

사장은 현준이의 이름이 나온 뒤 이수정을 보자 어느 정도 답을 예상하며 물었다.

“현준이 엄마입니다.”

“엄마!”

이수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고에서 치킨 상자를 들고 온 현준이가 홀로 들어왔다.

“사장님 갑자기 죄송하지만, 현준이를 좀 데려갈게요. 더 이상 아르바이트하기 힘들 것 같아요.”

“엄마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해.”

“조용해! 너, 한마디도 하지 말고 가만 있어.”

놀란 현준이가 엄마의 팔을 잡으며 말리자 이수정이 바로 정색하며 아들의 언행을 제지했다.

“제가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아들이 일하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근데 우리 현준이 공부해야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이수정은 사장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닙니다, 어머님. 실은 저도 현준이가 여기서 배달 일을 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수정의 우려와 달리 사장은 현준이가 갑자기 가게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만두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현준이 사정이 워낙 딱해서 일하게 했지만, 저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머님께서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에게 인사를 한 이수정은 현준이에게 다가가 작게 말한 뒤 가게를 먼저 나갔다.

“엄마 나가 있을 테니까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나와.”

“사장님, 갑자기 죄송합니다. 오늘은 일단 집에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제가 가서 엄마를 설득해…….”

“현준아? 사실 너 알바 면접 보러 왔을 때 부모님 동의서 가짜인 거 알고 있었어.”

“죄송해요.”

“죄송하면 가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너 지금 공부할 때야. 그리고 이거 받아.”

“이게 뭔데요?”

사장은 급하게 챙긴 돈을 건넸다.

“너, 오늘까지 일한 알바비.”

“사장님 마음은 감사한데 저 안 받을게요. 저 이 돈 받은 거 알면 그땐 엄마한테 정말 크게 혼나요. 저도 받고 싶지 않고요.”

“그래, 알겠다. 대신 치킨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뵐게요.”

“현준아, 기운 내. 응? 아버지도 반드시 일어나실 거야.”

“네. 감사합니다.”

현준이는 꾸뻑 인사를 하며 치킨집을 나왔다.

* * *

이수정은 집에 올 때까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밖에서 말을 시작했다간 감정이 주체가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안방으로 따라 들어온 아들에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수학여행은 왜 신청 안 했고, 야자는 왜 빠졌으며 거기에 배달 알바? 그것도 위험하게 오토바이 면허까지 따서 알바를 해? 어! 네 마음대로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입이 떨어지자 속상한 마음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엄마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어.”

엄마를 속였다는 사실에 늘 마음이 불편했던 현준이는 먼저 사과를 전했다.

“누가 너보고 엄마 도와 달래? 어! 네가 공부하는 게 엄마 도와주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안 그래도 엄마 힘든 거 알면서 어쩜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해?”

“…….”

“차현준! 대답 안 할 거야?”

“집에…… 지금 우리 집에 돈이 없잖아.”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이수정의 귓가에 이명처럼 울린 뒤 묵직하게 가슴을 때렸다.

0